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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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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의 거룩에 영향을 주는 죄들과 자유

노시로 마코토

어제 밤에 이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교제할 수 있어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어제 밤에 이어서 고린도전서를 열어주시기 바랍니다. 5 1,2절입니다.

1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2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5장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다루고 싶지 않은 문제입니다. 일본에서는 냄새있는 물건에 뚜껑을 연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죄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손대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말하는 것을 우리들이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일본에서는 성경을 성서라고 하는데 이 성()이라는 뜻은 거룩하다는 뜻입니다. 성서라고 하지만 그 안에 거룩하지 않은 것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창세기를 열어보면 1장에서는 창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좀 나아가면 살인기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좀 더 나아가면 바벨탑 사건이 나옵니다. 또한 소돔에 있었던 더 심한 일도 나있습니다. 그래서 전혀 거룩한 책이 아니지 않느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잘 생각해보면 왜 성경이라고 하는고 하니 그것은 잘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책이기 때문에 그것을 성경이라고 부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기에 하나님의 책이라면 성경이라고 불러도 어울리겠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죄가 많은 존재입니다. 창조 이후에 얼마되지 않아 아담과 하와가 그 금지된 열매를 따먹은 기사가 나옵니다. 이것이 성경이 나타내고 있는 사람들의 최초의 죄입니다. 아담이 죄를 범해 죄가 들어온 후에 이 영향이 모든 사람에게 미쳤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죄인들이기 때문에 죄인들이 행하는 것은 전부 더러워져 있고 성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인간들의 행위를 의로운 관점에서 그대로 드러내었습니다. 만약 성경이 인간의 책이라면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아마 꾸몄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더러운 것들을 덮어두고 싶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의 죄를 드러내지 아니하면 인간이 구원받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의 죄를 있는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그래서 성경 속에 인간의 더러운 부분들이 그대로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간의 더러운 부분을 성경을 통해서 다룰 때는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인간의 더러운 부분을 특별히 강조할 필요는 없습니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을 올바르게 지적할 필요는 있지마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인간의 죄들을 특별히 부각시켜서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곁길로 갔다가 돌아옵니다만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다룰 때 분열(분쟁)을 다룬 다음에 음행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순서가 전부가 아닙니다마는 바울이 고린도 문제를 나타낼 때는 음행이 더 큰 문제라고 보고 나타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제가 성경을 읽을 때 5 11절에 있는 이 죄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제가 어릴 때는 음행이라는 말을 몰랐습니다. 음행 이외에 탐람이나 우상숭배나 후욕, 술취함, 토색은 초등학생이라도 어느 정도는 알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 가운데 이런 사람이 있겠는가 하고 저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현재 와서 보니까 이 말씀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5 11절에 기록된 미 모든 죄들을 한번씩 만난(당한) 적이 있는 것을 아니지만 이것은 제가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닙니다만 다이쿄쵸 모임 안에서도 11절에 기록된 몇가지가 실제로 발생을 했습니다. 말씀이 언제나 옳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필요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말씀은 인간을 잘 이해한 가운데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2천년 전 고린도에 있었던 일이 오늘날 일본에서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마 한국은 아직 이런 일이 없지 않겠는가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러나 지금은 없을지라도 말씀에 있기 때문에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대비해두는 것도 좋다고 생각을 합니다. 인간의 본질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5장의 이 가르침이 오늘날에 새롭게 적용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잘 가르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2천년 전의 그리스나 로마에 기록들을 오늘날 우리들에게 적용하기는 어렵습니다. 2천년 전에 기록된 것이 오늘날 통용된다는 것은 인간이 기록한 것에서는 별로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책이기 때문에 2천년 전에 기록되었어도 오늘날에도 우리들에게 적용이 됩니다. 하나님의 책은 망가질 수가 없습니다. 왜 이런 것들이 기록되어 있겠습니까? 여기 기록된 것들은 큰 죄인데 일본에서는 제명(우리성경=출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의 큰 죄를 지었을 때 왜 출교를 해야 되는지 적어도 그 이유가 두 가지로 기록되어있습니다. 첫번째 출교 이유는 죄를 범한 그 당사자를 위해서입니다.

