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Recent Post

theWord Bible Software

Category

베드로를 훈련하신 주님

노시로 키요지

오늘은 주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훈련하기도 하고 가르치기도 한 면들을 인도 받고자 합니다. 먼저 누가복음 5 8절을 읽겠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베드로가 주님을 최초로 만난 것은 요한복음 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안드레에 의해서 주님 앞으로 인도 받았습니다. 그대 시몬인 베드로는 베드로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거기서 믿음을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여기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더 구체적으로 나타난 데입니다. 아마 믿고 나서 수개월이 지났겠지요. 이때 주 예수 그리스도는 베드로에게 여러가지를 가르쳤습니다. 밤새도록 물고기를 잡았지마는 조금도 수확이 없었습니다.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베드로에게 한번 더 고기를 잡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수고해서 피곤했지마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러자 많은 물고기가 잡혔습니다. 배에 가득했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죄가 많은 사람인 것을 알았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자연을 지배하시는 분이고 바다 속까지 아신다는 것을 베드로가 알았습니다. 베드로가 그물을 내렸을 때에 주님은 베드로의 그물 속으로 물고기를 몰아 넣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자연스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주 예수 그리스도가 자연을 지배하시는 분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베드로가 알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아는 그 사람은 또한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과 사람끼리 아무리 서로 비교해도 죄를 서로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피차간에 서로 비슷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하면 나쁜 일일지라도 선으로 여겨집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비로소 죄를 알고 그리고 회개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자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죄가 많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바다 속까지 아는 능력 많으신 분이십니다. 바다 속까지 아시는 분이기에 인간의 마음 속까지 아신다고 베드로가 생각을 했겠지요. 베드로의 죄가 드러났을 때 주님은 10절 후반에 있는 것처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해서 주님이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먼저 베드로 자신에 대해서 주님이 가르치셨습니다. 이제 주님은 생명을 지배하고 계신다는 것을 베드로에게 가르치고 싶으셨습니다. 8 51절입니다.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및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하지 아니하시니라

여기서 주님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야이로의 딸을 살렸습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교육시킬 목적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가르치시고 싶은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을 지배하고 계신 분이시다. 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택하였는고 하니 앞으로 장래에 이 세 사람을 통해서 주님의 가르침을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야고보는 편지를 한 통도 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인 야고보는 야고보서를 썼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형제 야고보는 순교했습니다. 야고보는 몸소 몸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보였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후서를 썼습니다. 사도행전을 보게 되면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유대인도 들어오게 열고 이방인도 들어 오게 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굉장한 일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요한은 요한복음과 요한 일 이 삼서와 요한계시록을 썼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세 사람을 잘 교육하셨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자연을 지배하는 능력을 갖고 계셨습니다. 사망을 지배할 수가 있었습니다. 야이로 집에서는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복음서에서는 주님이 세 사람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렸습니다. 또한 주님은 병을 지배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악령인 귀신들을 지배하셨습니다. 잠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는 전능자이십니다. 말로 가르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보였습니다.

이번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에 대해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누가복음 9 28절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35절을 보시면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고 여기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인 본질을 보이신 것입니다. 영광의 모습입니다. 인간의 모습을 가진 겸손한 모습을 취해서 사람과 대화를 해 주셨습니다. 영광이 가리워져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는 주님께 접근해서 무슨 말이든지 물을 수가 있었습니다. 31절에 보시게 되면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영광 중에 구약의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나타났습니다. 이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십자가에 돌아가실 것을 대화로 나눴습니다. 영광의 극에 계셨던 분께서 사람이 되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것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35절에서는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고 하늘에서 목소리로 들리게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 본질을 알도록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에게 목소리로 들리게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이 일을 죽을 때까지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베드로서에 보면 그 기사가 나와 있습니다. 때때로 베드로는 이 일을 떠 올렸다고 생각합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이 어떤 분이신가 하고 드러나는 것은 굉장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마태복음에서 또 베드로에게 뭔가를 가르치셨습니다.

