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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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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교회의 문제들과 일치됨

노시로 키요지

안녕하십니까? 말씀집회에 초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고린도전서를 통해서 몇가지를 인도 받고자 합니다.

고린도전서 1 2절입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고린도전서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아시는 대로 교회는 몸된 교회와 지역교회가 있습니다. 몸된 교회에 편지를 써 보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몸된 교회는 영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했습니다. 지역에 있는 지역교회를 어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 어떤 교회는 주님의 교회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지역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사실 고린도교회는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고린도전서가 되어 있습니다. 한가지가 말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15장으로서 그 당시에 부활에 관하여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15장에서 복음과 부활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가 가르침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방금 읽은 구절을 보면 주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라는 것을 알지 못하면 안됩니다. 주님은 우리들의 주님인 동시에 모든 사람들의 주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제자들은 선생과 주라고 말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말할 때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했는데 주님은 이것을 거꾸로 순서를 바꿨습니다.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주를 주님이 먼저 내세웠습니다. 이 관계를 주님은 분명하게 가르쳤습니다.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한 사람들입니다. 생활도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서 생활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문제를 교정하거나 가르칠 때도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제시한 다음에 문제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 이후에는 4~9절까지 고린도교회의 좋은 점을 바울이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바울이 칭찬했습니다. 모든 구변 모든 지식이 풍족하다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증거가 견고하게 되었다고, 그리고 모든 은사에 부족한 것이 없다고 칭찬했습니다. 바울은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소개한 다음에 고린도 성도들의 좋은 점을 열거한 다음에 문제점으로 들어갔습니다. 우리들도 문제를 고칠 때에 처음부터 문제의 비판으로 들어가게 되면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먼저 고린도의 믿는 자들을 칭찬했습니다.

그러면 고린도에는 어떤 문제가 있었겠습니까? 가장 나쁜 것의 하나인 고린도교회 내에 분열이 있었습니다. 또한 음행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금전적인 문제로 어떤 성도를 법정에 고소했습니다. 또한 우상 제물을 먹어도 되는지 안 되는지 하는 문제도 있었습니다. 또한 모임으로 모일 때에 그 가운데 혼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은사 문제인데 방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은사를 마치 장난감처럼 자기 마음대로 사용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사를 자기를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말씀을 전할 시간이 없어졌습니다. 또한 만찬 자리가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위화감이 형성되었습니다. 더 문제가 있습니다만 이와 같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문제가 있으면 영적인 힘은 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문제를 어떻게 해서든 해결하고자 고린도전서를 기록한 것입니다. 목적은 그리스도인들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기쁨으로 예배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긴 편지를 썼습니다.

