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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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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기야와 믿음의 회복의 과정

노시로 마코토

다시 이와 같이 해서 말씀을 볼 수 있게 되어서 좋습니다. 지난 번에 방문 했을 때 보다 인원수가 좀 많아진 것 같습니다만 맞습니까? 인원이 100명 넘어가면 아마 좀 힘들 것이라 생각합니다. 일본 내에서 다이쿄쵸 모임과 교제하는 모임 중에 100명 넘는 인원을 가진 모임이 별로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일본에서 경험한 것에 따르면 인원이 많아지면 문제도 많아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아마 한국은 다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믿음의 회복 즉 믿음의 부흥이 일어났을 때 어떠했는가를 구약을 통해서 보고자 합니다.

역대하 29 1~5

1 히스기야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구 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아비야라 스가랴의 딸이더라 2 히스기야가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3 원년 정월에 여호와의 전 문들을 열고 수리하고 4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동편 광장에 모으고 5 저희에게 이르되 레위 사람들아 내 말을 들으라 이제 너희는 성결케 하고 또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성결케 하여 그 더러운 것을 성소에서 없이 하라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회복이 되었을 때 내용이 기록된 것은 방금 말씀의 히스기야 하고 요시아와 잘 아시는 느헤미야 에스라 이렇게 세 군데가 있습니다. 구약 자체에서는 믿음의 회복이라는 말이 없지마는 신약의 교훈을 받으려 한다면 믿음의 회복이라는 말이 가장 적절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 세 곳 중에서 시간 순서 상으로 가장 모범적인 것이 히스기야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3절에 보게 되면 히스기야 왕이 즉위한 원년 정월에 여호와의 전 문들을 열고 수리하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왕이 되자마자 하나님의 전의 수리를 시작했습니다. 왕이 되자마자 하나님의 전의 수리를 시작했기 때문에 시간상으로 본다면 모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물론 왕이 되는 원년에 하는 것이 모든 것이 아닙니다. 29장으로 돌아오겠습니다만 요시아 왕에 대해서 잠시 보겠습니다. 역대하 34 1~3절입니다.

요시야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팔 세라 예루살렘에서 삼십일 년을 치리하며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 조상 다윗의 길로 행하여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오히려 어렸을 때 곧 위에 있은 지 팔 년에 그 조상 다윗의 하나님을 비로소 구하고 그 십이년에 유다와 예루살렘을 비로소 정결케 하여 그 산당과 아세라 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들과 부어 만든 우상들을 제하여 버리매

요시아의 경우에는 왕이 된 지 8년만에 하나님을 구하고 그리고 십이년만에 비로소 정결케 하는 일을 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히스기야와 비교한다면 요시아는 왕이 된지 8년만에 하나님을 구했기 때문에 시간적으로는 히스기야가 빨리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요시아는 8살에 왕이 되었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8살의 왕이 지도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시아는 8년이 자난 다음에 12년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연유로 해서 시간이 모든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회복을 위해서 기다리지 않으면 안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왕이 되자마자 회복에 대한 일을 착수했기 때문에 모범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믿음의 경우에도 고칠 것이 있으면 바로 고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29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히스기야가 처음으로 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4,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이 스스로가 성결케 하는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믿음의 회복이라는 것은 먼저 자기 자신을 깨끗케 해야 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제물을 드리는 것은 제사장의 일이었습니다. 제사장이 아니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수 없었습니다. 레위 사람들은 제물을 드리는 일을 돕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 같은 특정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모든 형제자매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고칠 것이 있다면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동시에 히스기야가 행한 것은 5절 중반쯤에 나와 있습니다만 여호와의 전을 성결케 하여 그 더러운 것을 성소에서 없이 하라 여호와의 전을 오늘 날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지역교회입니다. 구약 가운데서 그러한 예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만 여호와의 전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립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하나님이 그 이름을 두셨습니다. 오늘날 모임은 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립니다. 디모데전서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모임에 두고 계십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전을 성결케 했다는 말은 오늘날 영적인 의미로 말한다면 모임을 성결케 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모임 내에 신약의 말씀에 위반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모임에서 제거해야 합니다. 마치 하나님의 전에서 그 더러운 것을 성소에서 없이하는 것처럼 모임 내에서 말씀에 아닌 것들은 없애야 합니다. 첫번째는 회복에 바로 착수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해서 모임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입니다. 이 순서에서 우리가 배울 점이 있지 않겠습니까? 자기 자신이 성결케 되어서 하나님 앞에 회복되어 있지 않는다면 모임을 깨끗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성결케 되어 있지만 성결케 되어 모인 모임 안에 없애야 할 것이 있다면 없애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히스기야의 회복은 그 순서가 우리들에게 교훈을 줍니다.