마태복음 17 24절입니다.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가로되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여기서는 베드로를 통해서 세상 사람들에 대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을 나타내셨습니다. 왜냐하면 세금을 받으러 왔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상담하지도 않고 낸다고 말해버렸습니다. 주님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낼 필요가 없다고 일단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주님 자신이 어떤 신분인가를 주변 사람에게 나타내고 또 베드로에게도 분명히 나타내셨다고 봅니다. 이때 주님은 돈을 갖고 있지 않은 듯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예배할 때 남에게 빌린 것을 가지고 예배하지 않습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을 통해서 예배하는 것입니다. 물질도 마찬가지입니다. 빌린 것을 가지고 예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빌린 것을 가지고 세금을 내면 안되기 때문에 즉 물고기에서 돈을 끄집어 내게 해서 세금을 냈습니다. 원래는 안내도 되지만 우리성경에는 오해케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밑에 난하주에는 넘어지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실족시키지 않으시려고 주님은 세금을 내셨습니다. 베드로에게 분명히 주님이 보이셨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세금을 낼 필요가 없지만 저희로 오해케 즉 실족지 않게 하기 위해서 세금을 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잘못에 대해서 화를 내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이 관용하다는 것을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베드로는 하나씩 하나씩 경험을 통해서 양육을 받아오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8 45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무리가 옹위하여 미나이다

여기에 12년이나 병으로 고생하는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이 여성에게는 굉장히 고통스러운 병이었습니다. 이 병 때문에 결혼을 할 수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이 여자는 주님이 옷에 손을 대면 낫겠다고 믿음을 갖고 손을 대서 나았습니다.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라고 주님은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사람이 많기 때문에 모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주님 당신에게 능력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싶으셨습니다. 누군가 내게 손을 댔다 왜냐하면 내게서 능력이 나갔기 때문이다. 주님은 가르치고 싶으셨습니다. 구원받는 다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라는 것을 말이지요. 또 이 여성에게는 믿음의 고백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누가 내게 손을 댔느냐고 주님이 물으셨습니다. 여성에게는 이런 고침의 은혜는 지금까지 없었겠지요. 이 여인에게는 평생의 짐이었습니다. 그리고 구원은 각자가 받는 것입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수 있으시지만 구원은 각자입니다. 그리고 믿었다면 반듯하게 믿음의 고백을 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내게 손을 댔느냐고 주님이 물으셨다고 생각합니다. 각각은 하나님께로부터 믿음으로 말미암아 능력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여자가 고백을 했더니 이번에는 평안을 주셨습니다. 48절을 보시면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셨습니다. 주 예수님은 놀라운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의 믿음을 분명히 하고 그리고 그것을 자각하게 하고 그리고 주님께로부터 평안을 받게 하셨습니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는 말은 행위가 너를 구원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손을 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구원한다는 것을 여기서도 나타내셨습니다.

또한 베드로에게 연약함도 가르치셨습니다. 마태복음 26 39~41절입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십자가가 임박해 왔을 때 그 십자가를 미리 맛보셨습니다. 고민해서 죽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 예수님이 기도하고 있는 동안에 베드로는 자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깨어 있을 수 없더냐 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서는 사람의 즉 베드로의 연약을 가르치셨습니다.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의뢰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육신이 약하도다 해서 육은 약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에게 깨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약함은 무엇으로 극복이 되겠습니까? 약함은 기도로 극복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열지 않겠습니다만 베드로는 더 연약함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요한의 인도를 따라서 헤롯의 관저로 베드로가 들어갔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붙잡혀 있었습니다. 그때도 요한과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거기까지 간 것입니다. 그때 여종이 나와서 네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냐? 말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근위병이나 무사가 물은 것이 아니라 여종이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저주하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주님께서 여기서 분명하게 인간이라고 하는 연약함을 베드로에게 가르치셨다고 생각합니다.

