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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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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구원

사도행전 22장 16~18절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여기에 바울의 침례(세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때 ‘너의 죄를 씻으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침례(세례)는 원래 죄를 씻는 것이 아닙니다. 왜 거기서 죄를 씻으라고 말을 했겠습니까? 바울은 믿을 때까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셔서 바울에게 드러내셨습니다.

이 때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에 보았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스데반이 전도할 때에 있었기 때문에 스데반의 전도를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스데반이 유대인들에게 회개하라고 말했을 때 유대인들이 화를 내며 스데반을 돌로 쳤습니다. 그 때 돌을 치는 사람들의 지도자가 바울이었습니다. 그때 스데반이 마지막으로 기도하기를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스데반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기도를 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니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죽이는 사람들의 죄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스데반은 주님이 기도를 했던 것처럼 마지막에 똑같이 기도를 했습니다. 그 스데반의 기도가 바울을 구원했다고 생각합니다. 박해자인 바울이 죽임을 당하는 스데반의 기도를 보고 무언가 마음에 남은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바울은 맨 먼저 한 말이 “주여”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환상이 아니고 주님을 정말 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목소리를 내셔서 분명하게 바울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반대자인 바울의 마음을 변화시켜서 주님의 증인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16절에 나오는 말의 의미는 박해자인 바울이 더 이상 박해를 하지 않는다고 하는 공적인 증거로서 죄를 씻으라는 말로 표현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모든 죄가 사해지는 것이 침례가 죄를 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침례는 그것을 고백하는 예식입니다. 이 침례를 받는 순간부터 바울은 박해를 하는 편에서 박해를 받는 쪽으로 입장이 바뀌었습니다.

17~19절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내가 말하기를 주여 내가 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여기서 보면 주님께서는 “바울 네가 이전에 그리스도를 박해한 것을 예루살렘 사람들이 알고 있기 때문에 만약에 예루살렘 사람에게 전해도 그들이 듣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21절을 보면 이방인들에게 보냄을 받게 됩니다. 이와같이 침례를 받으니 곧 바로 박해를 받는 입장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이 때는 침례가 중요한 증거였습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말을 해도 박해를 안 받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믿을 뿐만 아니라 순종하게 되면 그 때부터는 많은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공공연하게 공적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드러내는 것은 중요합니다. 물론 믿게 되면 믿었다는 것을 고백해야 됩니다. 예를 들면 니이가타에서는 노방전도를 합니다. 구원받은 형제들이 아주 기뻐합니다. 아직 침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 ‘나도 여러분들처럼 여기서 전도하고 싶습니다’라고 말을 합니다. 당신이 그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먼저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일러 주었습니다. 당신이 고백해서 공공연하게 공적으로 침례를 받고 순종한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 먼저이고 그 다음에 전도를 합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보다도 봉사하거나 간증하는 것과의 관계에서 순종하는 것이 먼저 순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모두가 보고 있는 그 앞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19절에 보면 후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는 성전에 대해서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종종 성전에서 예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때 성전에서 모였기 때문에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라고 했습니다. 이 때 보면 비몽사몽간에라고 되어 있는데 우리는 이런 경우는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는 외국의 어떤 형제님과 일본의 어떤 형제님이 어떤 때에 이런 경우가 있다고 저에게 일러주었습니다. 기도할 때 그렇게 인도 받았다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은 놀라운 것이었다고 그 사람이 말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된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에 따라 다른 것인데 모든 사람이 경험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때 바울은 주님으로 충만되었다는 의미를 말하는 것입니다. 침례를 받고 이방인에게 가리라고 주님이 바울에게 명령을 하셨습니다. 이 때부터 바울은 이방인을 위해서 전도를 시작했습니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것을 부탁을 받았고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명령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순서는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먼저 말씀을 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한번도 외국에 나간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민으로 택함을 받았기 때문에 순서상 먼저 이스라엘에게 주님이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자기 백성에게 오셨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주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주님이 전파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께 찾아와서 자기 자녀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이 여성은 유대인의 입장에서 예수님께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녀의 떡을 취해서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개들도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주님께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개라고 말을 해도 이 여인은 낮아져서 주님께 부탁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겸손해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여인은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부탁을 했습니다. 그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주님은 그여인의 자녀를 낫게 했습니다. 주님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지만 이방이라도 믿음을 가지고 접근하면 이것에 대한 응답을 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도 사마리아 여인은 순수한 외국인은 아니지만 외국인처럼 취급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수가성을 통과하시는 것은 이미 이 여인을 생각하시고 수가성을 지나가셨습니다. 그 여인이 물길러 오는 것을 주님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물을 달라” 그것을 통하여 이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죄가 드러난 이 여인은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이 여인은 신령과 진정으로 아버지를 예배한다고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 여인은 증거를 했습니다.

