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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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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시로 키요지

디모데전서 1 15,16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오늘은 바울에 대해서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나누고자 합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디모데서를 쓸 때에는 바울은 자기의 죽음이 임박한 것을 알았습니다. 인생 막바지에서 바울은 자기가 죄인 중의 괴수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놀라운 고백입니다. 대체적으로 노인이 되면 자기의 과거를 자랑하는 법입니다. 일본에서는 나라를 위해서 수고한 이들에게 문화훈장이라든가 훈장을 주는 제도가 있습니다. 젊은 시절에 사회와 국가를 위해 일한 것에 대한 하나의 보상입니다. 그 때에 훈장을 받은 사람은 대체로 친척들을 불러다가 파티를 합니다. 자기가 드러나는 것을 나이가 들어서 그것을 즐기는 것입니다. 바울은 가장 훌륭한 사도 중에 하나라고 여겨집니다. 바울은 해야 할 일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매우 훌륭한 그리스도의 사도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막바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이 바울의 겸손함과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것은 놀라운 점입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자기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 때문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사람의 육은 자기를 드러내고자 하는 강한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울 자신이 구원받은 것은 본이라고 말했습니다. 자기 같은 죄인을 긍휼히 여기셔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17절에 보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17절을 읽게 되면 사도 바울은 자기를 자랑하기는커녕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하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죄인이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이외에는 없다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구원받은 것도 바울처럼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스데반의 기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았다고 생각이 됩니다. 물론 하나님은 바울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바울이 이끄는 사람들로부터 죽임을 당했습니다. 스데반이 죽을 때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 스데반의 기도로 바울이 구원받았다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바울은 주님을 만나서 주여라고 말했지만 그 이전에 이미 바울의 마음은 밭이 갈아져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로 바울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큰 사명을 주셨습니다.

사도행전 9 15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이와 같이 바울은 구원받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뜻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택한 그릇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말씀대로 믿음생활을 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전도를 했을 때 유대인들로부터는 박해를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축복이 유대인의 것이지 이방인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바울을 박해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을 위해서 택함을 받은 것을 알았기 때문에 유대인이 아무리 핍박을 해도 이방인에게 복음전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데 우연히 박해자가 나타난 것이 아니라 마치 그림자처럼 박해가 따라다녔습니다. 그런 일을 당하더라도 바울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든지 대부분 전도하러 갔을 때 먼저 회당을 찾았습니다. 회당에 간 목적은 먼저 거기에 유대인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회당에만 성경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들 손에 성경이 들려 있는 것은 엄청난 복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회당에서 말씀을 읽었습니다.

바울은 많은 계시를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받았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근거해서 그 계시를 이해하고 하나님을 이해했습니다. 신약성경 서신을 쓴 분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반듯하게 이해한 가운데 기록을 한 것입니다. 말씀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대하여 몇 가지 서신 가운데 일부러 기록한 데도 있었습니다. 구약성경은 교회시대에 있어서는 교회에 교훈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와 같이 바울은 말씀을 존중한 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본으로 택하셔서 사도의 일을 맡기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바울을 본받는 믿음생활도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본으로서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왜 모본이 필요하겠습니까? 왜냐하면 말씀으로 가르침 받는 진리를 눈으로 보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진리를 듣더라도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는 모임 사람들을 보지 아니하면 복음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구체적으로 형제들이 어떻게 사랑하는가를 보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구체성이 드러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바울을 본 받아도 좋습니다. 바울을 몇 번이나 나를 본받으라는 말을 직접 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바울을 본 받는다면 안전합니다. 디모데서에서 바울은 머지않아 주님 앞에 가기 때문에 모임의 질서에 대해서 기록을 했습니다. 디모데는 젊은 전도자였습니다. 그렇게 젊지는 않다고 생각을 합니다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모임이 질서를 가지고 섬기게 하기 위해서 디모데서와 디도서가 기록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옛날 일본의 명치시대부터 다이쇼라는 임금시대에 걸쳐서 유명한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우찌무리 간죠라는 그리스도인이 있었습니다. 제가 구원받았을 때 선배들이 그 당시 성경에 관한 해설서들은 근대주의적인 책들이기 때문에 우찌무라 간죠의 책을 읽어도 좋다는 권면을 제가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우찌무라 간죠씨의 책은 인공적인 조직은 교회가 아니라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찌무라 간죠씨는 무교회라는 타이틀을 생각했습니다. 처음에는 강연 등을 통해서 우찌무라 간죠씨가 만든 책자를 읽는 것으로 알려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어쨌던 교파처럼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우찌무라 간죠씨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분은 글도 잘 썼고 말도 잘했습니다. 그래서 그 때 동경대학 대학생들이 많이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 우찌무라 간죠씨가 큰 실패를 했습니다. 하나는 만찬은 해도 좋고 하지 않아도 좋다고 말했고 침례도 받아도 좋고 안 받아도 좋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말씀을 일부를 제거한 것입니다. 또 하나 더 나쁜 것은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는 바울이 나이가 들어가지고 노망이 들어서 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를 무시했습니다. 그것은 성경을 비판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당시 우찌무라씨가 좋다고 하면 좋은 것이고 나쁘다 하면 나쁜 것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수한 믿는 자들이 일어났었습니다. 그 우찌무라 간죠씨의 제자들은 우찌무라씨보다 더 다른 방법으로 선택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더 사람 본위적으로 선택을 해버렸다는 것입니다. 