10~12절에 첫번째 문제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이는 다름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고린도는 헬라이기 때문에 아마 학자들이 믿고 모임에 더해진 것으로 보입니다. 학자들은 언제나 학파를 만들어서 그 파를 즉 계보를 만듭니다. 모임은 그래서는 안되지만 구원받기 전 버릇이 구원받고 난 이후도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1 20절에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선비들이, 학자들 즉 철학자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하는 식으로 파를 만들었습니다. 한 지역모임 내에서 분파를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고린도교회 안에 있는 분열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국에 여러 지역모임이 있는데 그 지역모임들 사이에 분열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몸된 교회는 분열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한국에 한 모임이 있다는 가르침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한국모임에 여기저기 모여서 하나가 된다는 가르침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모임끼리의 분열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만약에 한국에 한 단체를 만든다면 그 단체는 분열이 일어난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단체는 성경에 없기 때문에 모임끼리의 분열이 있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언가 있다면 조직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어떤 국가교회라는 것도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영국교회라 불리면서 나라에 속한 교회처럼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도 합니다. 교회와 나라는 관계가 전혀 없습니다. 또한 인종과 교회와도 관계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또한 교회는 사회 객성과도 관계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뉴욕의 성공회교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한 때에 그 교회에 더해지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저 영국국교회에 소속되고 싶다 당신은 시골교회의 감리교 사람이잖습니까? 그래서 당신은 그기에 소속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뉴욕의 영국국교회는 부자들만 모이는 교회였습니다. 모든 사람을 다 받아들이는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계층이 교회에 관계된다고 하는 발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는 모든 사람이 주라고 말씀에 나오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더해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를 구약의 이스라엘의 변형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스라엘과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물론 유대인들이 복음의 부탁을 받고 로마까지 전도하러 갔습니다. 초대시대에는 하나님이 유대인들을 사용하셔서 전도를 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년간 그 유대인들을 교육했습니다. 믿음을 가진 훈련받은 사람들이 아시아 그리고 유럽으로 복음을 전하러 갔습니다. 유대인들이 초기에 그런 활동을 했지마는 교회는 구약 이스라엘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때때로 예루살렘으로 순례의 여행을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 관광을 위한 것입니다. 현재 예루살렘과 교회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또한 교회는 특정 인물과도 관계가 없습니다. 때때로 루터교회라는 말을 듣습니다. 종교개혁을 일으킨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특정 인물과 교회는 관계가 없습니다. 물론 루터는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은 그릇입니다. 그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분명히 한 사람입니다. 개혁을 한 것입니다. 위대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교회의 머리가 될 수도 없고 교회 중심이 될 수도 없습니다. 교회는 교회사 즉 교회 역사와도 관계없습니다. 종종 우리들의 모임은 역사에서 어떻게 되는가 관심을 가집니다만 물론 1800년대에 부흥이 있었습니다. 특히 영국뿐 아니라 여러 곳에서 있었습니다. 그때에 가장 은사가 있는 분들이 모인 곳이 영국의 플리머스라는 곳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플리머스 형제단이 아니냐고 그렇게 묻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 있는 모임과 플리머스와는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역사 가운데서 모임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 전파되고 성령의 역사로 구원받아 이렇게 모임이 생긴 것이지 그 역사에서 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50년 그 이전 180년 전의 플리머스와 모임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물론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모임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모임의 전통 가운데 모임이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릇으로서 하나님은 각각을 사용하십니다. 성령이 여기에 모임을 세운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주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사도행전 20 28절입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여기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사신 것입니다. 그래서 모임은 소중한 것입니다. 모임이 소중한 것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부수어서는 안됩니다. 한 지역모임 내에서 분열을 일으킨다는 것은 그 모임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 25절입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목숨을 거시고 교회를 사랑하셨습니다. 이 두 말씀을 통해서 교회가 존귀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가 축복되는 방법은 우리 매일의 삶이 주님의 뜻에 맞도록 생활할 때에 그 모임은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가정에는 사랑하는 대상이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모인 곳이 가정입니다. 거기서 사랑이 나타나서 사랑하게 되면 이 사랑이 또한 교회로 옮겨져서 사랑하게 되면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놀랍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입니다. 일본에 어떤 형제님이 영국에 갔습니다. 일년 이상 생활하며 모임에 출석했습니다. 일본모임보다 영국 모임이 매우 열심이었습니다. 그 일본 형제는 왜 나는 저렇게 안되는가? 일년 정도 교제하는 가운데 알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때문에 충성스럽게 열심히 봉사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말씀집회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는 죽어도 좋고 살아도 좋다고 말을 했습니다. 인생의 목적이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이 우리들의 믿음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모임을 축복되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 13절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고린도는 이와 같이 분열이 있었는데 이 사람들은 사람으로 말미암아 분열을 일으켰습니다. 바울은 이 사람들이 하나가 되도록, 즉 일치가 되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바울이나 게바나 하나님께 쓰임받은 큰 그릇에 불과합니다. 훌륭한 그리스도인이고 훌륭한 일을 하더라도 이들은 사람들입니다. 인간은 피조물이고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십니다. 창조주이실 뿐만 아니라 구속이 주이십니다. 죄인이었던 사람이 구원받은 게 지나지 않는 것이 바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와 동률일 수가 없습니다. 물론 12절에 있는 것처럼 분파를 만들기 위해서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해서도 안됩니다. 학자들이 학파를 만들듯이 교회에서 분열을 일으켰기 때문에 바울은 선비라는 용어를 쓰면서 그것은 가치가 없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전도할 때는 철학적인 어려운 말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21절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하나님의 뜻은 학자들이 어려운 용어를 사용하여 전도하는 방법을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의 지혜가 아니고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우리들은 말에 능숙하지 목할 수도 있고 또한 학식이 부족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전할 수는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전도의 내용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23절에 따르면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이와 같이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 구속은 십자가 위에서 완전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구원받습니다. 그래서 확신을 가지고 믿는 바를 책임을 가지고 전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입어서 해야 합니다.