열명의 문둥병자에 대한 이야기가 누가복음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유대 땅과 사마리아 경계지역에 열 명의 문둥병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문둥병은 동네에서 함께 살 수가 없었습니다. 불쌍한 자로서 한적하고 쓸쓸한 곳에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 지역의 경계선상에 문둥병자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그 지역을 지나가시자 이 열명의 문둥병자들은 예수님께 병을 낫게 해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에수님 앞에 나올 수는 없었기 때문에 큰 소리로 외쳤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하면서 문둥병자들을 보내셨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문둥병자들이 낳은 다음에 제사장에게 가서 해야 할 의식이 있었습니다. 열 명이 나을 것을 확신하고 제사장에게 갔을 것입니다. 그러자 가는 도중에 전부다 나았습니다. 사마리아 문둥병자는 예수님께 감사하기 위해서 혼자 돌아왔습니다. 아홉명의 이스라엘 출신 문둥병자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돌아와서 예배한 문둥병자는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땅 자기 백성에게 오셨지만 이와같이 이방인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배에 대해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사마리아 출신의 여자였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실제로 한 사람은 열 문둥병자 가운데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많은 복을 받았는데 역사상의 기록들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실패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어도 회복되었거나 회복될 말씀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거나 없애는 일을 주님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복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그 자손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출생시킨 민족으로서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사랑했습니다.

