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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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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9 12~13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만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의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를 인하여 넘쳤느니라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저희와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방금 본 말씀에서는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에게 물질을 보냈습니다. 그것을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라고 연결시켜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몇 번이나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복음을 믿고 복종 즉, 순종한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로마서 1장에 믿고 순종이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은 복음을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16장에서도 믿고 순종이라는 말로 끝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모세의 율법에서 해방이 되었지만 우리들에게 복음을 순종한다는 것이 주어졌습니다.

여기서는 이방인 성도들인 고린도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에게 물질을 보냈습니다. 이 일에는 바울은 한가지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복음에는 이방인과 유대인이 구별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사고(思考)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 당시에는 이방인과 유대인의 틈새가 컸습니다. 사실은 유대인들이 전도해서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영적으로 이방인들보다 복을 받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믿는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연결시켜서 신약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유대교에 한 부분이라고 하는 생각들이 존재했습니다. 구원받은 형제들 중에도 그러한 영향아래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가 되어서 하늘의 복을 이어 받는다는 것을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들이 정말로 믿고 그리스도의 복 가운데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증거로서 이 교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복음을 믿었더니 이번에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래서 흉년으로 고통받고 있는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이방인 구원받은 성도들이 물질을 보냄으로써 복음을 복종하고 있다라는 고백의 증거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를 보면 죄인인 이방인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방인들은 원래 우상숭배자라는 사고가 그 표현 밑바닥에는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죄인인 이방인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변했습니다. 하나의 증거는 우상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은 복음입니다. 로마서 10장에 의하면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복음의 능력이 가장 많이 나타난 곳이 어딘고 하니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바뀌었다는 것을 방금 읽은 이 장에서는 행위로 나타냈던 것입니다. 그래서 믿은 그 순간에 복음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고백했으면 그 고백에 충성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복음에서 형제 사랑이 태어났습니다. 복음이 아니면 이방인이 유대인을 사랑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복음은 십자가의 사랑을 전합니다. 그 십자가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 동일한 십자가의 사랑을 받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사랑하라는 율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기는 물질적인 모임간의 교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11 22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이곳은 스데반의 박해의 결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에 있던 사람들이 여러 곳으로 흩어졌습니다. 안디옥에서 믿는 유대인들의 증거로 말미암아 믿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이 소문을 예루살렘에 있는 형제들이 듣고 바나바를 보냈습니다. 구원받은 것만 가지고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성경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가르치면서 생각하기를 증거는 혼자서는 안된다 그래서 바울을 불러다가 바울과 함께 안디옥에서 1년간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한 사람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지배를 당하면 문제가 발생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강한 부분과 약한 부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지배는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바나바는 선배이었지만 후배인 바울을 맞으러 갔습니다. 26절에 의하면 교회에 1년간 모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안디옥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믿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잘 가르침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자라는 의미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받았습니다. 유대교도 아니고 다른 종교도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 당사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 불렀습니다.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자기 자신들이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자칭한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아가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성령으로 예언을 했습니다. 그래서 29절에 제자들은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성도들에게 부조를 보낸 것입니다. 안디옥에 있는 사람들은 믿는 유대인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안디옥분들이 이런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예루살렘에 있는 분들이 문제가 생겼을 때 돕자라는 생각이 나왔습니다. 우선 첫번째는 예루살렘 사람들이 와서 말씀을 통한 교제가 있었습니다. 두번째는 안디옥 쪽에서 물질을 보냈기 때문에 물질을 통한 교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임과 모임 사이에 교제가 있는 것은 복된 것입니다. 어느 경우에 모임에 모든 은사가 다 있는 것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다른 모임에 있는 은사를 초청해서 듣는 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그리하여 교제라는 것이 이와 같이 행해졌습니다. 근본적인 것은 고린도전서 1 9절에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이 말씀에 의하면 불러냄을 입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케 함을 입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지 않았다면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과 교제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리스도로서 주님은 3년간 참으로 자주 제자들과 함께 교제해 주셨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대로 40일간에 주님께서 여러가지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들은 지금 성경을 읽고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합니다. 그래서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 안으로 들어가는 입장이 주어진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지금 현재 어느 곳에서나 어느 때나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교제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교제하기 때문에 형제자매들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형제간에 사랑하는 것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빌레몬서 1,2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및 자매 압비아와 및 우리와 함께 군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이 편지는 바울이 빌레몬이라고 하는 개인에게 보낸 편지인데 놀라운 교제의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빌레몬은 골로새 모임에 장로인듯 합니다. 여기의 자매 압비아는 빌레몬의 부인인 듯 하며 아킵보는 그 집에 종이거나 집사인 듯 합니다. 그 빌레몬의 집에 골로새 모임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목숨을 걸고 세계 전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로 말미암아 서신을 기록했습니다. 엄청나게 중요한 일이기도 하고 바빴습니다. 어떤 이들은 바울이 구원받고 나서 전도한 기간은 18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짧은 기간에 놀라운 일들을 해 내었습니다. 3번이나 전도 여행을 하고 이 위대한 바울이 한 종인 오네시모를 위해서 편지를 썼습니다. 종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좋다는 사상은 바울 속에 없었습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집에 종이었는데 그 집에서 도망쳐갔습니다. 도망 나올 때 빌레몬의 집에 있는 어떤 가치있는 것들을 훔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이 당시 노예가 그 주인집에서 도망치게 되면 이마에 당시의 문자로 F라는 화인을 찍었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 도망치게 되면 사형을 시켰다고 합니다. 그것을 안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물건을 훔쳐서 아시아에서 먼 로마까지 도망을 간 것입니다. 잘 알 수 없지만 로마에서도 오네시모가 범죄를 해서 체포된 가운데 바울이 갇혀 있던 감옥에 갇히게 된 듯 합니다. 바울은 감옥에 들어가서도 간수에게도 복음을 전했고 이와 같이 함께 갇힌 오네시모에게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죄수가 간수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상상하기가 어렵습니다. 같은 죄수에게 복음을 전하기도 쉽지 않을 것인데도 바울은 전도하였습니다. 오네시모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매우 이상스런 방법이 아닙니까! 자기 주인의 물건을 훔쳐 멀리 로마까지 도망쳐 나온 오네시모였습니다. 오네시모가 구원받는 섭리였습니다. 로마서 8장에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네시모가 도망 간 것을 나쁜 일입니다. 훔치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니고, 또한 감옥에 들어가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의 죄에 대한 설명은 명백했다고 봅니다. 그것은 죄라고 책망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들은 오네시모는 변하여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원래 주인인 그 주인에게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엄청나게 힘든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 노예들의 일반적인 입장이 있기 때문에 노예가 구원을 받아 모임에 더해진다는 것은 당시 성도들에게 감정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정말로 믿었을까 라는 마음을 갖게 되기도 했습니다. 그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은 믿은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오네시모는 회개했습니다. 그 믿음의 고백에 따라서 원래 주인에게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그 보증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편지를 썼습니다. 바울이 사도로서 이 오네시모를 용서하라고 명령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겸손하게도 이 오네시모를 용서하라고 권했습니다. 그래서 빌레몬에 대해서 그의 좋은 점을 먼저 말했습니다. 5절에 따르면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그리고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라고 했습니다. 6절 마지막에는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네 믿음이 역사했다라고 했습니다. 7절에서는 너의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부탁을 할 때 바울이 빌레몬의 좋은 점을 나열한 다음에 부탁의 말을 썼습니다. 이 작은 빌레몬서라는 편지에 사랑이라는 말이 5번 나옵니다. 12절에는 (오네시모)는 내 심복이라고 했습니다. 나를 영접하듯이 영접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감옥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나이든 나 바울이라고 말하며 감옥에 갇혀있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의 입장 때문에 오네시모에게 바울을 섬기도록 하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오네시모는 너의 종이며 빌레몬을 섬기는 것이 오네시모의 역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빌레몬의 동의 없이는 오네시모를 바울 자신을 섬기게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종을 놓아주는 마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자발적으로 놓아주도록 부탁을 했습니다. 오네시모는 나에게 유익하다고 말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오네시모는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바울의 일에 동역할 수 있다는 것은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네시모를 빌레몬 너에게 돌려보내는데 빌레몬이 거기서 복음을 전하는데 유익할 것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만약 빌레몬이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오네시모를 용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네시모가 변했기 때문에 그리고 빌레몬이 변했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종에서 해방을 시키더라도 그 때는 형제로서 받아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부탁을 했지만 또 하나는 17절에 보면 네가 나를 동무로 알진데처럼 친구로서 부탁을 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을 받아들입니다. 받아들일 때 무엇이든지 다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분별을 해서 받아들이라는 의미의 말씀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이서 9~11 편집자 추가)

