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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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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람

노시로 키요지

안녕하십니까? 이 모임에 제가 처음 방문했습니다. 저를 조금 소개 드리겠습니다. 제가 믿음을 가진 것은 18세 때였습니다. 지금은 만 82세입니다. 18살에 구원받고 26살에 니이가타로 전도하러 갔습니다. 그 때에 영국에서 온 마카리스타란 형제님과 함께 전도를 했습니다. 그 형제님은 2년이 지나자 가버렸습니다. 그 형제가 가고 나서 니이가타(新潟)에서 구원받은 형제들과 함께 전도를 했습니다. 제가 구원받고 주님의 일을 할 때는 선배들이 적었습니다. 일본에서 전쟁이 있었고 그 내에서 믿는 자들에게 박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후가 되었을 때 그리스도인들의 숫자가 적었습니다. 그 당시 전쟁이 끝났을 무렵에 세 명의 형제님들로부터 주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제가 일본 년도로 하면 소와 1년이니까(1925) 제가 18살일 때에는 소와 18년이 됩니다. 무슨 이유에선지 모르지만 선배형제님들이 제가 전쟁 때이기 때문에 군대에 가면 안된다고 생각해서 저를 빨리 결혼시켰습니다. 제가 19살 때 선배의 권유로 결혼을 했습니다. 그때는 전쟁 때이기 때문에 제가 있는 모임에 자매님이 한 분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형제님들의 반은 형무소에 가 있었습니다. 아마 박해 관계로 선배형제님들이 저로 하여금 결혼하도록 권한 것 같습니다. 선배님들의 권하는 이유를 잘 몰랐지만 제가 순종을 했습니다. 내가 군대에 가기 전에 전쟁이 끝났습니다. 외국에서 온 형제님과 함께 18살부터 26살 때까지 동경에서 전도를 했습니다. 그 당시는 모두가 열심이었습니다. 그 때에 일본 북쪽인 아오모리(靑森)라던가 동경에서 남쪽인 나고야 쪽으로 전도하러 나갔습니다. 저는 동경에서 니이가타로 전도하러 와서 지금 현재는 니이가타 모임과 그리고 카메다라는 모임과 나홋가라는 모임이 시작되게 되었습니다. 그때 선배형제님들이 저에게 권면하기를 충성스러울 것과 겸손할 것을 권면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제가 충성스럽지도 않고 겸손하지도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선배 형제님의 가르침을 제가 기뻐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디모데에 대해서 교제할까 합니다. 디모데후서 3 15,16절입니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여기에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왜 여기서 디모데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렀겠습니까? 그것에 대해서 생각을 해봤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전도인,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 그리고 일군, 그리고 내 아들이라고 네 가지 어휘로 부르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불린 사람은 디모데 밖에 없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디모데가 살고 있는 데는 에베소였습니다. 그러나 이 당시는 그 에베소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에베소에는 거짓교사가 있었고, 또한 늙은 여자들의 만들어낸 이야기가 있었고,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4 3,4절을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래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지지해 줄 교사들을 초청했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에베소 사람들은 존중했습니다. 그래서 현재에 말씀을 교제할 사람을 초청할 때에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일본말로 음미한다 하심) 알아봐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말하지 않는 사람을 초청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13 1~3절까지 먼저 읽겠습니다.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하여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 마침 여로보암이 단 곁에 서서 분향하는지라 하나님의 사람이 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가로되 단아 단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저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 제사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고 그 날에 저가 예조를 들어 가로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예조라 단이 갈라지며 그 위에 있는 재가 쏟아지리라 하매

이 때는 유다와 이스라엘이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은 자기가 다스리는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지 못하게 하려고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금송아지 둘을 만들어서 단과 벧엘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보통 사람으로 제사장을 삼아서 거기에서 예배를 드리게 했습니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 여로보암에게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서 경고했습니다. 이 제단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리고 여로보암 너의 후손도 축복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람이 보냄을 받았습니다. 여로보암은 이 하나님의 사람의 말을 듣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을 저지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만 손이 시들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 마른 손을 낫게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을 환영하려고 나한테 와서 떡과 물을 마시라고 권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거절했습니다.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11절을 읽겠습니다. 벧엘에 한 늙은 선지자가 살더니 그 아들들이 와서 이 날에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서 행한 모든 일을 저에게 고하고 또 그가 왕에게 고한 말씀도 저희가 그 아비에게 고한지라