26절에 고린도 사람들에게 말을 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하나님은 문벌 좋은 사람들을 많이 택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문벌 좋은 자나 학자나 높은 사람들이 구원받았지만 숫자가 적다고 말합니다. 이 세상에 보잘것없는 자들을 구원하셨다고 나타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고 말이지요. 고린도에 있는 학자들 즉 선비들이 자랑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자랑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3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들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으로 삼습니다. 우리들이 죄인이었는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지옥 갈 자가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하늘을 상속받는 자가 됐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복음을 전해 주셨고 우리가 마음을 열고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세상 학자들, 세상 부자들이 이것을 줄 수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권력자도 안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위해서 이것을 하시고 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패배자가 아니고 사탄은 이기시고 부활하시고 그리고 승천하셨습니다. 승리자이십니다. 우리들은 승리자 편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패배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자랑합니다. 그러나 육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그래서 학자들이 분열을 일으키는 것은 안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음행이라던가 그리고 소송이라던가 하는 문제가 있었지만 바울이 분열의 문제를 가장 먼저 다룬 것은 한 지역모임 내에서 분열이 생기면 우선 힘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분열 문제가 맨 먼저 나왔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한 지역모임 내에서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을 여러 각도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도 그 하나됨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단지 통일과 하나됨은 다릅니다. 통일은 다른 것에 의해 지배되어서 통일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됨은 자발적인 일치인 것입니다. 어떤 학자는 동물은 통일은 되지만 일치는 안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꿀벌도 확실한 사회생활을 합니다. 분명하게 통일되어 있습니다. 꿀벌은 일치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지역모임 내에서 통일과 하나됨 즉 일치를 구별해서 가르칠 필요가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 서유럽 사람들은 소련이 있었을 때에 소련이 침공해 온다 하면 일치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참된 일치가 아닙니다. 이것은 공동전선이지 일치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인간적인 생각으로 일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주님을 믿습니다. 같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같은 성령을 받았습니다. 같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같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을 받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일치되는 것을 종종 잘못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구원만 있으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가 된다고 가르치는 잘못된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물론 구원 받았기 때문에 교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임 생활에 있어서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됨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교파 사람들과 교제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과 순종하지 않는 사람과 차이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았기 때문에 교제합시다 라고 많이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교제합니다마는 말씀을 순종하므로 말미암아 교제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영적인 교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떠하든지 간에 말씀을 모르면 안됩니다. 때때로 일본에서 전 일본에 있는 모임이 모여서 하나되자라고 하는 생각들을 하는 사람이 간혹 있습니다. 그것은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생각으로 통일된 모임을 만들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 통일을 위해서 또한 어떠하든 조직이 만들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모여서 협의를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중에 능력이 있는 자가 그 조직을 지배하게 됩니다. 그런 경우는 인간적인 통일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통일로서 인간들은 무엇인가를 만들어냅니다. 이렇게 이렇게 해서 교제합니다. 이렇게 이렇게 해서 가르침을 믿읍시다. 이러한 방법을 취합시다. 그리고 행동도 함께합시다. 그러한 통일된 양식을 가지고 그 교제를 지키고자 합니다. 그러한 그들이 만든 이 조건에 안 맞으면 다른 사람들을 쫓아내버리는, 즉 출교시키는 일도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어떤 나라에서 과거에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전한 규정에 따르지 않는 모임은 모임 자체를 출교해버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모임을 다른 단체가 출교한다는 것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인간의 지혜로 조직을 만들면 그러한 일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모임들은 각각 독립되어 있다는 것을 잘 이해하여야 합니다. 독립이라는 말이 성경에 없지마는 이것을 지지하는 요한계시록 2,3장의 예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이와 같이 그 교회들에게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문제가 없는 모임도 있었습니다만 대부분의 모임들이 문제가 있었습니다. 다른 지역모임이 가서 그 문제를 해결하라는 기록은 없습니다. 에베소교회는 처음사랑을 버렸다고 주님께로부터 지적을 받았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겠다는 말씀을 주님께로부터 들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에베소교회와의 직접적인 문제였습니다. 에베소교회 문제를 가지고 갈라디아교회를 책망하는 일은 없습니다. 한 모임 모임이 주님을 향해서 책임을 지는 입장에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아무리 잘못되어도 그 책임을 에베소교회가 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분명하게 에베소교회는 독립된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립이라는 말이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여러가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바울은 사도로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개척전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교회를 매우 사랑했습니다. 이 편지를 보내서 그들을 가르쳤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전도를 하여 모임이 생기자 이 모임을 장로들에게 맡겼습니다.

