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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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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치 속에 세워지는 존귀한 모임

노시로 마코토

안녕하십니까? 김포 방문한 것이 처음입니다만 일로 인해서 서울에 왔지만 함께 말씀으로 교제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만약 회사라면 이렇게 시간이 나지 않을 텐데 제가 대학에 있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나서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어 참으로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밤에는 일이 많았는데 윤형제님과 홍형제님의 도움을 받아서 아슬아슬하게 모임에 왔습니다. 길이 그다지 붐비지 않아서 시간 전에 도착하게 되어 잘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 4~7절입니다.

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6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7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씀에 있어 처음에는 인사를 기록했습니다. 그것이 3절까지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인사에 이어서 감사한다고 말했습니다. 아시는대로 고린도전서에는 고린도에 있는 여러 문제 때문에 기록한 서신입           니다. 그 문제를 읽어보면 인간적으로는 감사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바울은 감사할 것을 찾아내어서 하나님 앞에 감사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한 교훈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여러 어려움 가운데서 감사가 없는 것 같아 보이는 경우일지라도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을 향한다면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감사할 수 있는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무엇을 감사했겠습니까? 은사가 충족하므로 바울은 감사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5절에 보면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이라고 말했습니다. 구변, 지식, 은사는 고린도 사람들의 특징이었습니다. 후반에도 보면 구변이라든가 지식이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나중에 보면 바울은 몇 장을 통해 은사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구변과 지식과 은사는 어떤 면에서는 고린도 모임의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구변과 지식과 은사가 어디서부터 왔는고 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감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감사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취해야 할 태도가 아니겠습니까? 바울은 감사할 때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본말 가운데 말을 꾸미는 말이 있는데 마음에 없으면서도 말을 하기 위해 지어서 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별로 근거가 없는데도 말을 만들어가지고 사람들을 칭찬하는 말들을 하거나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감사한 것은 고린도 모임에 대하여 진심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데살로니가서를 보게 되면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사랑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고린도 성도들에 대해서는 사랑에 대해서는 감사할 수 없었다는 말도 됩니다. 고린도 사람들에게는 사랑에 대해서 결여가 있었습니다. 그 바울이 든 것 중에 하나가 고린도의 문제였습니다. 10~1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11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12 이는 다름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고린도 모임에는 일치에 관해서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여기에 보면 분쟁이라는 말이 나와 있습니다. 11절에는 다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상태로는 사랑이 넘치는 상태라고 할 수 없습니다. 모임의 일치가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문제를 들어 말할 때 가장 중요한 일치 즉 분쟁의 문제를 먼저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바울에게, 아볼로에게, 게바에게 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사람에 속한 자라는 것을 바울이 나중에 설명합니다. 나중에 말씀드리겠지만 육신에 속한 자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말씀드리면 되지만 그러나 바울에게, 아볼로에게, 게바에게라고 말하는 이 원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바울은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추측이 될 수밖에 없겠습니다만 오늘날에 맞추어보면 이러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자기하고 맞는 사람을 지지하고 싶은 것입니다. 또한 자기 사고방식하고 같은 사람을 지지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라고 하는 말에 맞추어서 생각해보면 아마 이 사람은 오늘날에 적용시켜 말한다면 그리스도께 속한다고(말씀을 근거로 한다고) 하면서 자기 생각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아마 그리스도께 속한다고 하는 이 사람은 아볼로나 게바나 바울도 이 사람의 생각에는 맞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자기의 독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그리스도의 이름을 이용해서 주장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참된 의미로서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께 속한 자입니다. 그러나 고린도서에 나오는 그리스도께 속한다고 하는 이 사람은 참된 의미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순종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람의 수준으로 낮추어가지고 아볼로나 게바나 바울과 같은 동렬로 놓았습니다. 이런 문제는 오래 되었으면서도 새로운 문제입니다. 육에 의한 원인이기 때문에 바울을 서신을 쓸 때나 지금이나 그 육의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말씀은 교훈으로 이와 같은 분쟁이 있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인간은 연약하기 때문에 같은 일이 오늘날에도 반복될 수 있습니다. 한국형제님들의 성을 제가 잘 모르지만 제가 아는대로 말해보면 예를 드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나는 홍형제에게 속했다든지, 원형제에게 속했다든지, 양형제에게 속했다든지 하는 것이 오늘날에도 일어날 수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물론 바라지만 인간은 연약하기 때문에 기록된 것처럼 이러한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1장 후반과 2장을 통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만 전한다고, 십자가만 전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인간의 지혜로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앞에 있는 다른 일이 벌어질지라도 돌아갈 곳은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 하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된 의미로 주님을 따른다면 인간에게 속한다는 것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한번 발생해버리면 좀처럼 고치기가 어렵습니다. 인간은 감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번 발생해버리면 원래대로 되돌리기가 좀처럼 어렵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일어나기 전에 말씀을 통해서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말씀드린대로 바울은 1장 후반과 2장 전체를 통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3장에 가면 다시 한번 분열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3 3~7절입니다.