18,19절을 읽겠습니다. 저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우라 하였느니라 하니 이는 그 사람을 속임이라 이에 그 사람이 저와 함께 돌아가서 그 집에서 떡을 먹으며 물을 마시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예언한 대로 제단이 갈라졌습니다. 제단이 갈라진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갈라졌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 예언을 한 다음에 자기가 간 길로 다시 가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고 떡도 먹지 말라고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동일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불리는 벧엘의 늙은 선지자가 이 하나님의 사람을 속였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물과 떡을 먹어도 좋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우리 집으로 오라고 속였습니다. 이 젊은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23,24절에 보면 사자한테 찢겨서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책임은 무겁습니다. 우상숭배한다는 죄는 큰 죄입니다. 이것은 저주받는 죄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보냄을 받았습니다만 이것이 진실이라면 자기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도 진실인 것입니다. 아무리 선배라 할지라도 주님의 말씀이 직접 주어진 그 젊은 사람들은 아무리 나이가 많은 선배라 할지라도 말을 들어서는 안됩니다. 늙은 선지자는 좋지 않습니다. 우리들도 우리가 직접 읽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우리 스스로는 주님 앞에 책임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 늙은 선지자처럼 이렇게 되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람은 우상에 대해서 예언한 말씀과 자기에게 주어진 예언의 말씀이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잊었습니다. 이것을 오늘날 우리들에게 적용시키면 복음의 진리를 굽혀서는 안됩니다. 모임의 진리도 굽혀서는 안됩니다.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변했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33절을 보겠습니다. 여로보암이 이 일 후에도 그 악한 길에서 떠나 돌이키지 아니하고 다시 보통 백성으로 산당의 제사장을 삼되 누구든지 자원하면 그 사람으로 산당의 제사장을 삼았으므로