누가복음 22 61절에 보시면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베드로가 모른다고 할 대에 저주하며 모른다고 했기 때문에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했습니다. 너는 그런 자니까 소용이 없다 그런 식으로 부신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때의 눈길은 부드러웠다고 생각합니다. 62절에 보게 되면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베드로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사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만큼 큰 죄는 없습니다. 그것을 용서하셨습니다. 그 이상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8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는 용서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21,22절입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베드로 생각에는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하는 사고방식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일곱번까지 용서를 할까요?라고 베드로가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일곱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했을 때 돌아보실 때의 주님의 마음 속에는 이 말씀이 주님의 마음 속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변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는 말은 아마 무한한 의미를 나타낸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7은 완전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도 주님께서 돌아봤을 때 이 말씀을 기억하고 그리고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가르침과 경험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다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사도행전에서 일할 수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주님을 잘 주시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은 언젠고 하니 바다 위를 베드로가 걸어갈 때였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이시라면 나를 물위로 걸어가게 해 달라고 주님께 부탁을 했습니다. 인간으로서 물 위를 걸은 사람은 베드로 뿐이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물 위를 걸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람과 파도를 봤을 때 그는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에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에게서 눈을 떼서는 안되는 거야 라고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눈이 주님을 응시하는 한 우리는 안전합니다. 베드로에게 주님은 잘 가르쳤습니다. 다른 데를 보지 말고 나를 보라고 말이죠.

순서가 조금 다릅니다만 이번에는 요한복음 21장으로 갑니다. 18~22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여기서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눈을 응시하지 않고 요한에게 그 시선을 주었습니다. 여기서는 간단히 말씀드리면 베드로가 순교로 죽는다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죽는 방식이었습니다. 사실은 계속 영광을 나타내면서 죽는 것은 복됩니다. 베드로에게는 그러한 예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자기는 순교하지만 요한은 어떻게 됩니까?라고 베드로가 물은 것입니다. 20절에 보면 이 문맥에서 요한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릅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 때문이 아니라 단체 행동도 아닙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어떤 식이 되더라도 그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의 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요한을 보지 말고 나를 보고 내 말을 듣고 따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다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말하기도 하고 보기도 하지만 각자가 주님을 따르도록 말씀하십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러저러 하더라도 그기에 시선을 두지 말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 시선을 두고 따르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기는 순교하는데 요한은 어떻게 되는가 해서 남을 걱정했습니다. 요한은 요한대로 하나님을 따를 것이고 너는 너대로 하나님을 따르라 라고 주님은 가르치셨습니다. 또 다른 교훈이 됩니다마는 부활하신 이후에 주님은 나를 사랑하느냐고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다른 대상이 아닌 나를 사랑하느냐를 세번이나 확인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하는 줄 아신다 하면서 세번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그러하자 주님은 베드로에게 목자의 일을 주셨습니다.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는 놀라운 일을 주셨습니다. 베드로 쪽에서 본다면 세번이나 주님을 부인했기 때문에 제자들 앞에서 베드로는 엄청난 부담을 마음 속에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때 주님은 이 장면에서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제자들 모두 있는 가운데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사랑한다고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사도로서의 자격을 다시 주셨다고 생각을 해도 좋을 것입니다. 모두가 보고 있는 가운데 이 사람은 양을 치는 자라고 주님이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뿐만 아니라 거기 있는 제자들이 다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선두에 서서 일을 하더라도 베드로 자신의 양심의 가책도 없고 다른 제자들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사도행전에서 지도자로서 충분하게 활동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베드로는 정말로 감사했다고 생각합니다. 베드로는 주님께로부터 더 이상 제자가 아니다라는 말을 들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주 예수 그리스도는 정말로 놀라운 분이셨습니다.

베드로 전서 1 15절을 봐 주십시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모든 사람에게 베드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라고 가르칠 수가 있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베드로는 참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주님께서는 친절하시게도 훈련하시고 그리고 가르치셨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날에도 동일합니다. 우리도 말씀을 읽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배웠으면 합니다. 고맙습니다.

2008 4 17(김포모임)

'주옥같은 말씀들 > 노시로 , 이치가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사 말기의 믿음의 사람들  (0) 2008.05.20
그리스도인들의 은사와 일  (0) 2008.04.30
지역교회의 문제들과 일치됨  (0) 2008.04.29
성경의 중심되신 예수 그리스도  (0) 2008.04.24
기도  (0) 2008.04.22
바울의 믿음과 그 삶  (0) 2008.04.21
아브라함  (0) 2008.04.20
하나님의 사랑  (0) 2008.04.19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