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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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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회복과 그 후의 실패

노시로마코토

안녕하십니까? 바쁘신 가운데 말씀을 듣기 위해 모여 주신데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어제에 이어서 히스기야에 대해서 인도하심을 받고자 합니다.

역대하 31 1절입니다.

이 모든 일이 마치매 거기 있는 이스라엘 무리가 나가서 유다 여러 성읍에 이르러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유다와 베냐민과 에브라임과 므낫세 온 땅에서 산당과 단을 제하여 멸하고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 각각 그 본성 기업으로 돌아갔더라

히스기야는 믿음의 회복을 하게 할 때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을 먼저 성결케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전을 성결케 하는 일로부터 시작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속죄제를 드리고, 번제를 드리고, 감사제를 드리고 그 후에 유월절을 지키는 유월절 제사를 드렸습니다. 31 1절에 보면 이 모든 일을 마치매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이라고 하는 것은 조금 전에 말씀드린 일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엇을 했겠습니까? 그 성읍에 있는 주상을 깨트리고. 목상을 깨트리고, 산당을 제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성전이 아니고 나라 안에 있는 우상들을 없앤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신약에서 영적으로 어디에 맞추면 되겠습니까? 여러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디에 맞추어야 되는지 하는 근거를 찾기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저의 의견입니다. 어제 말씀드린대로 하나님의 전은 지역모임에 해당시키고 그리고 제사장과 레위사람들은 성도들에게 적용을 시켰습니다. 어제 말씀드린 그 이외에 신약에서 거룩하게 할 곳이 어딘가를 생각해보면 가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 개인과 모임 외에 성별해야 할 곳이 있다면 그것은 가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자기 가정을 갖지 않은 형제자매들이 있을 줄 압니다. 젊어서 부모님과 함께 사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 경우는 자기의 가정이 아니기 때문에 가정을 성결케 할 책임은 본인에게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님을 떠나서 혼자서 가정을 가진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가정에다가 적용을 시키는 것이 가장 적절할지 어떨지를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가정이라고 하면 형제 자매님이 있고 자녀가 있다고 일단 생각을 하겠습니다. 만약 그 가정에 부부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가정에서 주님이 높여지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부부가 주님을 제일로 여겨서 높인다면 그 가정은 축복되리라 여겨집니다. 남편과 아내가 주님을 제일로 여기는 것을 여러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번째는 실제적인 일로서 부부가 함께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이라 봅니다. 남편도 일로 바쁘고 부인도 자녀양육에 바쁠 수 있습니다. 함께 기도한다는 것은 시간이 서로 맞지 않아서 좀처럼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일본에서는 바쁘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집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서 성경을 읽고 기도한다면 가정이 말씀대로 세워지고 그 모임이 보호를 받게 될 것입니다. 만약에 자녀가 있다면 가능하면 그 자녀가 함께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데 동참하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어릴 때는 글을 읽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부모가 성경 읽는 목소리를 듣는 것만 해도 교육에 상당한 영향을 주게 될 것입니다. 물론 교육이라는 것은 그 자녀가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한 교육을 말하는 것입니다. 저의 경험에 의하면 어린아이가 잘 모르리라 생각하지만 어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이해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어려운 것은 모를 것이고 아는 것이 얼마 안될 것입니다. 그래서 가능한 빨리 말씀하고 접촉하는 것을 제공해 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글을 읽을 수 있다면 함께 동참하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해서 그 가정이 성결케 된다면 그 가정의 세워짐과 모임도 큰 유익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어서 4,5절입니다.

또 예루살렘에 거한 백성을 명하여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의 응식을 주어 저희로 여호와의 율법을 힘쓰게 하라 한지라 왕의 명령이 내리자 곧 이스라엘 자손이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꿀과 밭의 모든 소산의 처음 것을 풍성히 드렸고 또 모든 것의 십일조를 많이 가져왔으며

여기에는 히스기야 왕이 명령을 내린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명령의 결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 많은 것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왕의 명령을 생각할 때 오늘날 모임을 생각한다면 모임에 인도하는 분들이 인도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적인 인도자가 적절하게 인도하므로 복된 모임이 세워진다는 것과 관련되지 않겠습니까? 모임은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오늘날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민주주의가 가장 좋은 정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평등하게 한 사람에 한 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을 보면 모임이 그런 의미에서 구성원들이 동등하게 표를 가지고 있다는 개념은 없습니다. 신약의 말씀을 따르면 모임에는 장로들이 세워져서 그 지역에 모이는 사람들은 장로들에 순종하도록 그렇게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모임에는 성령이 세운 장로들을 통해서 장로들의 인도를 따라서 모임이 세워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장로들도 인간이기 때문에 실패할 수가 있으며 판단을 잘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근거해서 인도하는 장로들은 우리가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기에 보면 히스기야의 명령을 따랐기 때문에 복된 결과가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볼 때 오늘날에도 장로들의 인도하심에 따라 순종하게 되면 영적인 축복과 동시에 영적으로 풍성해진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겠습니다.

