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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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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

노시로 마코토

안녕하십니까? 처음으로 의왕모임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만 함께 말씀으로 교제해서 정말 좋습니다. 먼저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홍형제님이 이메일을 보냈을 때 제가 확인을 확실히 하지 못해서 금요일까지 한다고 약속을 했다가 그만 내일 제가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말씀은 우리들에게 우리들이 해야 할 것을 많이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많은 위로도 주고 있습니다. 구약성경 엘리야에 대해서 함께 생각을 해보고자 합니다. 열왕기상 16 30~34절입니다.

30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31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로 아내를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숭배하고 32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사당 속에 바알을 위하여 단을 쌓으며 33 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으니 저는 그 전의 모든 이스라엘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더라 34 그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저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문을 세울 때에 말째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방금 봉독한 데가 엘리야가 등장하는 배경입니다. 이 시대는 아주 좋지 않은 시대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뉘어진 이후에 북방 이스라엘에 아합이 등장해서 아합은 가장 나쁜 왕이 되었습니다. 30절에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아합 이후에 더 나쁜 왕이 일어납니다마는 여로보암 이후에 아합까지 아합이 가장 나쁜 왕이었습니다. 여로보암이 나라를 세운 후부터 북방 이스라엘은 금송아지를 섬기는 우상숭배가 있었습니다. 금송아지는 우상이었지만 금송아지의 상징은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것을 여로보암의 죄라고 일컫습니다. 아합은 이방여인을 취해서 바알이라고 하는 단을 만들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아합은 여로보암의 죄에다가 이방 우상을 섬기는 죄를 추가시켰습니다. 왕이 이와 같이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나라가 나빠졌습니다. 나빠진 것의 영향이 34절에 나와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리고를 재건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리고 성을 세울 때 아들을 잃는다고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시대의 상태가 나빠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더니 하나님께서 예언하신대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을 경험해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과 많이 닮아 있지 않습니까? 지금 현대에는 우상을 섬기는 것이 많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만 물질을 숭배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많이 멀어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가운데서 엘리야라는 선지다가 일어났습니다. 엘리야는 특별한 선지자였습니다. 여러분이 복음서에서 보는 것처럼 변화산에서 주님을 만난 사람은 모세와 엘리야였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고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했습니다. 또한 엘리야는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늘로 간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특별하게 하나님께 쓰임을 받은 선지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장 나쁜 때에 가장 좋은 선지자가 보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 할 때 오늘날 시대가 나쁘다 할지라도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무리 시대가 나쁘더라도 하나님은 그 뜻을 행하실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큰 위로이기도 하고 또한 격려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희망을 잃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할 수가 있습니다.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서 엘리야로 가겠습니다만 엘리야를 생각할 때 엘리야는 먼저 기도하는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기억하기 위해서 17 1절을 보겠습니다.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고하되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물론 엘리야는 하나님께 말씀을 받고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계시가 없으면 엘리야는 자기 마음대로 이렇게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엘리야의 말은 우로가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로를 차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시고 18 1절을 보겠습니다.

많은 날을 지내고 제 삼 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삼년이 지난 다음에 하나님의 뜻은 비를 내리는 것으로 되어졌습니다. 비를 멈추게 하는것도 비를 내리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마음속에 먼저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고 하니 18 41,42절에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비의 소리가 있나이다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엘리야가 갈멜 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42절 끝에 나오는 것처럼 엘리야는 땅에 꿇어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었습니다. 물론 엘리야는 기도했습니다만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이것은 엘리야가 하나님의 뜻을 기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여러분은 어떨지 모르지만 저는 때대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이 그 뜻을 행할 테니까 우리는 기도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뜻이라면 우리가 기도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정해졌지만 그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엘리야의 기도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후에 기록되어 잇는 것처럼 엘리야가 기도했더니 비가 내렸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기도를 해서 이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뜻이 분명한대도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를 하지 않으면 안됩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우리의 기도 내용을 알고 계신다고 신약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엘리야를 통해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기도를 통하여 이룬다는 것을 분명히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우리의 기도가 필요한 것은 우리에게 인내를 가르치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언제 실행되는지는 모를 수가 있습니다. 엘리야는 삼 년 내에 우로를 내린다고 하였기 때문에 그 때가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말씀 가운데서 많이 발견됩니다. 때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 그 때는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그 뜻을 따라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또한 생각할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어떻게 해서 인정할 수 있겠느냐? 한마디로는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분명히 말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생활가운데 관련되는 많은 것들 중에는 직접적으로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말씀을 근거로 해서 판단 즉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하지 않으면 안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기록된 것은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바울은 빌립보 간수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빌립보 간수는 바울에게 이 가족에 관한 것은 전혀 말하지 않았습니다. 간수가 선생들이여 우리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한 것은 간수 자신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간수가 구하지 않았지만 간수의 가족구원까지 말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식구들이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기사를 보면 간수가 구원받았기 때문에 가족이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가족들도 복음을 듣고 구원받아 침례를 받은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구원은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에 각자가 구주를 영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지만 가족 중의 한 사람이 구원을 받고 그 뒤로 가족들이 구원 받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가족이 언제 구원받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빌립보 간수의 가족들은 아주 복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가족이 구원받을 때까지 오랫동안 기다리지 않으면 안될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 사람이 주님께로 돌아가신 후에 가족들이 구원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내를 가지고 주님의 뜻을 위해서 기도를 한다면 복되지 않겠습니까? 나를 돌아보면 말씀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지마는 내 가 과연 말씀에 근거해서 기도하고 있는가 하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저 자신이 정말 믿음이 부족한 자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믿음이 약한 자라도 하나님께서 긍휼을 가지고 우리들을 다루어 주십니다. 우리가 완전한 자가 아니라도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고 기도하면 그 기도를 응답해 주신다고 믿습니다. 다음 기도의 가르침으로 가기 전에 조금 곁길로 갑니다만 17 1절에 엘리야는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말했습니다. 12절에는 과부는 당신의 하나님이라고 말했습니다. 18 10절에서는 오바댜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라고 말했습니다. 18 15절에서는 엘리야는 내가 모시는 만군의 여호와라고 말했습니다. 엘리야는 당신의 하나님, 엘리야는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했습니다. 엘리야처럼 나의 하나님,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라고 개인적으로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복된 사람일 것입니다. 만약 당신의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자신은 직접 관계되는 하나님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17 19~22절입니다.