이로써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이라는 것을 두 번 경험한 셈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제단이 갈라진 것 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사람이 사자에게 찢겨 죽은 것은 둘 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분명하게 하나님의 말씀이 나갔지만 여로보암은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신약에서 디모데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책임이 크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 말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디모데후서로 가게 되면 그래서 디모데후서 3 15~17절에서 성경 그 자체에 대해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이와 같이 힘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복음의 진리라면 요한복음 3 16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진리가 요한복음 3 16절에 전부 다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로 간다면 1장부터 5장에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3 16절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15장에 복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부활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로마서 10장에서도 부활이 복음의 진리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부활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도 요한복음 3 16절에 없지마는 요한복음 3 16절은 복음의 진리입니다. 이것을 굽힐 수는 없습니다. 복음의 진리를 분명히 가르치지 않으면 사람들은 분명히 구원받지 않습니다. 특히 복음의 말씀은 변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지역모임의 진리같으면 마태복음 18 20절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것은 지역모임 진리의 토대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기 때문에 주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모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임재가 있습니다. 지역모임에는 주님의 이름으로 모일 때 그기에는 주님의 임재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역모임 진리의 토대입니다. 이 지역모임의 토대가 행동으로 옮겨질 때는 사도행전 2 41,42절로 가게되면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이것은 지역모임의 행동의 진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지 않으면 지역모임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에서 받는 이라는 말은 믿은 것을 의미합니다. 일본에서 회개한다는 그 ()자와 마음을 돌이킨다는 ()라는 한자가 있습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우리의 죄를 주님 앞에 고백하는 것입니다. 회신(回信)이라는 구원받는 회개는 일생에 단 한번뿐입니다. 그 다음에 침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침례도 일평생 한번이고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한번입니다. 회개가 한번이라면 그 회개를 행동으로 나타내는 침례도 한번입니다. 그 다음에 제자의 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모임에 더해지는 것 즉 영접되는 것도 한번입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고백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모임에 더해지는 사실은 한번입니다. 물론 기독교계가 때때로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회개도 잘못되고 침례도 잘못되는 경우가 종종 있기는 합니다만 저에게 있어서는 회개하고 그 회개를 고백하는 침례를 받고 하나님의 모임에 영접된 것은 한번이었습니다. 이제 다른 교회로 가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그래서 회개와 침례와 영접은 한번입니다. 그리고 사도의 가르침, 서로 교제함, 떡을 뗌, 기도하기는 늘상 행하는 것입니다. 특히 사도의 가르침은 성경의 가르침인데 신 구약을 포함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의 가르침을 보면 구약을 통해서 신약을 이끌어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의 가르침입니다. 서로 교제하는 것은 형제자매들간에 주님의 이름으로 교제하는 것입니다. 떡을 때는 만찬은 사도행전에 있는 예처럼 그 주일 첫날에 행하는 것입니다. 저가 가르침 받기로는 떡을 떼는 것은 매우 단순한 의식이라고 저가 가르침을 받은 기억이 있습니다. 떡을 뗀다는 또 하나의 이름은 주의 만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권위가 있는 만찬으로 그 만찬에 주님이 초대해 주신 것을 나타내는 의미입니다. 영적으로 존귀한 것이라는 것을 가르침 받습니다. 이제 떡을 뗌이라는 이름과 주의 만찬이라고 부르는 두 가지 명칭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42절은 모임에 있어서의 행동입니다. 기도하는 것도 모임적으로 행하는 행동입니다. 행동은 사도행전의 모본을 따라서 전도집회라던가 말씀집회 등을 지역모임이 행합니다. 사도행전 2 41,42절은 마태복음 18 20절에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마는 이것은 하나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로 돌아가겠습니다마는 디모데서는 성도들의 교제를 경애라는 말로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5 3절을 보면 참 과부인 과부를 경대하라 경대하라고 했기 때문에 경애 내지는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우하라는 의미로 썼습니다. 5 17절에 보면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장로들을 존경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6 1절을 보면 무릇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여기에 종은 상전을 공경합니다. 디모데 전후서, 디도서는 목회서라고 보통 일컫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교제라든가 그리스도인들을 어떻게 인도할 것인가라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방금 읽은 말씀을 보면 참 과부는 경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임의 인도자를 존경해야 합니다. 이 당시의 종들은 노예를 말하지만 이 노예들은 상전을 공경해야 합니다. 종들이 상전을 공경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교제 가운데 교제는 좋습니다만 경애하는 마음을 가지고 교제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경애(敬愛)라는 말은 애자가 사랑애이고 경자는 공경이라는 경자이기 때문에 사랑 위에다가 경이라는 태도를 가지고 교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교제 가운데 대단히 존귀한 것입니다.

이야기가 조금 뛰어넘습니다만 다윗은 기름부음 받은 자에 대해서 대단한 존경을 표시했습니다. 자기를 죽이고자 하는 기름부음 받은 사울을 다윗은 두 번이나 죽일 기회가 있었지마는 죽이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다윗은 인정을 한 것입니다. 사울이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부상을 입었습니다. 어떤 아말렉인이 사울의 목을 잘라서 다윗에게 가져왔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죽이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아말렉 사람이 죽이느냐 해서 그 아말렉 사람을 처형해버렸습니다. 다윗은 자기 의지로 정권을 잡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기름부음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선택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미리 주님의 이름으로 기름부음 받은 사람을 존경하는 본을 보여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지키는 것은 지키는 것입니다. 진리를 지키는 것은 지키는 것이지만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욕한다든지 저주한다든지 이런 것들은 하지 않으면서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교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뿐 아니라 디모데전후서에는 경건이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경건을 나타내라든지 디모데전서 3 16절을 보면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경건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모본이십니다. 정말로 겸손하게 되셨습니다. 세상에 오셨습니다. 창조자 되신 분이 피조물 같은 형태를 입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일평생 거룩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이루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습니다. 겸손하시고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시고 영광 가운데 올리우셔서 예배를 받는 자로까지 되셨습니다.