많은 경우에 은혜를 입으면 하나님께 감사하겠지라고 생각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으며 대체적으로 그렇습니다. 많은 경우에 은혜를 받으면 감사하리라고 생각을 하지만 건강하고 돈이 많고 환경이 좋으면 많은 그리스도인은 그 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이방인인 그 사람들은 하나님께 은혜를 입자 예수님께 감사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나면서 소경된 자는 처음에 낫고 나서는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그러자 이 소경은 눈뜬 것으로 말미암아 박해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현재의 TV뉴스처럼 뉴스화 시켰습니다. 유대인과 바리새인들은 눈을 뜨게 한 것이 예수님이 아니라고 하는 말을 이 소경의 입으로 말하게 하려 했습니다. 눈뜬 일에 대해서 기뻐해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 부모조차도 함께하고 책임을 져 주지 않고 이제 다 컷기 때문에 자기 말을 할 것이라고 하면서 자녀에게 책임을 돌리고 출교를 겁을 내어서 부모도 그만 외면했습니다. 소경은 눈을 뜨자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 소경되었던 사람을 만나서 “네 눈을 뜨게 한 것은 나”라고 주님은 나타내셨습니다. 그 고을에서 그 사람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이 소경되었던 사람이 얼마나 기뻐했습니까? 눈을 뜨게 한 그분이 이 소경 편이었습니다. 그러자 이 소경되었던 사람이 곧 엎드려서 절, 곧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소경되었던 사람은 진심으로 예수님께 예배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와같이 예배는 여기서 나오는 것입니다.우리는 더욱 더 놀라운 복음을 받았습니다. 우리들은 병나음을 받아도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들에게 생명을 주었습니다. 그것을 믿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 복음을 전하는 그릇으로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보내졌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11,12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여기서 바울은 “내가 전한 복음”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바울은 직접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복음의 내용을 계시받았습니다.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바울은 12명의 사도는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에수 그리스도가 못박히시고 죽은 다음에 부활하시고 나서 믿은 사람이었습니다. 옛 그리스도가 이 땅에 계실 때에는 교제를 하고 있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직접 받은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율법주의자와 믿는 그리스도인 사이에 생긴 문제와 관련되는 책입니다. 그 문제 때문에 갈라디아서가 기록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와 3년 반동안 교제를 가졌었습니다. 베드로가 전한 복음과 바울이 계시 받은 복음이 같다는 것을 갈라디아서 1, 2장에서 증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도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을 유대인들이 퍼트렸습니다. 만약 할례를 받아서 유대교로 들어가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면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과는 대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모든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6~28절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만약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일본인이나 한국인이나 하나입니다. 인종적인 차별이 없습니다. 또 사회적인 차별로서 종이나 자유자도 없습니다. 또한 남녀의 차별도 없습니다. 믿게 되면 인종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성별적으로나 차별이 없습니다. 26절에 의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전부다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그래서 믿게 되면 벽이 없이 교제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다 형제자매인 것입니다. 여기에 침례가 나오는데 여기서 마치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는 것을 옷을 입었다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옷 입었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나타낸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그리스도에게 속하게 되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말씀을 순종하게 되고 그리스도를 나타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침례는 중요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해있습니다. 나는 순종함으로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거룩함을 추구합니다. 사랑을 나타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용서를 나타냅니다. 이 세상의 가치관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영원의 소망을 믿게 됩니다. 이와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에 대해서 죽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2장 14절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이것은 베드로의 실패입니다. 베드로는 이방인에게 최초로 복음의 문을 연 사람입니다. 유대인들과 베드로가 교제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에 이방인들과 교제를 하고 있다가 유대인들이 오자 이방인들과의 교제를 끊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해서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별을 의식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것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습니다. 복음의 진리를 따르는 즉 순종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복음의 진리를 이해하게 되면 교회의 진리를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토대는 복음입니다. 여기에 모임이 믿음의 선언을 하는데 베드로가 차별을 하면 안되는데 그만 차별을 하는 것처럼 나타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자 앞에서 즉 공공연하게 게바를 책망했습니다. 지금은 이런 식으로 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복음의 진리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공공연하게 책망해야 되는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복음의 진리가 아닌 가운데 개인 대 개인의 범죄일 경우에는 개인이 직접 가서 권면하고 안그러면 증인을 데리고 가는 방식을 취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장면에서 베드로에게 권면하는 장면이 왜 중요한고 하면 베드로는 12명의 제자 가운데 앞선 자로서 주님과 교제를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루살렘에서 야고보와 함께 기둥같이 여김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없는 복음을 자기가 전하고 나서도 행동으로 그만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만약 베드로가 이 진리를 깨게 되면 복음의 진리는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의 진리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바울은 공공연하게 이렇게 해서 바로 잡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때때로 착각해서 많은 사람 앞에서 형제자매들을 비난하는 잘못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권고하는 것은 상대방의 덕을 세우기 위한 것이지 그 상대방을 판단하거나 심판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공적인 증거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모든 자 앞에서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복음의 진리를 거역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유대인들을 통해서 복음을 들려준 것이 아니라 나에게 직접 계시하여 주셔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고 말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7~9절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를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야고보, 게바, 요한이 할례자에게 복음을 전함과 바울이 이방인에게 전하는 복음이 같다는 의미로 교제의 악수를 한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복음, 그 아들의 복음, 그리스도의 복음 등등으로 많지만은 그러나 복음은 하나인 것입니다. 그 별칭을 사용하는 전부를 읽어보면 그 별칭을 쓰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의 복음이 따로 있고 유대인의 복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복음을 진리라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복음의 진리가 무엇인가를 잘 알게 하는 구절이 요한복음 3장 16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 복음의 진리 전부가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습니다. 부활은 복음의 기초입니다. 로마서에 나오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도 복음의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요 3:16에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없습니다. 그래도 그것은 복음의 말씀입니다. 복음으로 영적으로 우리가 태어났습니다. 교회는 즉 모임은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워졌습니다. 복음을 떠나서는 교회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의 진리를 순종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세의 율법에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에 순종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복음을 앞으로 잘 배우시면 좋겠습니다.

(2009년 10월25일 부산명륜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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