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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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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

노시로 키요지

안녕하십니까? 그럼 말씀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요한복음 21 15절입니다.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가장 기본적인 것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인도함을 받고자 합니다. 복음집회는 아니지만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두 종류 나오고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느냐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아가페라는 사랑입니다. 베드로가 말한 사랑은 페리오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헬라어에서는 사랑이 세가지 단어로 표현된다고 합니다. 아가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베드로가 말한 사랑은 귀엽다든가 사랑스럽다든가 이러한 우정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 하나는 일반 사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에로스라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사랑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아가페 사랑으로 말입니다. 첫째로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셨습니다. 두번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사랑을 나타내는 방법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말로 사랑이라 하면 금방 알지만 그 사랑을 구체적으로 나타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시는 것으로 사랑을 표현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요한복음 3 35절을 보시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아낌없이 사랑하시는 그 표시로 만물을 그 손에 주셨습니다. 만물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 주셨습니다. 또 한가지를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7 24절입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요한복음 17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입니다. 아버지를 향해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주셨습니까?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즉 나의 영광인 하나님의 영광을 주셨습니다. 영적인 최고의 것입니다. 영적인 최고의 것과 만물인 물질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언제부터 사랑 하셨는고 하니 창세 전부터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 사랑은 창세전부터 계속된다는 것을 이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 주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에게 주셨습니까? 이것이 요한복음 3 16절 그 유명한 말씀인 것입니다. 이 분은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분이셨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것은 세상에 가장 귀한 것을 주셨기 때문에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셨습니까?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것을 이번에는 로마서를 통해서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로마서 5 5~8절입니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실감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5절에 있는 것처럼 성령이 믿는 자들에게 부어졌습니다. 여러가지 사랑을 이해하고 실감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은 이상한 느낌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낸다는 것이 아닙니다. 6절에 나오는 것처럼 세상에 있는 우리, 우리가 연약할 때에 우리를 사랑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연약할 때가 무어냐 하면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연약을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사랑할 때에 사랑할 가지가 있는 것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우리들을 하나님은 기억해 주셨습니다. 8절에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사랑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믿는 자는 일 말씀을 볼 때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이 부어진 증거입니다. 믿지 않는 자에게 이 말을 한다면 말은 알지마는 그 실체를 모르는 것입니다. 기쁨과 감사가 나오지를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열을 통해 나타내셨기 때문에 우리들에게는 찬송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8절에 보게 되면 하나님 아버지께 가장 사랑을 받는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이치적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압니다. 그래서 우리 피차는 성령이 내주하고 있기 때문에 그 힘과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옳게 행하도록 인도함을 받는 것입니다.

예화입니다만 미국에는 재판 가운데 배심제라는 재판제도가 있습니다. 검사와 변호사가 서로 변론하는 것을 배심원이 듣습니다. 배심원들이 무죄라고 표결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실제는 살인자였습니다. 배심원이 표결하게 되면 즉시 석방되게 됩니다. 그 사람은 법률적으로 죄가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선한 일을 행하겠습니까? 그 사람은 실제로 또 살인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것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었습니다. 성령이 이것을 가르치면서 우리 가운데 내주하시기 때문에 옳은 일을 실행할 수가 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으면 우리는 옳은 일을 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도 성령이 내주함과 동시에 육도 아직 남아 있습니다. 성령과 말씀으로 육을 이기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대통령의 육과 살인자의 육은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육과 세상사람의 육은 본질적을 같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 육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갈라디아서의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는 것을 정말로 놀라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와같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사랑을 세상에 나타낼 수도 없고 그리스도의 향기도 나타낼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라는 말을 가지고 만이 아니라 사실을 가지고 우리들에게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이번에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믿는 자들에게 나타내신 사랑을 요한일서를 통해서 인도함을 받고자 합니다. 요한일서 4 7~10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여기 보시면 사랑이 어디서 먼저 왔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7절에서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어제 밤에는 복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에게 사랑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에서는 세상에 대한 사랑보다도 믿는 자에게 대한 사랑이 우선입니다. 10절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면 피 사랑자에 대해서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시므로 만물을 주셨는데 그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우리가 그것을 느끼기 때문에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늘 기억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것도 사실로서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먼저 그리스도를 사랑하셨고 그 다음에 세상을 사랑하셨고 그 다음에 믿는 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누구를 사랑하셨습니까? 그 아가페 사랑으로 말이죠? 그 사랑은 하나님 아버지와 교회를 사랑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 23,24절을 열어주시기 바랍니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로부터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아버지를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은 큰 원칙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사랑을 또 어떻게 나타내셨는가 하면 그 사랑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순종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으로부터 십자가에 돌아 가시기까지의 그 전 생애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그 기도는 세번 기도하시기를 아버지여 아버지의 듯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십자가까지 아버지의 뜻이면 순종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하시는 것은 구체적으로 아버지의 뜻을 순종해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 20회 정도 나온다고 합니다. 한번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게 되면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기 때문에 주님의 뜻을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고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사랑하셨습니다.