우찌무라씨가 제 1세대, 그리고 우찌무라씨의 인도를 받은 사람들이 제 2세대, 그리고 3세대 시기가 되었을 즈음에 말씀의 가르침이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3세대가 될 때 사람들은 극단주의자가 되어서, 누가복음 18장에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가 나오고 있습니다만 그 때 세리는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 사람이 의롭다함을 받고 집으로 돌아간 것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 때에 바리새인은 자기의 믿음을 자랑했습니다. 그 무교회주의자들의 제 3세대 사람들은 복음서 전체를 취하지 않고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 고백 그 하나만으로 전부다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 무교회는 없어졌습니다. 말씀을 근거하지 않으면 다음 세대는 앞 세대보다 성경을 더 무시하게 되어 있습니다. 3세대가 되면 더욱 더 무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으로 돌아가지 않는 한 망하는 것입니다. 저는 처음에는 모르고 모임의 가르침하고 가깝구나 하고 읽었는데 최근에 와서 보니까 말씀이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더해서도 빼서도 안 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 마지막 부분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약 성경으로부터 멀어져 간 그 다음에 회개하지 않으면 점점점점 더 나빠지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0장에 의하면 우리가 회개하고 믿어서 구원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에 대한 말씀은 회개에 관한 것입니다. 그 탕자는 아버지에게로 되돌아갔습니다. 죽을뻔한 그 즈음에 돌아간 것입니다. 그 탕자는 아버지에게 구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아버지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아버지는 기꺼이 맞아주시고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것은 구원받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회복에 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회개는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 동일한 장에 100마리 양에 관한 비유가 나옵니다. 그 목자가 잃은 양을 찾자 양을 어깨에 메고 돌아왔습니다. 99마리보다도 그 한 마리를 기뻐했습니다. 그 기쁨을 생각하면 양을 찾으러 나간 목자도 기뻐했습니다. 또한 그 양도 기뻤을 것입니다. 그 양을 찾았다고 해서 주변 사람들을 불러서 함께 기뻐했습니다. 그 때 하늘에 기쁨이 있다고도 말했습니다. 4중의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회개를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는가를 나타내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복음을 전할 때 흔히 말하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진리를 안다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나는 무엇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느냐? 복음으로 말미암아서입니다. 복음의 진리를 알면 교회의 진리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한가지 예를 말씀 드리면 우리는 전도집회에서 믿지 않는 자들에게 헌금통을 돌리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의문을 제기합니다. 헌금통을 돌려도 죄는 아니지 않습니까? 로마서 3장에 따르면 하나님은 우리들을 값없이 구원해 주셨다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값없이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자가 믿지 않는 자에게 돈을 받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구원은 선물이기 때문에 구원받을 때 돈은 내지 않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선물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듣고서 값없이 영생을 선물로 얻었습니다. 그 복음을 이해하게 되면 자연히 찬송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선물을 받아도 선물 준 사람에게 고맙습니다라고 인사를 합니다. 값없이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감사와 예배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로서 구원은 값없이 받았다는 것, 아무런 차별이 없다는 것 그리고 선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형제자매들간의 교제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형제들 가운데는 특별한 사람이 없습니다. 전부다 죄인이었던 사람으로서 동일한 영원한 생명을 받았습니다. 동일한 성령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이것은 모세의 십계명을 지켰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율법이 아니고 복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순종하는 모임은 말씀대로 순종하는 모임이 되는 것은 자연스런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복음의 토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어떤 구원인지 잘 음미를 해야 합니다. 복음의 진리라고 한다면 요한복음 3 16절일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5 1~6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바울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복음이라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장사 지낸바 되셨습니다. 그리고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부활하신 이후에 제자들을 만나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요한복음 3 16절에는 부활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여기서 바울은 구체적으로 복음의 내용을 밝혀주었습니다. 또 요한복음 3 16절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이 있는데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실제로 죄가 있었지마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는 기록이 거기에는 나와있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입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한 반드시 구원을 받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지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복음에 덧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복음을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교회진리는 이 복음의 진리에 기초해서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여 주셨기 때문에 의롭게 살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말씀의 복음을 믿었습니다. 여러분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기 때문에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나 교회가 구원받는 조건을 덧붙여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단이라고 하는 것은 이 복음을 굽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카톨릭 같은 경우에는 예수님을 믿은 이후에 7가지 의식을 행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로부터 해방이 되었습니다. 카톨릭은 말하자면 믿음으로 죄로부터 해방되었는데 그들이 말하는 7가지를 지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한 무리들은 복음에 근거하지 아니하고 자기들의 의견을 덧붙인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이후에 실패한다면 말씀에 근거해서 자백하면 용서를 받습니다. 카톨릭은 그 상담역을 맡는 신부에게 가서 자기가 이런 죄를 지었다고 그 신부에게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부는 그 사람에게 매일 아침에 미사 하러 오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용서 받습니다 라고 그 사람에게 가르칩니다. 그로 말미암아 카톨릭 신자는 교회에 노예가 되고, 그래서 사람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자유를 위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유를 갖고 있지만 주님의 말씀 안에서 자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말하는 아무것도 순종하지 않아도 된다는 그런 자유가 아닙니다. 주 안에서의 자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올바른 자유인데 사람들은 인간적인 의를 거기에다 덧붙여서 말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를 보게 되면 복음은 이렇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0 12~14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한 제물은 물론 십자가를 말합니다만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는 것은 영원한 보증이 아닙니까!

