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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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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중심되신 예수 그리스도

노시로 키요지

마태복음 12 17~21절까지입니다.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사람이 많이 좇는지라 예수께서 저희 병을 다 고치시고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계하셨으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바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또한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 성경 가운데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이나 중심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이 이사야와 시편에 잘 예언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이사야의 예언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위대한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분이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의 종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아서 완전히 순종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 보다 앞서는 법도 없고 뒤서는 법도 없었습니다. 이 분은 성령에 충만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서 사람이 되셨지만 성령에 충만되어 있었습니다. 원래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을 나타냈어야 하는 민족이었습니다. 구약을 보게 되면 유대인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나타냈어야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이방인에게 나타낼 수 없었던 것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이방인들에게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일본어 성경에는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라고 되어 있지만 난하주에 보면 정의를 드러낼 때까지라고 다른 해석이 가능합니다. 일본어 문어체에는 공의(公義)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바꾸어 말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이방인들에게 나타냈던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나타냅니다만 그 나타내시는 방법이 아주 부드럽습니다. 다투지를 않습니다. 또한 큰 목소리로 선전하는 방법도 취하지 않습니다. 인간들은 많은 경우에 자기 주장으로 다툽니다. 자주 큰소리로 자기를 선전합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는 작은 목소리로 왜냐하면 소리를 듣지 못할 정도이기에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뽐내는 그런 모습들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연약한 자들을 특히 멸시 받는 자들이라던가 어린아이들이라던가 이런 사람들의 기를 꺾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셨습니다. 이러한 성정을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심판에 이를 때까지라고 우리성경에 되어 있는데 일본어 성경에는 정의의 승리라고 번역할 수 있지만 저는 이것을 십자가라고 생각합니다. 심판에 이를 때까지 즉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까지 주님께서 행하신 전도는 대단히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이 당시에 유대인들은 여호와를 자기들의 하나님이라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유대교로 개종하지 않으면 유대인들은 상종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굉장한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께는 차별이 없었습니다.

이것을 신약성성 갈라디아서에서 잘 나타내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교제의 방식을 말씀하고 있습니다만 읽겠습니다. 갈라디아서 3 27,28절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를 나타냈습니다. 마음으로 믿고 몸으로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바깥으로 행위를 가지고 드러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고백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구별이 없는 것처럼 한국인이나 일본인이나 구별이 없습니다. 또한 부자나 가난한 자나 차이가 없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종이나 자유자나 차별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남자나 여자나 없이라고 해서 성별에 의한 차별도 없음을 말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지키는 것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모임입니다. 그래서 모임이 복된 것입니다. 그래서 모임 안에서 부자나 가난한 자의 차별이 생긴다든지 남자가 여자를 만홀히 여긴다든지 또 외국인과 내국인의 차별이 생긴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유대인은 유대인이고 헬라인은 헬라인인 것이 사실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그 신분을 인정하기 때문에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고 주님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것은 굉장한 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방인과 유대인들을 구분하지 않으신다고 예언되었습니다. 믿는 자들을 모두 구원하신다고 예수 그리스도는 전도하셨습니다. 그 제자들이 전도해서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모임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이 갈라디아 지역에는 실제적으로 차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으로 그것을 가르쳤습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이 믿음으로 구원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만약 우리들의 마음 속에 차별의 마음이 생긴다면 이곳을 읽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남자가 남자이고 여자가 여자인 것은 사실입니다. 또한 사회 내에서도 자주자와 종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름으로 상대를 존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머리 속에 주님의 이름이 있습니다. 믿는 사람의 마음 속에는 성령이 내주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몸은 하나님께로부터 성별 된 몸입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은 주님의 이름이 있고, 성령이 있고, 믿음이 있기 때문에 존귀한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이후에 어떤 일을 행하셨는가를 보면 현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을 때에 그 당시 그리스도를 믿었던 사람들 대부분이 부활하신 주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조차도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렸드랬습니다. 갈릴리 사람이었습니다. 주님께로부터 나음을 얻었습니다. 그때부터 주님을 따랐습니다. 아마 삼 년 반 정도 따랐지 않나 생각합니다. 제자들은 도망갔지만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들은 주님의 십자가까지 보고 있었습니다. 또한 무덤에 장사 지낸 것까지 보고 있었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예수 그리스도와 충분하게 막달라 마리아는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을 무척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주일 첫날에 무덤에 가보고 무덤이 비었기 때문에 막달라 마리아는 상당히 놀랬습니다. 천사의 목소리를 동산지기 목소리인줄 착각했습니다. 천사에게 주님의 몸을 어디에 두었는지 물을 정도였습니다. 이와 같이 베드로나 요한이나 막달라 마리아가 다같이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복음서에서 세번 이상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다는 것이 이미 말씀이 되어졌습니다. 어떤 때는 베드로는 마태복음 16장처럼 십자가에 못박혀서는 안된다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을 거절했을 때 주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사단아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이 완성이 됩니다. 부활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의 증거입니다. 그 말은 이해했지만 그것을 사실로서 인정하기는 어려웠드랬습니다.