앞으로 나아가서 21절입니다. 무릇 그 행하는 모든 일 곧 하나님의 전에 수종드는 일에나 율법에나 계명에나 그 하나님을 구하고 일심으로 행하여 형통하였더라

중간에 뛰어 넘었습니다만 히스기야 왕의 믿음의 회복의 정리가 21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 모든 일에 하나님을 구했다고 말씀합니다. 일심으로 행해서 목적을 이루었다라는 의미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구한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여기서 가르침 받습니다. 히스기야 왕의 인간적인 능력으로 이 믿음의 회복이 일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4,5절에 있는 것처럼 히스기야 왕은 적절한 인도를 했습니다. 그 인도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었기 때문에 복된 결과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목적을 이룰 수가 있었습니다. 21절에 보게 되면 복된 생각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우리도 개인이나 모임이나 하나님을 구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목적을 이루면 얼마나 복되겠습니까? 여기까지가 히스기야의 회복에 축복된 부분입니다. 믿음의 회복이 있은 그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가 그 다음의 문제입니다.

32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모든 충성된 일 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에 들어와서 견고한 성읍들을 향하여 진을 치고 쳐서 취하고자 한지라

32 1절에 이 모든 충성된 일 후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역대하 기록자는 성령에 의해서 기록했습니다만 31장 마지막 절과 32 1절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역대하만 읽고 있으면 31 21절과 32 1절 사이가 별로 시간이 지난 것 같지 않게 느껴집니다. 역대하를 보면 이 두 사이는 적어도 10년 이상의 기간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1장의 일이 언제 일어났는지 단정을 할 수 없지만 31 7절을 일어보게 되면 삼월에 쌓기를 시작하여 칠월에 마친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29장부터 계속 읽어보면 이 삼월이라는 것은 히스기야가 즉위한 원년 3월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 이년에 유월절을 지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7절에 나타난 3월은 이 관계를 생각하면 같은 해 3월과 7월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원년 3월이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단정을 못하지만 그렇지만 29장부터의 문맥을 보면 3월과 7월 원년 3월과 7월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1 8절부터의 사건도 어느 정도의 시간이 경과했는지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읽어보면 10년이 걸린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31 21절은 원년부터 시작해서 약 3년 이내 정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32장에 산헤립이 침공한 것은 열왕기하를 보면 히스기야가 즉위한지 14년째 된 해에 침공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열왕기하 18 13절에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래서 31 21절과 32 1절 사이는 적어도 10년 이상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적으로는 10년의 격차가 있지마는 역대하 저자는 31 21절과 32 1절을 이 모든 충성된 일 후에라고 연결을 시켰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한가지 배우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 시작되면 반드시 사탄의 일도 시작한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사탄의 공격이 언제 있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적어도 십 수년간은 축복된 생활이 지속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의 믿음의 회복이 있은 후에 사탄은 언제 공격해야 될지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복된 십여년간 동안에 사람들의 마음 속에 변화가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히스기야에게는 그것이 무엇인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만 히스기야 왕은 교만이었습니다. 나중에 읽겠습니다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시험(테스트)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가 주님의 뜻을 행하게 되면 사탄은 공격할 기회를 엿본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연약하기 때문에 축복된 기간 중에라도 연약한 부분이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들의 믿음을 시험하십니다. 욥기에서 아는 것처럼 사탄이 공격을 해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으면 발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 먼저 산헤립이라는 사람을 세웠습니다. 이때는 히스기야 왕과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산헤립을 이겼습니다.

32 20,21절을 봐주시기 바랍니다.

이러므로 히스기야 왕이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로 더불어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어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한 천사를 보내어 앗수르 왕의 영에서 모든 큰 용사와 대장과 장관들을 멸하신지라 앗수르 왕이 얼굴이 뜨뜻하여 그 고국으로 돌아갔더니 그 신의 전에 들어갔을 때에 그 몸에서 난 자들이 거기서 칼로 죽였더라

여기서 승리는 완전히 하나님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인간이 싸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한 천사를 보내서 산헤립을 쳤습니다. 주님을 의지한 결과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히스기야와 백성들은 최초의 시련에서는 승리를 했습니다. 저도 경험을 합니다만 한가지 승리를 했다고 해서 그 다음을 승리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물론 그 시련의 성질이 변한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시련이 올 때 하나님만을 의지하지 않으면 이어지는 시련을 이긴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24,25절을 보면 이번에는 어떤 시련인고 하니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된 고로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고 또 이적으로 보이셨으나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지 아니하므로 진노가 저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게 되었더니