3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4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5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3장에는 본질적인 원인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육신에 속했기 때문에 시기와 분쟁이 있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사람을 세가지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 하나님을 믿지마는 아직 육신에 속해 있는 자, 육신에 속한 자는 구원받은 사람이지만 육은 아직도 성결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세번째는 구원받고 신령한 자로서 성령에 충만되어 있는 자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운데 주어진 성령이 충분히 역사하도록 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육신에 속한 자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신령한 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령은 모든 믿는 사람이 이미 받은 것입니다. 성경은 성령 충만을 받으라 성령을 근심케 말라 성령을 따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소멸치 않고 성령을 근심케 하지 아니하고 성령 충만을 받게 되면 그 사람은 신령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에 속해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보겠습니까?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보는 것입니다. 특히 은사 있는 형제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3장에 있는 것처럼 바울을 보고 아볼로를 봤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은사를 본다든지 그 은사를 사용하는 사람을 보게 된다면 그 은사를 주신 분과 그 은사를 쓰시는 분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6절에 있는 것처럼 바울이나 아볼로나 하나님이 부리는 사역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7절에 보게 되면 부리는 하나님이 중요하지 부림을 받는 사람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은사를 사용하는 사람을 보지 않고 그 은사를 주시는 주님을 보게 되면 복되지 않겠습니까? 주님을 우러러 보는 것 외에는 일치를 유지하는 방법이 없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그것을 쓰시는 하나님이 놀라운 분이지 사람은 놀라운 존재가 아닙니다. 이것이 분쟁과 분열을 해결하는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첫번째 원칙입니다. 동시에 고린도전서가 말하는 또 한가지를 보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11 18,19절입니다.