누가복음 24 25~27절입니다.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이 날은 아마 주님의 부활하신 날이라고 여겨집니다마는 글로버라는 사람과 또 한 사람이 아마 이 두 사람은 부부인 것으로 보입니다만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는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이 분들은 믿는 분들이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 기대를 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분이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자들이 무덤에 가서 주님의 시체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을 들었다면서도 이 두 사람은 믿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5절을 보게 되면 의논할 때에 라는 것으로 봐서 이 주제로 서로 이야기를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때 이 두 사람은 말씀을 의논한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이야기 하며 문의할 때에 라고 한 것으로 보아서 성경을 가지고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들은 소문을 이야기 한 것으로 보입니다. 25절에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라고 하는 것을 보아서 마음이 어리석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에 더디 믿는다는 의미로 보아서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믿지 않는다는 의미인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에 이사야 같은 말씀을 알고 있었다면 금방 알터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토대로 서로 이야기 하거나 문의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7절에 보게 되면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을 가지고 아주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주 예수 그리스도는 영적인 한 교사로서 우리들을 가르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단순하게 성실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으면 주님께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것입니다. 이제 이 이야기를 듣고 숙소에 가서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를 하실 때 음식을 가지고 축사 하신 다음에 주셨습니다. 이때 눈이 밝아졌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주님 당신의 손을 제자들에게 보였다고 생각합니다. 제자들을 축복하실 수 있으신 분이셨습니다. 실제로 제자들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 마음이 뜨거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 마음이 뜨겁게 된다면 복될 것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말이죠. 좀 이상한 이야기이지만 몰라도 아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 이 장면을 보면 주님은 정말로 목자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마음 속에 의심이 있습니다. 멀어져 가는 사람에게 주님이 말씀을 사용하셔서 목자의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날에도 목자의 심정으로 우리들에게 접근해 주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을 의뢰하는 것은 복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참된 사랑을 우리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최고의 사랑은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이해하려고 하면 사랑을 받지 않으면 사랑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을 요한복음에서는 친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친구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서로 안다는 조건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사랑이 싹트는 것입니다. 사랑은 알고 그 다음에 믿고 받아들여서 이제 친구가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친척이 아닙니다. 이것은 자녀와 아내의 관계도 아닙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 서로 알고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같습니다. 사랑은 먼저 알고 느끼고 그 다음에 받아들여서 압니다. 알고 느끼고 그 다음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성립이 안됩니다. 또 세번째는 사랑은 서로 위탁한다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은 요한복음을 쓸 때 자기 이름을 요한이라고 쓰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자기를 말할 때에는 사랑받는 그 제자가 라고 말했습니다. 그대로 예수님의 사랑을 요한은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자기 이름 대신에 사랑받는 그 제자가 라는 말로 대신했습니다. 여기 누가복음 24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랑을 가지고 목자의 일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1 9절입니다. 육지에 올라 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주 예수님께서는 목자로서 준비하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 행하신 기적 중에 하나입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없어졌기 때문에 생활이 어려웠다고 생각합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선두에 서서 고기 잡으러 가자 해서 갈릴리로 갔습니다. 여러 명의 제자들이 베드로의 말에 찬성을 했습니다. 배를 타고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러나 고기를 잡지 못했습니다. 5절에 보면 주님께서 친절하시게도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일본어 성경에는 너희에게 고기가 없구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제자들을 버릴 리가 없습니다. 제자들을 주님께서 시험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더니 153마리의 물고기가 잡혔습니다. 물가에서 100M정도 되는 지점에 그물을 내린 셈이 됩니다. 이렇게 많은 물고기가 물가에 있을 리가 없습니다. 역시 주 예수님이 물고기를 몰았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먹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육지에 올라보니까 숯불이 있고 그 위에 생선도 있고 떡도 있었습니다. 제자들을 위해서 반듯하게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잡은 153마리의 일부를 가져오라고 말씀하셔서 수고에 대해서 보상도 포함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준비하신 떡과 생선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가르치셨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너희들을 위해서 예비하고 준비하는 목자다고 가르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는 제자들이 영적인 일을 충분히 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필요한 것들을 늘 준비하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이후에도 반듯하게 목자의 일을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이후에 바로 오늘까지 주님은 목자이셨습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없는 것을 주님은 알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필요한 것을 늘 준비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은 복됩니다. 없는 것을 보지 않고 하나님이 준비하신다고 하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복되고 좋은 것입니다. 부활하시고 나서 말씀을 가르치기도 하시고, 약한 자를 돕기도 하시고, 필요한 것을 준비하시면서 주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도 목자인 것을 분명히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이후에 또다시 로마서 8 34절을 보시면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주님께서는 지금 하나님 우편에 계십니다. 우리들을 중보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실제 생활과 관계되었습니다. 여기는 구원의 완전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고 죄가 있다고 해도 주 예수 그리스도는 내 편이 되어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을 보증이 되시고 중보하십니다.