이제 히스기야가 병이 들었습니다. 히스기야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병들어서 낫지않고 죽을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히스기야는 필사적으로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왜 히스기야가 자기 생명을 필사적으로 구했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어떤 형제에 따르면 히스기야는 그때까지 아직 자녀가 없기 때문이 아닌가라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히스기야의 나이와 그 아들 므낫세의 나이를 계산해보면 그렇다라는 말을 제가 들은 적이 잇습니다. 엄숙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이 뜻을 변경시켜서 기도를 들어주셨지마는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히스기야에게나 백성에게나 히스기야의 병이 나은 것이 축복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어서 보겠지마는 히스기야는 병이 나았지마는 실패를 하게 됩니다.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는 유다의 왕 중에 가장 나쁜 한 왕이 됩니다. 만약 그 형제님의 말씀이 옳다면 히스기야가 죽고 므낫세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히스기야의 수명이 연장되었기 때문에 므낫세가 태어났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수명이 연장되었기 대문에 므낫세가 태어났다고 단정은 못합니다마는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바꾸면서 기도를 응답해달라고 할 때는 상당한 주의를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데 계속 기도하면 하나님은 그것을 때로는 들어 주실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시편에 보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기를 구했는데 그것을 들어 주셨을지라도 그 사람들의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너는 죽고 살지 못하리라는 말씀을 분명히 들었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에게는 힘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축복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볼 때는 기쁜 것 같아 보이지 않지만 그것을 받아들이신 분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무시무시한 잔을 아버지의 뜻이라면 하고 그것을 그대로 받으셨습니다. 만약 주님이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으셨다면 우리들의 구속을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받기 힘든 것을 받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우리도 주님의 이 본을 다를 수 있다면 복되지 않겠습니까? 히스기야는 이것을 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를 낫게 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표적을 주셨습니다. 열왕기와 이사야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만 일영표가 10도 뒤로 물러갔다는 기록입니다. 일영표가 변해서 히스기야가 낫기는 했지마는 25절에 보면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라고 했습니다. 은혜를 입고 받았다면 우리는 감사를 마땅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은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오히려 교만해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곳을 통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여기서 실패했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훌륭한 믿음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실패할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믿음의 회복이 주어진다는 것은 복된 일입니다. 그 상태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낮아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된 것을 뽐내어서는 안됩니다. 만약 우리가 히스기야와 같은 마음의 교만이 들어있다면 시련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지는 시련이 어떤 것일지 미리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마음을 낮추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 그 시련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스기야를 통해서 배운바 대로 계속 마음을 낮추어서 교만해지지 않고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 있다면 얼마나 복되겠습니까? 믿음의 회복이 있고 실패가 있다는 것이 히스기야만의 특징이 아니라는 것을 보겠습니다.

히스기야 이후에 일어났던 요시야라는 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35 19~24절입니다.

19 요시야의 위에 있은 지 십팔 년에 이 유월절을 지켰더라 20 이 모든 일 후 곧 요시야가 전을 정돈하기를 마친 후에 애굽 왕 느고가 유브라데 강 가의 갈그미스를 치러 올라온 고로 요시야가 나가서 방비하였더니 21 느고가 요시야에게 사자를 보내어 가로되 유다 왕이여 내가 그대와 무슨 관계가 있느뇨 내가 오늘날 그대를 치려는 것이 아니요 나로 더불어 싸우는 족속을 치려는 것이라 하나님이 나를 명하사 속히 하라 하셨은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그대는 하나님을 거스리지 말라 그대를 멸하실까 하노라 하나 22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떠나기를 싫어하고 변장하고 싸우고자 하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므깃도 골짜기에 이르러 싸울 때에 23 활쏘는 자가 요시야 왕을 쏜지라 왕이 그 신복에게 이르되 내가 중상하였으니 나를 도와 나가게 하라 24 그 신복이 저를 병거에서 내리게 하고 저의 버금 병거에 태워 예루살렘에 이른 후에 저가 죽으니 그 열조의 묘실에 장사하니라 온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요시야를 슬퍼하고