20,21절입니다. 히스기야 왕이 일찌기 일어나 성읍의 귀인들을 모아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서 수송아지 일곱과 숫양 일곱과 어린 양 일곱과 숫염소 일곱을 끌어다가 나라와 성소와 유다를 위하여 속죄제물을 삼고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을 명하여 여호와의 단에 드리게 하니

자기 자신이 성결케 되어서 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재물을 드리게 되었을 때에 히스기야는 속죄제를 드렸습니다.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이 제물을 드릴 상태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들이 드리는 제물을 하나님은 받아드릴 수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성결케 했기 때문에 제물을 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속죄 제물을 드렸습니다. 속죄제물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회개를 의미합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을 성결케 했다면 하나님 앞에 반드시 열매가 있을 터입니다. 처음에 레위 사람과 제사장들이 자신을 성결케 했기 때문에 속죄제물을 드린다고 하는 열매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우리들도 자기 자신을 성결케 했다면 삶에서 그 열매가 나타날 것입니다. 마음에 있는 것이 모양으로 밖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속죄제물을 드려서 회개했습니다. 그 다음에 무엇이 일어났겠습니까?

24,27절에 제사장이 잡아 그 피로 속죄제를 삼아 단에 드려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속죄하니 이는 왕이 명하여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번제와 속죄제를 드리게 하였음이더라, 히스기야가 명하여 번제를 단에 드릴새 번제 드리기를 시작하는 동시에 여호와의 시로 노래하고 나팔을 불며 이스라엘 왕 다윗의 악기를 울리고

속죄제 다음에 드린 제사는 번제였습니다. 번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화목의 기름이 있습니다. 속죄제는 죄를 범하면 반드시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번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원해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를 나타내는 속죄제가 있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번제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회개의 열매를 맺는다면 그 다음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열매가 나오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사장과 레위사람들은 처음에 속죄제를 드리고 그 다음에 번제를 드렸습니다.

조금 이야기가 곁길로 갑니다마는 27절에 보면 악기라는 용어가 나옵니다. 이전하고 지금 강서모임이 다른 것은 이전에는 없었는데 지금은 위에서 음악소리가 들리네요. 악기소리가 모임의 바깥에서 들어오기 때문에 강서모임에 책임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구약성경에는 악기가 나옵니다. 구약에는 악기를 가지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왜 예배 드리면서 악기를 사용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구약과 신약의 예배 방법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구약을 근거로 해서 오늘날에도 악기를 사용한다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제사제물도 드려야 합니다. 죄를 위해서 제물을 드린다면 악기를 사용하는 것이 정당화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날에는 우리가 속죄제도 번제도 실제로는 드리지 않습니다. 우리들에게는 단지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제물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요한복음 4장에서 예배가 바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수가성에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신령과 진정을 가지고 말씀하셨지 제물과 악기를 가지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바울도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신약의 말씀을 통해서 구약과 신약의 예배방법이 분명히 바뀌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왜 악기가 필요 없겠습니까? 신약성경에서 그것을 명확하게 드러낸 곳은 없습니다. 우리는 신약을 읽으면 그 이유를 분명하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바울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라고 말하기 바로 전에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말씀했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큰 차이의 하나는 우리 가운데 성령이 늘 내주한다는 것과 아닌 것의 차이입니다. 구약에는 성령이라고 나오지 않고 하나님의 영이라고 종종 나옵니다만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영이 어떤 사람에게 머물기도 하고 떠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면 삼손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나중에 사사기의 삼손에 관한 기록을 봐주시기 바랍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영이 사람 속에 내주하면서 계속 거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의 경우, 즉 다윗 같은 사람에게는 오랫동안 하나님의 영이 내주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구약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 모두에게 늘 내주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내주하십니다. 성령은 우리들의 구원의 보증이기도 하고 신약에서는 한번 내주하시면 떠나는 법이 없습니다. 이것은 신약 성도들의 가장 축복된 것 중에 하나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들에게는 성령이 늘 내주하시기 때문에 성령을 따라서 찬송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기라는 물질적인 도구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악기는 인간의 감정과 관련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할 때 마음을 쏟아서 감정을 씁니다만 우리의 기도에 우리의 찬송에 우리의 마음이 들어있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예배하러 모일 때 우리의 찬송, 우리의 기도의 그 근본은 우리의 감정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만약 말씀에 근거하지 않고 주님을 기억하게 되면 때때로 그것이 우상과 연결될 가능성이 많아집니다. 우리의 찬송과 감사는 말씀에 근거해서 성령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감정이 들어있지마는 그것은 대부분이 찬송에 한정된다고 생각합니다. 악기를 통해서 우리의 감정이 흥분돼서 찬송하는 것은 신약에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곁길로 조금 갔습니다만 악기라는 말이 나왔기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속죄제 다음에 번제, 그리고 그 다음에 무엇을 드렸는고 하니 31절에 이에 히스기야가 일러 가로되 너희가 이제 몸을 깨끗케 하여 여호와께 드렸으니 마땅히 나아와 제물과 감사제물을 여호와의 전으로 가져오라 회중이 드디어 제물과 감사제물을 가져오되 무릇 마음에 원하는 자는 또한 번제물을 가져오니