첫째는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대강 믿노니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바울은 18절에서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대강 믿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9절에는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편당이 있는 것은 어절 수 없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장과 3장에서 바울은 일치하도록 그렇게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11 19절에 와서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한다라는 것은 모순이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말씀에는 모순이 없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일치에 대한 원칙에서 예외입니다. 19절에 보면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기 위해서 라는 의미입니다.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은 믿지 않는 자와 믿는 자들을 구분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라는 말은 구원받고 나서 진리를 순종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말입니다. 진리를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하고 진리를 순종하지 않으려는 사람하고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여기서 말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이 순종하지 않으려는 사람하고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에 편당이 있어야 한다고 바울은 예외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앞에 말한 것에 대한 예외적인 것이지 이것만을 주장할 때에는 대단히 주의를 요합니다. 내가 정말로 순종하고자 하는지 아닌지를 잘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때때로 경험하는 바이지마는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이 자기의 생각 자기의 주장인 것이 때때로 있습니다. 자기를 주장하고 싶다. 자기의 주장을 관철시키고 싶다라는 것이 없는지를 철저하게 생각을 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내가 정말 진리를 순종하고자 하는지 아닌지를 음미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위치는 우리가 만들어 내는 통일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4 3절에 보면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만든 일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타협하고 서로간의 말을 맞추어서 하나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 즉 하나님이 주신 하나되게 하신 것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순종하는 것에 참된 일치가 있는 법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고 말씀을 음미하고 기도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일치를 깨달을 수 있고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가 서로간에 일치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하나 생각해야 될 것은 하나님의 성품은 사랑이기 때문에 진리를 순종하더라도 사랑을 가지고 순종해야 될 것입니다. 균형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물론 말하는 것이 말씀에 맞지마는 균형도 생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균형이 맞지 않는 경우에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형제 자매들에 대한 사랑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균형이 잡히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말씀에서 말하는 진리는 타협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사랑을 가지고 행해야 합니다. 진리를 말하면서 사랑을 가지고 인내하면 일치를 유지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말씀을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일치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물론 어떤 경우 절대로 굽혀서는 안될 경우에는 사랑을 우선시 해서 안될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한마디로 말하면 어떻게 말할 수 있는고 하니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는가라는 율법사에 대한 주님의 대답이 율법에서 뭐라고 가르치느냐고 주님께서 되물어셨습니다. 율법사가 구약을 정리해서 말하기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전력을 다해서 주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그 하나였습니다. 두번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대답이 옳았기 때문에 그것을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구약은 전력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 몇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번째 온다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앞에 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말씀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처럼 형식적으로 말씀을 지키는 것이 우리들의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동시에 최선을 다해서 일치를 유지한다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형제자매들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 즉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형제자매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없습니다. 요한 서신서에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겠느냐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고 다음에 형제자매들을 사랑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지키고 순종할 때에 형제자매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자기주장을 위해서 말씀을 지키는 것도 아니고 내가 옳다고 하기 위해서 말씀을 지키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고 형제자매들을 사랑하게 되면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지킬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고린도전서에서 가르치고 있는 분쟁에 대한 것입니다.

3 9~15절입니다.

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9절에서 15절 사이에 지역교회가 세 개의 말을 가지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16절까지 보게 되면 세 가지로 지역교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밭이 있고 하나님의 집 즉 건물이 있고 16절에 하나님의 성전이 지역교회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밭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마는 밭이라고 하는 말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앞에 나와 있는 심었고, 물 주었으되, 자라나게 하셨나니 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밭에 심고 물을 주고 그리고 하나님이 자라나게 하십니다. 이것을 오늘날에 적용을 시킨다면 심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을 준다는 것은 말씀을 가르침 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하는 것은 심고 물주는 일 뿐이고 자라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밭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중점이 놓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말인 하나님의 집 즉 건물이라는 말 속에는 사람의 책임이 강조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0,11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 집과 건물의 토대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다른 것을 터로 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각, 은사 있는 어떤 형제님의 생각 위에 지역교회가 세워져서는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위에 지역교회가 세워져야 합니다.