17,18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이와 같이 우리는 참된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영원히 온전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모든 믿는 자는 두 가지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침례와 만찬입니다. 이것은 의식(儀式)이지만 형식과는 다릅니다. 예를 들면 텔레비전 드라마에 나오는 결혼식은 형식입니다만 실제의 결혼식은 의식입니다. 왜냐하면 결혼한다고 하는 실체가 있기 때문입니다. 형식을 실체가 없어도 됩니다. 그래서 침례 때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물 속에 들어갑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상징하는 의미로 물에서 올라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확실하게 침례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 행위로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만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부활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말씀에 따르면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은 사실이라고 매주일 저희들은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나타내는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죽음이 있는 하나의 실체로 그것은 형식이 아니고 의식인 것입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조금 전에 말한 우찌무라 간죠씨는 일본에 있는 교회들이 너무나도 타락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은 잘못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하지 않겠다고 말하게 된 것입니다. 그 속에 있는 십자가와 부활을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에 큰 실패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의 표현인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이야말로 복음인데 그것을 부인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임이 침례와 만찬을 행하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출생했습니다. 복음의 진리를 알게 되면 교회진리를 행동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에 의해서 분명하게 나타내었습니다. 바울이 만든 것이 아니고 하늘로부터 바울에게 주어진 계시였습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소중히 여기지만 그러나 서신서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신학자들은 바울의 서신을 바울신학이라고 말합니다. 학문은 인간의 것입니다. 진리는 하늘의 것입니다. 종교와 진리는 다릅니다. 때대로 많은 교회들은 그리스도교라는 종교를 만드는데 유감스런 일입니다. 진리인 즉 사람들을 복되게 하는 것을 종교로 만드는 것은 안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음 아파하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의 진리를 이해하고 그것을 근거해서 개인적인 삶이나 모임적인 삶을 사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 바울이 이와 같이 위대한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죽기 직전에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또한 바울은 자랑할 것이 있다면 나의 연약함을 자랑한다고 했는데 이것도 놀라운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강함을 남에게 나타내고 싶은 것입니다. 바울은 기록에 따르면 이 땅에서 주님을 두 번 만난 셈이 되는 데 한 번은 구원받을 때이고, 한 번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갔을 때 주님을 만났습니다. 고린도후서에 의하면 바울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갔었습니다. 그러한 놀라운 사실을 경험한 바울 이외에는 없지 않겠습니까? 바울은 아무리 자랑해도 문제가 없었을 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도 육이 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 놀라운 경험을 자랑해서는 안된다고 바울에게 가시를 주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자랑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 가시가 제거되면 더 주님을 잘 섬긴다고 생각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약한 끝에 강한 것을 아셨기 때문에 바울의 그 가시를 제거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한 위대한 바울이지만 육은 우리들과 똑같은 육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교만하지 말도록 가시를 주셨습니다. 바울에게도 교만해질 수 있는 여지의 마음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배려로 말미암아 조금 고통스러웠지만 바울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바울은 모본을 보이고 말씀을 받고 하나님의 계시를 보여서 우리들에게 유익을 주었습니다. 사람들이 바울을 하나님처럼 여기면 안되기 때문에 그렇게 기록을 일부러 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자신도 형제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을 경배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바울교회라는 교회가 흔히 있지만 그것은 이상합니다. 모임은 하나님의 것이요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바울의 것도 아니고 장로들의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도 모임도 복음으로 말미암아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들이 기뻐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09 10 21일(수) 진해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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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