19 엘리야가 저에게 그 아들을 달라 하여 그를 그 여인의 품에서 취하여 안고 자기의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가서 자기 침상에 누이고 20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로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 21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22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여기를 보면 또 하나의 기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야는 기도해서 이 아이를 살렸습니다. 21절에는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야는 몸을 엎드려서 낮아져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엘리야의 호소(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죽은 사람을 살려달라고 하는 기도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기록된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엘리야의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셨습니다. 강서 모임에서 말씀드렸습니다만 히스기야는 자기 생명 연장을 위해서 기도했는데 기도가 응답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구할 때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잘 생각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엘리야는 이 아이가 죽은 상태로 그대로 있다면 그 과부에게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의 필사적인 생각이 20절에 나타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로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 기도했습니다. 말씀에 나오지 않아 모르겠습니다마는 앞 뒤를 보면 엘리야는 이 아이가 왜 죽었는지를 모른다는 것으로 생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르밧 과부는 기름과 밀가루를 가지고 엘리야에게 떡을 만들어준 과부였습니다. 네가 우거하는이란 말속에 그 내용이 포함됩니다. 이 과부가 믿음을 가지고 엘리야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엘리야는 이 기근 시에 살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엘리야는 이 과부에게 대단한 신세를 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 그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아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좀 곁길로 가겠습니다만 엘리야가 세 번 엎드려 기도한 것하고 주님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살리실 때 딱 한마디로 살렸습니다. 달리다굼 했을 때 즉 소녀야 일어나라 했을 때 소녀는 즉시 일어났습니다. 나사로의 경우에는 군중 때문에 기도하셨습니다마는 실제로는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셨을 때 나사로가 바로 나왔습니다. 나인성의 과부 아들에게는 청년아 일어나라 했을 때 그 청년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엘리야처럼 세번 엎드려 기도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물론 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드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결과를 봐서 왜 이 아이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이 17 2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 이 과부는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고 했습니다. 이 과부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 가루와 마지막 기름을 가지고 엘리야에게 떡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가루와 기름을 가지고 먼저 나를 위하여 떡을 만들어 주면 그 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아니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과부는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이 과부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욱 더 하나님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이 과부에게 자녀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경험을 가지게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이러한 일이 왜 일어나는지 이해를 못할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때는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는지 알지 못하지만 그 일이 끝나고 지난 나중에 그 뜻을 아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들이 죽었을 때 과부는 아주 슬퍼하고 통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를 통해서 되살림을 받았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이라는 것을 더욱 더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동일한 것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그 소경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소경이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이러한 일로 왜 내게 이러한 일이 있는가를 생각하게 될 때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이 드러나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사실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이 두번째의 엘리야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우리도 생각을 모아서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루어 달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엘리야의 세번째 기도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고자 합니다. 18 36~39절입니다.

36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37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38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39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세번째 기도의 특징은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 달라고 하는 기도였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 달라고 하는 기도였습니다. 제 기도를 제가 돌아보면 나의 자신에 관한 것이라든가 조금 넓으면 가족에 관한 것 조금 더 넓으면 다이쿄쵸 모임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제가 시인합니다. 물론 자기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위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가장 복된 기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기도입니다. 37절에 보면 엘리야는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불로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워서 우상과 하나님이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고 불을 보내서 번제물을 모두 태웠습니다. 이때의 결과는 백성들이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는 외침이었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했을 때 그 결과로 말미암아 나 자신과 형제자매들이 하나님이야말로 주님이시다라는 외침이 나온다면 참으로 얼마나 복되겠습니까? 엘리야는 특별한 사람이니까 이런 기도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물론 그러한 점도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우리 기도로 말미암아 비를 멈추기도 하고 오게도 하는 죽은 아이를 살리기도 하고 또 불을 내리는 일은 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면에서 엘리야는 특별한 사람이기 때문에 엘리야의 일은 분명히 두드러졌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를 통해 나타난 기도의 원칙은 변함없이 오늘날에도 적용이 됩니다. 하나는 그 뜻을 알고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것, 또 하나는 자기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아놓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 세번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여 기도하는 것. 기도에 관한 가르침이 많이 있지만 엘리야를 통한 이러한 기도를 알고 행한다면 복이 되겠습니다.