에베소에서 어떤 사람들이라고 말했지마는 그 사람들은 잘못된 가르침을 가르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장로들이 본을 보여야 하고 장로들이 경건을 나타내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왜 디모데서와 디도서에 장로의 본분이 기록되어 있겠습니까? 그 모임의 장로가 완전하지 아니하면 반대자들을 다스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의 조건으로서 3 2절에 보게 되면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책망할 것이 없어야 되며 라고 단위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일본어 성경에는 책망할 것이 있으면 안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장로에 대해서 이 조건들이 이상적이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일본어 성경처럼 이러이러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반드시 이와 같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임에서도 장로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에는 때때로 힘든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장로의 조건들을 모두 충족시킵니까?라는 질문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가르칠 때 주의하지 않으면 여러가지 문제들이 발생합니다. 장로 중에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자기 집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하나님의 집을 다스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품성의 문제는 문제이기도 합니다마는 왜 잘 가르치는 장로를 존경해야 하는고 하니 이 장로는 잘 가르쳐서 반대자들을 다스리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반대자들은 여러가지 이론을 내세워서 장로들을 공격한다고 생각합니다. 에베소에는 이런 문제들이 있었기 때문에 장로들은 이런 자격을 가지고 건전하게 지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장로의 자격을 기록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과부에 대한 것이나 집사에 대한 것들의 말씀을 기록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잘못된 가르침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성경을 알지 못하면 그 사람들을 봉쇄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3장 마지막에 성경을 가지고 그 사람들을 봉쇄할 수도 있고 덕을 세울 수도 있고 힘을 북돋울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디모데에게 바울은 말했습니다. 너는 뉘게서 배운 것을 안다고 말했습니다.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순수한 믿음으로부터 디모데는 가르침 받기도 했습니다. 또한 디모데에게 가르친 사람은 바울 자신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타인의 모본을 통해서 순수한 가르침을 통해서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으로 말미암아 자라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른 것은 목숨을 걸고 말씀을 지키라는 것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목회는 지역모임의 일이기 때문에 또 하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상급이 있다는 것을 믿으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순종하게 되면 어떤 때는 박해를 받겠지요. 또한 어려움을 만나겠지요. 또한 오해도 받겠지요. 그러나 바울은 디모데에게 나중에 상급이 있다고,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상급을 믿지 아니하면 힘이 없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섬기는 것을 절대로 헛되지 않습니다. 제가 전도를 시작했을 때 전도하는 목적에 대해서 선배형제님 두 분이 서로 의견 충돌을 보였습니다. 한 형제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전도하는 동기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순수한 동기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한 명의 형제님은 그것이 전도의 목적이기는 해도 영원한 상급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고 이 형제님은 주장했습니다. 저는 그대에 젊었기 때문에 전도의 동기가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제가 받아들였습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전도를 해 오면서 보니까 상급을 바란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지금에사 깨닫게 됩니다. 그 두 형제님의 가르침 모두가 옳았습니다. 어느 쪽을 택한 다기보다도 반드시 영원한 상급이 있기 때문에 이 상급을 바라보고 섬기는 것은 대단히 좋은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에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예언이 있습니다. 그기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보상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노획물을 나눈다는 의미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상급을 바라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상급을 바라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것들은 없어집니다. 주님 안에 있는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디모데는 젊었고 마음이 약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하나님의 사람이여 하면서 이것들을 권면했던 것 같습니다. 디모데는 마음만 약했던 것이 아니라 몸도 약했던 것 같습니다. 자주 나는 비위, 즉 위장의 탈 때문에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할 정도로 약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술을 마셔도 좋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술을 마시지 않기 때문에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했습니다. 아마 디모데는 병이 있어도 술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본질입니다. 몸도 약했고 마음도 약했고 시련도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권면을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2008_04_12 김포모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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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