이번에는 감사제를 가져왔습니다. 속죄제는 회개의 열매이고 번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에는 감사제를 가져왔습니다. 감사제는 레위기에 보면 화목제 일부이거나 화목제와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이전에 타락되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다가 화목이 되었으므로 감사드릴 수 있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하나님과의 화목에 감사하는 제물이 드려졌습니다. 이것이 순서였습니다. 회개가 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이 있고, 그 다음에 감사가 있었습니다. 이 순서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만찬에서도 동일한 것을 드리지 않겠습니까? 물론 만찬 대 이 순서대로 기도가 드려진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마는 우리는 죄 용서 된 것을 감사합니다. 만약 우리가 죄 용서된 것에 머물러 있다면 우리의 감사와 찬송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자기가 죄 용서 받았다는 것은 자기가 중심이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번제는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번제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처럼 오늘날도 주님 앞에 감사드릴 때 주님을 중심으로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떡과 잔을 통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죄 용서함을 받은 것은 우리들이 감사할 때 제일 먼저 나오는 항목일 것입니다. 죄 용서함을 받지 못하면 감사도 예배도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나를 기념하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용서된 것을 감사할 뿐 아니라 주님을 기억하되 주님 자신을 기억하고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을 기억하는 것은 물론 십자가와 부활이 중심입니다. 그러나 주님 자신은 그것만이 아닙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천지의 창조자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전지전능하셔서 지금도 이 세계를 운영하시고 계십니다. 왕의 왕이고 주의 주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만찬에서 주님의 모든 것을 기억하면 좋지 않겠습니까? 물론 어느 주일날 한번에 모든 것을 다 기억하는 것은 안되겠지요. 주님의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의 일평생을 다 하더라도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놀라운 주님을 가르침 받으면 받을수록 주님을 더욱 놀랍게 기억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우리는 감사를 드리는데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주님을 기억하면서 감사를 드립니다. 구원은 우리들을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에 실현이었습니다. 십자가를 나의 관점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도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만찬에서 늘 이런 순서로 있다는 할 수 없지만 그러나 일반적인 순서에서는 회개가 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있고 감사가 있는 것은 좋습니다.

30 1~3절입니다.

1 히스기야가 온 이스라엘과 유다에 보내고 또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편지를 보내어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에 와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니라

2 왕이 방백들과 예루살렘 온 회중으로 더불어 의논하고 이월에 유월절을 지키려 하였으니

3 이는 성결케 한 제사장이 부족하고 백성도 예루살렘에 모이지 못한 고로 그 정한 때에 지킬 수 없었음이라

다음에 일어난 일은 유월절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오늘날에 비유하면 말씀을 실행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매일의 개인생활에서 그리고 주일날 모임으로 모여서 말씀을 실제로 실행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대로 했다라는 것이 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2월에 유월절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민수기 9 1~12절에 기록된 말씀을 근거하고 있습니다. 민수기 9 1~12절에 보면 원래 유월절은 정월에 지켜야 하지만 정월에 못했을 경우에 어떻게 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월에 유월절을 지키려 하는데 몸이 부정해져 있거나 또는 여행 중에 있으면 못 지키게 되는데 그런 사람에 이월에 지키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민수기에 기록된 대로 이월에 유월절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결코 이들의 형편에 따라서 이월을 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 자신을 생각하면 나의 형편에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것이 저에게 있음을 솔직히 말씀드립니다. 말씀에 그렇게 되어있지마는 나에게는 형편이 조금 맞지 않다. 제 속에도 그럴 경우에는 말씀도 좋지마는 내 형편을 따라서 해도 괜찮지 안겠는가 하는 생각이 저에게도 있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 때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월에 정월에 비하면 한달 밖에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단히 바빴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이 사람들의 형편에 따른다면 좀더 시간을 두는 것이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와 그 사람들은 그 기간을 연장하지 않았습니다. 말씀대로 이월에 유월절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우리들도 그렇게 한다면 복되겠습니다. 말씀에 기록된대로 충성스럽게 행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될 일이 아니겠습니까? 유월절에 대해서 또 하나 5절을 보겠습니다. 드디어 명을 발하여 브엘세바에서부터 단까지 온 이스라엘에 반포하여 일제히 예루살렘으로 와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라 하니 이는 기록한 규례대로 오랫동안 지키지 못하였음이더라