이 요시야 왕의 경우도 히스기야처럼 19절과 20절 사이에 시간적인 큰 간격이 있습니다. 19절에는 요시야 왕 즉위 18년 된 해였습니다. 그 이후에 요시야 왕이 죽습니다만 요시야 왕은 치세 년한이 31년이었습니다. 31년이라는 것은 역대하 34 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19절과 20절 사이는 약 13년 정도 간격이 있습니다. 여기서도 히스기야처럼 20절에 이 모든 일 후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도 역대하 저자는 요시야 왕이 믿음이 회복된 것과 그리고 20절 이후의 사건을 연결시켜 놓았습니다. 이 경우도 요시야도 실패했습니다. 아마 이 즈음에 요시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어려웠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방인의 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낸 것을 볼 때 알 수 있습니다. 22절을 보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느고가 요시야에게 나와 싸우지 말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보통 같으면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서 요시야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정상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 경우에는 이유는 분명히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이방인의 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교훈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인 이외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침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정말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가 대단히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무언가 이유가 있어 말씀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있다면 그 뜻을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시야의 경우는 왜 느보의 말을 거절했는지 분명히 기록되어있지 않습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요시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했고 믿음이 회복된 것 때문에 마음이 교만해져 있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은 자기 생각을 주장한 때부터는 위험해지는 것입니다. 모임 내에서 다른 성도들의 소리를 듣지 않게 된 그 시기는 위험하다는 사실을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의 주장을 주장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겠다고 하는 생각을 계속 가지고 있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요시야도 히스기야와 상항은 달랐지만 하나님의 시험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애굽왕 느보를 하나님이 쓰신 것은 요시야 왕을 시험하기 위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나 속에 자기 주장을 하는 생각이 있다면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를 시험하실 것입니다. 만약 우리 모임에 오랫동안 복된 상태가 지속되었다 할지라도 항상 내 생각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 아닌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간이 거의 갔습니다만 한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내 생각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말씀 이외에는 없습니다. 요시야 시대에 율법서가 발견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율법서를 읽고 요시야와 그 시대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 왕 시대에는 말씀을 읽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말씀을 통해 조금 확인하고자 합니다만 30 5절에 드디어 명을 발하여 브엘세바에서부터 단까지 온 이스라엘에 반포하여 일제히 예루살렘으로 와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라 하니 이는 기록한 규례대로 오랫동안 지키지 못하였음이더라 후반에 기록한 규례대로라고 기록되어 잇는데 이것은 기록한 규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18절에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잇사갈과 스불론의 많은 무리는 자기를 깨끗케 하지 아니하고 유월절 양을 먹어 기록한 규례에 어긴지라 히스기야가 위하여 기도하여 가로되 선하신 여호와여 사하옵소서 중반에 기록한 규례에 어긴지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록한 규례가 있었고 그 규례를 어겼다는 것을 판별할 수 있습니다. 기록된 율법서가 없다면 이런 기록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31 3절에 또 자기 재산 중에서 얼마를 정하여 여호와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번제 곧 조석 번제와 안식일과 초하루와 절기의 번제에 쓰게 하고 여기서도 여호와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 시대에는 적어도 율법책의 일부가 있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므낫세왕 55년 그 위에 아몬 2년 해서 57년 동안에는 율법서가 어디 있는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얼마나 말씀을 잃어버리기 쉬운가를 나타내는 교훈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말씀을 추구하지 않으면 말씀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히스기야 시대에는 율법서의 숫자가 매우 적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인쇄된 성경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요시야 시대처럼 말씀이 물리적으로 없어진다는 것은 현 시대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물리적으로는 성경이 있다 할지라도 성경을 읽지 않는다든지 읽어도 올바르게 읽지 못한다는 것이 늘 상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추구한다는 생각이고 그것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읽고 그 뜻을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34 29~33절을 보겠습니다.

29 왕이 보내어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장로를 불러 모으고 30 이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매 유다 모든 사람과 예루살렘 거민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모든 백성이 무론 노소하고 다 함께한지라 왕이 여호와의 전 안에서 발견한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리고 31 왕이 자기 처소에 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이루리라 하고 32 예루살렘과 베냐민에 있는 자들로 다 이에 참가하게 하매 예루살렘 거민이 하나님 곧 그 열조의 하나님의 언약을 좇으니라 33 이와 같이 요시야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모든 땅에서 가증한 것을 다 제하여 버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으로 그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게 하였으므로 요시야가 사는 날에 백성이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 복종하고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31절을 보게 되면 왕이 자기 처소에 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이루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우선 말씀인 성경을 읽었습니다. 또한 31절에 있는 것처럼 말씀을 이루리라고 뜻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먼저 말씀을 읽고 순종하겠다고 뜻을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유다 사람들은 31절에 있는 이루리라는 것처럼 뜻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32절에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언약을 좇으니라 와 같이 행했습니다. 우리들도 동일하게 말씀대로 행하려고 뜻을 세울 뿐만 아니라 실제로 행하여야 되지 않겠습니까? 33절 마지막에 보게 되면 여호와께 복종하고 떠나지 아니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시 언제 여러분들과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주님의 뜻이라면 다시 만날 때까지 피차간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행하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2006 8 28 강서모임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