시간이 갔습니다만 하나 더 보겠습니다. 엘리야가 두려워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19 3,4절입니다.

3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4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3절에 생명을 위하여 도망(두려워하여) 했다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아합왕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바알 선지자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18장처럼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오게 해서 번제물을 태우고 그리고 바알 선지자를 죽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큰 일을 한 바로 직후에 엘리야는 이세벨을 두려워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어떤 한가지를 가르쳐 준다고 생각합니다. 엘리야도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서 두려워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 찬송가에는 이런 찬송가가 있습니다. 엘리야도 우리 같은 사람이로다 이런 찬송가사가 있습니다. 찬송가의 의미는 엘리야가 약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엘리야가 사람인데 기도해서 응답 받았기 때문에 우리도 기도하면 응답 받는다는 격려의 찬송가입니다. 엘리야는 놀라운 분이었지만 하나님이 아니며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엘리야는 우리들과 다름이 없습니다. 찬송가와 같은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만 엘리야는 우리와 같은 연약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여기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놀라운 하나님의 일을 한 다음에 이와 같은 연약함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변함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큰 일을 하시고 나서도 이와 같이 연약해지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게 되면 인간의 경우는 큰 일을 한 다음에 연약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야가 이세벨로부터 위협을 받고 무엇을 느꼈는고 하니 10절에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엘리야는 여기서 나만 남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충성스럽게 섬기려고 생각하면 엘리야처럼 이와 같이 고독감을 느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만이 하나님을 충성스럽게 섬기려고 하고 있습니다라는 생각 말입니다. 형제 자매님들은 그 정도가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한국은 일본에 비해서 그리스도인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구원받았고 구원받은 사람들 중에 참으로 말씀대로 따르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중에 고독감을 느끼고 절망감에 휩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말했습니다. 열심이 특심하기 때문에 바알 선지자를 죽였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일했는데 결과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라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다만 나만 남았나이다. 이것이 엘리야가 하나님께 죽기를 구했던 큰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15~18절입니다.

15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로 말미암아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16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17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14절에서도 앞에 말씀처럼 엘리야는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나 혼자 남았는데 내 생명도 찾는다고 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세하게 대답해주셨습니다. 엘리야가 자기는 열심히 일했지마는 결과를 볼 수 없다고 호소를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대답을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일을 이을 사람을 예비해 두셨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국내에 미칠 뿐 아니라 국외에까지 미치는 준비를 하나님께서는 해 두셨습니다. 아람 왕이 누가 될지를 준비해 두셨습니다. 아합을 대신할 이스라엘 왕도 예비해 두셨습니다. 엘리야를 대신할 선지자를 준비해 두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사람들이 볼 때는 잘 안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장래 일을 각가지 준비해 두시고 엘리야의 일은 그 중에 하나라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 절망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내가 노력해서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 경륜 가운데서 우리를 사용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책임을 다 한다면 그 다음에는 다음 사람에게 넘길 수가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들의 생각을 넘어서 모든 것을 준비해 두십니다. 또 하나는 엘리야의 목숨을 노리는 자를 심판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1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하사엘, 예후, 엘리사가 우상 숭배하는 그 사람들을 심판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언제나 하나님께서는 올바른 심판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언제 일어날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정하고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일어납니다. 만약 우리 주변에 악이 만연한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경륜에 쓰임 받고 있다는 사실과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알 때 우리에게 격려가 되고 위로가 되는 것이 나이겠습니까?

또 한가지는 1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엘리야는 충성된 자가 자기 혼자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칠천명의 우상숭배하지 않은 자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적인 의미로 나 자신이 혼자뿐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충성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섬기는 분들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입니까?

마지막으로 엘리야가 하늘로 개선하는 장면을 보겠습니다. 열왕기하 2 11,12절입니다.

11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12 엘리사가 보고 소리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더니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엘리사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에 찢고

여기는 엘리야가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하늘로 간 기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 가운데 또 한 사람 에녹도 죽음을 경험하지 아니하고 하늘로 갔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창세기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엘리야도 하나님과 동행한 선지자라는 것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엘리야가 이런 모습으로 승천하는 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개선의 승천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아합과 이세벨에게 생명을 위협받으면서도 어쩌면 패배자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참된 의미로 말한다면 엘리야는 승리자였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들도 주님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엘리야나 에녹처럼 완전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어려울지 모르지만 엘리야와 에녹을 본받아서 이 땅에서 우리가 주님과 함께 동행을 한다면 주님으로 인한 승리를 하면서 주님 나라로 간다면 얼마나 복이 되겠습니까? 대단히 감사합니다.

2006 8 31 의왕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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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