조금 벗어납니다만 이 고린도 지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 터였습니다. 그러나 에베소서 2장에 보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는 모퉁이 돌이고 선지자와 사도가 터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만 들어서 보면 서로 모순되게 보입니다. 고린도전서는 터가 그리스도라고 했고 에베소서 2장에서는 사도들과 선지자가 터라고 했기 때문에 모순이 생긴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드린대로 말씀에는 모순이 없습니다. 좀더 터를 자세히 보면 에베소서에 나오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터라고 말하든 모퉁이 돌이라고 말하든 가장 밑에 있는 근본은 예수 그리스도이심이 틀림없습니다. 에베소서를 보게 되면 거기는 건물을 세우는 도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맨 먼저 모임을 세우기 위해서 복음을 전한 사람들은 사도들이었습니다. 말씀을 세우는데 쓰임을 받은 사람들이 사도들과 선지자들이었습니다.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는 선지자의 은사가 잠시 쓰였습니다. 초대 모임에서는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직접 말씀을 주신 듯 합니다. 성경이 완성된 오늘날에는 선지자 은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이 성경말씀 속에 전부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초대 모임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사도와 선지자라는 터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모임을 세웠지만 오늘날 우리들 책임은 어디 있겠습니까? 터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 변함이 없습니다. 그 위에 어떻게 세우기를 조심하라고 10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집은 사람의 책임을 강조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2절에 보게 되면 이 터 위에 세우는데 금은 보석. 나무, , 짚인데 나중에 분명히 드러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금은 보석. 나무, , 짚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에 기록된 것이 아니고 저의 의견입니다마는 성경에서 구체적이 아니고 비유로서 말을 할 때는 목적이 있고 의도가 있어서 그렇게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금은 보석. 나무, , 짚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느 하나에 한정되어서 말하지 않도록 성령이 의도적으로 6개 용어를 쓰도록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금은 보석. 나무, , 짚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여러 생각들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한 가지는 금은 보석. 나무, , 짚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모임에서 주님을 섬기는 동기 그리고 재료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것은 저의 생각이고 또 다른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미리 말씀을 드립니다. 동기라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드린다면 나 자신을 생각해보면 나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다고 봅니다만 나를 나타내고 싶어서 모임을 섬기는 일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주장을 내세우고 싶은 것이 말씀에 섞여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 경우는 나무 풀 짚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동기 말고 방법이라는 측면에서 생각을 해보면 성경에 합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말씀을 전한다면 그것도 역시 나무, 풀 짚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방법을 취하게 되면 사람들은 모일 것입니다. 형제자매들의 숫자를 자랑으로 여기게 된다면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이 모이는 방법을 취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하나님을 제일로 여기는 것이 아니고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위에 놓은 결과가 될 것입니다. 이것도 나무 풀 짚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는 금은 보석으로 모임을 세운다면 복되겠습니다.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섬긴다면 그것이 바로 금은 보석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나무 풀 짚으로 이 터를 세우게 되면 공력이 나타날 때 이 터는 타버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날이 언제인가 하면 고린도전서 5장에 나와 있는 그리스도의 심판대라고 일컫는 그 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는 우리들의 죄가 심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상급이 평가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모임에서 나무, , 짚으로 섬기게 되면 상급을 잃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아무리 많은 형제자매들이 모였다 할지라도, 제가 아무리 형제자매들에게 존경을 받는다 할지라도 만약 나의 동기가 나무, , 풀이라면 하나님 앞에서의 보은, 즉 상급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에 마음이 붙잡히는 법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머지않아 없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에 나와 있는대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존귀한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소중히 여긴다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보응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게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상급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교훈을 받을 것은 모임을 세우는데 누가 세우는지를 한정하지 않았습니다. 장로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형제들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형제자매들에게 지역모임을 세우는 책임이 있습니다. 자매들에게는 자매들의 일이 있습니다. 자매들의 봉사로 말미암아 모임을 세우는데 동참을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모임을 방문하는 분들에게 자매들은 개인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선배 자매들은 후배 자매들을 가르치고 인도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을 말씀을 따라야 하며 다 존귀한 것들입니다. 은사를 따라서 모임을 세우는데 모든 성도들이 책임이 있다는 것을 여기서 배울 수 있습니다. 교훈을 받는 또 한 가지는 세웠던 이 건물이 불타더라도 세운 사람들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주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교훈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상실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자기 중심적으로 일했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구원을 잃어버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상급을 잃는다는 것은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나는 상급을 바라고 일하지 않는다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을 바라고 일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고 일한다면 사람이 칭찬해주는 것이나 사람이 인정해 주는 것은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 것이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상급을 가볍게 여긴다면 사람을 중요하게 여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16,17절입니다.

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여기서 하나님의 성전은 모임을 말하는데 다른 곳의 성전은 성도들의 몸을 말하는데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믿는 자 한 사람 한 사람 속에 내주해 계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가르치는 것처럼 모임 안에도 성령이 계시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으로 성령이 그 안에 계시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이 모임은 거룩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임이 거룩하고 존귀하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멸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엄숙한 말씀이 아닙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모임을 존귀하게 여겨서 만약에라도 분열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멸하거나 더럽혀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모임을 존귀하게 여기면서 그 동기와 방법을 하나님 말씀대로 사용해서 모임을 세우는데 동역한다면 얼마나 복되겠습니까? 대단히 고맙습니다.

2006 8 29 김포모임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