에베소서 5 25절입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주님께서는 교회를 사랑하셔서 그 자신을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교회가 존귀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목숨을 버리실 정도의 교회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0장에서는 하나님이 그 피로 사신 교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의 그 주어는 하나님이 되어 있습니다.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심으로 교회를 탄생시켰습니다. 교회의 소중함을 생각하는 구절은 이 두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우리가 교회를 사랑해야 하느냐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교회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교회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에 보면 남편과 아내 관계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22,24절입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왜 이런 것이 기록되어 있겠습니까? 남편은 아내를 사랑합니다. 그 아내가 남편에게 응답하는 것이 순종하는 것입니다. 남편의 사랑이 먼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 23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여기에 사랑하는 자와 사랑 받는 자의 관계가 명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아드님을 사랑하고, 성도들을 사랑하고 그리고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을 하나로 여겨도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형제자매들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이 요한일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일서로 다시 한번 가시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어떤 자인고하니 4 11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사랑 받았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형제자매들을 사랑하는 것이 같다는 것이 바로 20,21절에 나와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형제자매들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처럼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상태와 관계없이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신분과 그 어떤 조건과 상관없이 사랑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연약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읽고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한 다음에 형제자매들을 사랑해야 된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음미하고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교제하는 가운데 많은 문제가 일어날 수 있지만 말씀을 읽고 그 원점으로 가서 문제를 푸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면 말씀이 생각나게 되고 말씀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창조주를 우리가 반드시 생각해 내겠죠. 또한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시다고 말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영원히 사랑하신다는 것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나타난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사랑이라는 것을 주일날 만찬을 통해서 나타내는 그 사랑인 것을 압니다. 그래서 모임에서 주님을 기억할 때 이와 같은 만찬을 통해서 주님을 기억하고 가정에서도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 사랑을 이 말씀을 통해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13,14절을 보시면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 만찬 때 기억할 것이 많다고 우리들은 생각합니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11장을 보시면서 말씀을 드리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25절입니다.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를 기념하라입니다. 또한 26절에서는 오실 때까지 라는 말씀으로 봐서 주님께서 공중에 오실 때까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실 때라는 때가 나타난 것으로 봐서 이 만찬은 주님께서 공중에 오실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선언하는 것도 그 의미 속에 들어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십자가는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있지마는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선언하고 주님의 오심을 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 자신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하신 일이 우선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을 먼저 기억하므로 그분의 하신 일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순서가 주님 자신이 우선이고 먼저입니다. 방금 보신대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중요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 받는 다는 것을 안다면 사랑하는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저희들 가정에서 개를 산다고 가정해 봅시다. 산 개는 주인이 바깥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기쁨으로 주인을 맞이합니다. 들개는 사람이 가면 도망갑니다. 그래서 사랑을 받는 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렇게 사랑을 받는다면 동물조차도 사랑을 나타낼 수 있는 것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이와 같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성도들에 대한 사랑을 잘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가르침이 아니고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형제자매들을 사랑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를 사랑하는 가장 큰 사랑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율법에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의인이나 악인의 밭에 비를 내리십니다. 우리가 성령으로만 그 사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사랑으로서는 불가능합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의 인도하는 가운데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도할 때는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전도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진지해지는 것입니다. 사랑을 가지고 복음을 전한다면 듣는 사람은 마음에 무언가를 느끼겠지요. 이것은 의무가 아니라 사랑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더 깊이 교제할 수 있겠습니다만 사랑을 받은 사람이 사랑한다는 원칙을 확인하는 가운데 주님 앞에서 생활한다면 더 풍성한 삶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짧은듯합니다만 여기까지 인도하심으로 보고 마치겠습니다.

2005419 해운대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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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