좋은 예는 아닙니다만 약 4,5년 전에 미국의 어떤 여성이 사형집행을 당했습니다. 미국에서 여성을 사형 집행한 것은 드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었다고 합니다. 26살 때 자기의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어떤 부부를 살해했다고 합니다. 사형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에 성경을 읽고 믿음을 가졌다고 합니다. 완전히 변화되어서 형무소에서 돌보는 사람을 돌볼 수 있을 정도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목사와 결혼을 했습니다. 이제 여론은 그 선고를 내릴 때 어떻게 선고를 내리는지를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그 주의 주지사는 정치적인 이유로 사형집행을 하도록 결정했습니다. 이렇게 변했기 때문에 사형집행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 여론이 많았습니다. 법률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그래서 집행이 되었습니다. 34절에 보면 세상은 죄를 죄로 정해버립니다. 즉 정죄해 버립니다. 그 범죄보다도 생명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 사람이 처형이 되었어도 그 사람에 대한 대제사장이십니다. 구원받았다면 지옥 가는 일은 없습니다.

히브리서 2 17,18절입니다.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죄의 중보를 위하여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대제사장 되신 분이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대제사장 되신 분이 계시기 때문에 믿는 자는 절대로 멸망하지 않는다고 믿을 수 있습니다. 때때로 그리스도인들이 시험에서 실패하면 구원을 잃어버린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대제사장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데 때때로 우리가 자각하지 못하는 죄도 있습니다. 그것을 분명하게 중보 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쁘시다고 생각합니다. 이와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신 이후에 이런 일을 하고 계십니다.

이번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배를 받으시는 분으로서 높아지신 것을 보고자 합니다. 빌립보서 2 8~11절입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충성스럽게 인생으로서 삶을 사셨습니다. 가장 낮아진 것은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죽을 필요가 없는 분이십니다. 이 분이 병이나 사고가 아니라 범죄자로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죽음은 가장 낮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십자가 위에서 그 뜻을 다 이루셨습니다. 그러자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이분을 예배를 받으시는 분으로서까지 높이셨습니다. 지금은 주 예수 그리스도는 예배의 대상으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는 것입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예배하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는 예배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 대상으로 삼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범위가 하늘과 땅과 땅 아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있는 모든 자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하는 것입니다. 간단한 예배의 예는 예수 그리스도는 주이십니다 라고 하는 것이 예배의 간단한 표현 중에 하나입니다.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는 주라 시인해서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사실은 이 장면에서 보면 헤롯도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빌라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재판한 사람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은 꿇어야 하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지옥에 갔을 것입니다. 지옥에 간 자들도 주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모든 존재들을 주님이 지배하십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 놀랍게 가르치셨고 놀랍게 행하셨고 더 놀라운 것은 지금 현재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예배를 받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간단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주라고 해서 예배 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2008418 (김포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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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