사도행전 20 31,32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바울이 불러다가 말한 이 말씀은 오늘날에도 장로들이 이 말씀 그대로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마지막 전도여행을 마치고 이제 돌아가는 길입니다.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바울이 불러다가 가르침을 하고 있습니다. 32절에 있는 것처럼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라고 했습니다. 장로들은 에베소교회를 감독하고 또한 인도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 장로들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임이 생겨나면 장로가 일어나고 장로는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 장로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바울은 잘 가르쳤습니다. 그것을 생각나도록 해서 목자의 일을 하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개척한 전도자가 그 모임의 머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임이 생기면 장로가 있고 집사들이 있고 또한 성도들이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에 보면 감독들과 집사들과 성도들이라고 했습니다. 빌립보교회는 그와 같은 모임으로 자란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모임끼리 교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독립되어 있기 때문에 교제를 안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계시록 2,3장의 일곱교회에게 나가는 말씀들을 보면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했습니다. 인간적인 통일된 모임의 교제가 아니고 어느 지역 모임에서 은사가 있는 형제가 다른 지역모임에 초청을 받아서 가르치는 이러한 교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활동하는 시대에 예루살렘교회가 기근으로 곤란한 적이 있었습니다. 마케도냐와 아가야 지방 성도들이 물질적으로 도왔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모임이 기도하는 가운데 분별을 해서 물질적으로 도왔던 것입니다. 영적인 교제와 물질적인 교제를 모임끼리 이와 같이 하는 것입니다. 모임끼리의 교제는 세상적인 교제는 아닙니다. 육신적이며 세상적인 모임의 교제가 있게 되면 여러가지 폐해가 발생합니다. 예를 들면 신학교를 만들었다고 해봅시다. 그 결과는 가르침에 통일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생이 가르친 다음에 시험을 치기 때문에 그 선생의 의견에 안 따르면 점수를 받지 못할 것입니다. 학교는 신조를 가진 가르침을 가지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그 신조와 교리를 가지고 졸업합니다. 재미있는 우스개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형과 동생이 각각 다른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 형제가 졸업하고 모이자 서로 맞지 않았습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성경은 모임에서 가르쳐져야 합니다. 모임은 가르치는 곳입니다. 물론 모임은 여러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예배를 합니다. 전도를 합니다. 성경을 배우는 곳입니다. 또한 징계를 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서 고린도전서 5장 같은 그러한 범죄가 일어나면 징계 즉 훈련을 합니다. 모임은 기도하는 곳입니다. 이와 같이 모임은 여러가지 기능이 있습니다만 모임에서 배우고 또한 개인적으로도 배웁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열심히 읽게 되면 모임의 영적인 수준은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임에서 가르치는 가르침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모임이 좋은 이유는 한 사람이 말씀을 가르치면 그 말씀이 옳다기보다는 그 말씀을 가지고 분별하고 음미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 29절입니다.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예언한다는 것은 오늘날로 말하면 말씀을 교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음미 즉 분별하는 것입니다. 말씀 전하는 분이 내 말이 좋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분별된 가운데 그 말씀이 어떠한지를 분별하면 전하는 것입니다. 듣는 사람들은 어떠한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임의 교제는 대단히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분별은 비평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은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 교제를 받게 되면 알게 되는 것입니다. 분별한다는 것은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분별하기 때문에 말씀을 묻기도 하고 뜻을 나타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드리는 말씀도 분별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2005429 모래내모임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