브엘세바에서부터 단까지 온 이스라엘에 반포하여 라고 했습니다. 히스기야는 자기 나라만 아니라 이웃 나라까지도 요구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순종하게 된다면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생각한다는 모본이 아니겠습니까? 다이쿄쵸모임만 말씀을 순종하면 된다라는 것이 아닙니다. 유감스럽게도 다이쿄쵸모임은 다른 모임에게 말을 걸만큼 영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만. 그러나 히스기야는 불순종하고 있는 북쪽의 이스라엘 나라에 대해서도 요구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국경이나 정치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한다면 불순종하는 사람에게 말해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북방 이스라엘은 우상숭배를 많이 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와서 말을 해도 말해도 인간적으로 소용이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이후에 보면 모두는 아닙니다마는 북방 이스라엘 사람들이 와서 유월절을 지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되지 않는다고 할지 모르지만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다 보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는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고 히스기야와 그 사람들이 행했다고 생각합니다.

12절에 하나님이 또한 유다 사람들을 감동시키사 저희로 왕과 방백들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전한 명령을 일심으로 준행하게 하셨더라 여호와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감동을 시키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순종하려고 한다면 하나님 편에서도 역사를 하실 것입니다. 말씀대로 돌아가려 한다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여기는 여호와의 말씀대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대로 즉 주님의 말씀대로 준행하는 것은 복됩니다. 가령 곤란한 일이 발생하더라도 말씀대로 하는 것은 복된 일이고 거기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8,19절입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잇사갈과 스불론의 많은 무리는 자기를 깨끗케 하지 아니하고 유월절 양을 먹어 기록한 규례에 어긴지라 히스기야가 위하여 기도하여 가로되 선하신 여호와여 사하옵소서 결심하고 하나님 곧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는 아무 사람이든지 비록 성소의 결례대로 스스로 깨끗케 못하였을지라도 사하옵소서 하였더니

믿음이 회복될 때에 문제가 생길 수가 있습니다. 믿음의 회복을 하려고 해도 충분히 행할 수 없었던 예정의 하나입니다. 어떤 이스라엘 사람들은 몸을 성결케 하지 않았습니다. 말씀대로가 아닌 상태로 유월절을 먹어버렸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려 해도 때로는 서툴게 행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여기의 경우는 무지가 그 원인이었을 것입니다. 북방 이스라엘 사람들은 말씀을 잘 가르침 받지 못했었습니다. 또한 북방 이스라엘 사람들은 남방 유다사람처럼 말씀에 충성스럽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는 그 중요성을 충분히 이해라고 있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충분하지 않고, 무지하고, 그리고 잘못하는 일이 때때로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가운데 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관대함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말씀대로 하지 않은 사람들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오늘날에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말씀으로 돌아가고자 할 때에 한 모임 내에서나 그 밖에 북방 이스라엘 사람처럼 금방은 말씀대로 하지 못한다든지 이해가 불충분하기 때문에 말씀을 순종하지 못한다든지 여러가지 경우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러할 때 우리들은 초조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것처럼 말씀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관대해야 할 것입니다. 부족한 부분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용서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처럼 참고 관대하지 못합니다. 특히 내가 옳은 길로 가고 있다고 생각해버렸을 때에는 그런 경우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관대함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 나오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돌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참고 관대함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율법에 따르면 이와 같은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끊어지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구약에서 율법은 절대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은 용서해 주셨습니다. 하물며 은혜의 시대인 오늘날에야. 우리는 더욱 관용을 가져야 되지 않겠습니까? 물론 이 관용은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히스기야가 북방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호소했던 것처럼 우리 자신과 주변의 사람들에게 말씀대로 하도록 우리가 호소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관용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히스기야의 믿음의 회복의 과정을 통해서 여러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구약에 기록된 것은 우리의 교훈을 위함이라고 신약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교훈을 따라 우리가 회복의 길을 간다면 복되지 않겠습니까? 고맙습니다.

2006 8 27 강서모임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