받아들이기는 하되 분별력을 가지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흔히 당신은 사랑을 가지고 있지 않느냐며 무엇이든지 받아들이도록 하는 요구가 때때로 있습니다. 사랑에도 반듯하게 분별력을 가지고 나타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빌레몬이 분별력을 가지고 오네시모를 받아들이도록 자세하게 편지를 썼습니다. 복음의 능력이 얼마나 큰가를 바울은 이 편지를 통해서 나타내었던 것입니다.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받아들임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실천할 수가 있었습니다. 후반에 보면 나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라는 말을 보아서 바꾸어 말하면 오네시모를 영접했는지 아니했는지를 알아보러 가겠다는 의미로도 읽혀지는 말씀이 22절에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라 너희 기도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게 하여 주시기를 바라노라 라고 나와있습니다. 이 배경에는 확실하게 영접했는지 안했는지 방문해서 알아보겠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편지에는 서명이 기록되어 있으며 증인들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사신이지만 형제들의 이름들이 뒤에 안부로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로서는 종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믿는 자들에게도 쉬운 일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들의 통념이나 형제 자매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받아들였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상으로 노예해방운동의 참된 사상적인 증거 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이것은 또 한 면에서는 골로새 모임과 로마에서 바울이 교제하고 있는 모임과의 모임적인 교제의 한 면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 때 골로새서도 함께 가져갔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두기고가 동반했는데 2통의 편지 즉 빌레몬서와 골로새서를 전달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레몬을 정말로 사랑했습니다. 이것이 어디에서 오는고 하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복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믿음을 고백하는 것만이 아니고 그 복음에 걸맞은 복종, 즉 순종이 중요한 것입니다. 믿으면 구원받는 것으로 끝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복음의 순종 때문에 서신서들이 기록된 것입니다. 율법으로가 아니라 기쁨으로 복음의 고백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성도들도 유대의 성도들을 사랑하므로 물질을 보냈습니다. 유대인 교사가 이방인들이 모이는 모임에 와서 말씀을 잘 가르쳐 주었습니다. 바울도 바나바도 유대인이었습니다. 복음에서 교제가 발생하고 복음에서 능력이 발생해서 서로 실제적인 교제가 연결이 되었던 것입니다.

(2009 10 22일(목) 진해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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