4,5절에 4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5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4,5절을 더 구체적으로 생각하면 어려운 것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전부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마는 실제적인 것만 여기서 생각을 하고자 합니다. 5절에는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사단에게 내어 주었다고 하는 말은 매우 강력한 말입니다.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구체적으로는 모임의 교제에서 그 성도를 제외시킨다는 것을 말합니다. 구원받은 자로서, 형제자매로서 다루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그것이 사단에게 내어주는 것이 되겠습니까? 오늘날 하나님의 통제와 지배가 실제로 행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인 모임 밖에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공중 권세를 잡은 자 사단이 지배를 하고 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지배하고 있는 하나님의 지역교회에서 제명시키는 것은 사탄이 지배하고 있는 바깥 세상으로 내어 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하는 의미입니다. 그 다음에 보면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을 구체적으로 생각하면 어렵습니다만 구체적으로는 고린도후서 2장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2장을 보면 바울은 출교된 자를 회복시키라고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죄를 범한 자를 출교하지 않고 그대로 두게 되면 회복이 안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제 밤에 말씀드린대로 한번 구원받게 되면 그 구원은 결코 잃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생활을 잃어버릴 수는 있습니다. 죄를 범한 그대로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 앞에 그 죄를 그대로 드러내어야만 된다는 것을 요한일서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대부분의 많은 죄들은 하나님과의 문제에 있습니다. 우리들이 범하는 많은 죄들은 우리들의 마음의 문제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한 경우 하나님께 고백하고 자백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금방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를 지은 대상이 사람이라면 그 지은 죄를 보상하지 않으면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만약 형제자매들이나 세상사람들에게 금전적으로 많은 손해를 끼쳤다고 예를 들어 생각을 해 봅시다. 그 손해를 끼친 금액 전체를 다 배상해야 되는지 하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상대방이 용서해줄 수 있는 정도의 관계회복은 반드시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내가 죄를 범하여 상대방이 계속 원망하고 있다면 하나님 앞에 죄를 자복했다 할지라도 그 죄는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사람들에게 범한 죄가 언제나 모두 해결된다고 강조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받기 전에 지은 죄라던가 또 자연스럽게 주님 안에서 해결되는 죄도 있다는 것을 미리 말씀을 드립니다. 여기서 기록된 것은 모임이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처리해야 되는 하나님의 정하신 것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5절에 기록되어 있는 이 죄는 다른 죄들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기록된 이 죄들을 해결하는데는 모임이 출교를 하고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복을 하는 이런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디모데전서 1 20절에 보면 하나님을 모욕하게 하지 않게 하는 것이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회복되기 위해서는 출교라는 순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본인의 믿음의 회복을 위해서 출교가 필요했습니다.

또 하나의 출교의 목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6,7절에

6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여기는 모임에 이러한 죄들을 놓아두게 되면 죄가 모임 안에 퍼진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진다 했기 때문에 한 사람이 죄를 범했다 할지라도 그 영향이 온 모임에 미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모임에 출교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출교가 필요한 것을 바울이 말한 이유가 어디에 있는고 하니 고린도 사람들은 이러한 죄를 범한 사람들을 출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음행은 개인의 문제입니다. 이 음행한 자를 출교하지 않으면 그것은 곧 모임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개인과 모임과의 관계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물론 모임의 장로가 경찰관처럼 들고 일어난다든지 뭘 조사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알게 되는 것은 우리가 성도들이 죄를 범하는지 안 범하는지를 샅샅이 뒤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 죄를 드러내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놀랄 정도로 모임의 형제자매들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가운데 그 죄를 계속 범하고 있는 경우도 때로 있습니다. 어느 한날 그 범인이 장로 앞에 와서 그 죄를 고백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이미 그 사람의 회개의 시작입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하다면 그 죄를 분명히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 죄를 장로들이 인식한 그때부터 장로들의 책임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일본에 상황을 말씀드리면 어떤 사람들은 그런 죄가 드러나더라도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것을 감추어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그 사람이 죄를 먼저 고백해 왔기 때문에 그 사람이 회개하는 것이니까 새삼스럽게 출교하지 않아도 되지 않겠는가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어제 말씀드린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형제자매들을 사랑하는 우선순위를 잘못 짚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형제자매들을 사랑하는 사랑보다 먼저 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거룩이 유지되지 못하고 모임의 질서가 유지되지 못합니다. 인간을 우선시한다면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사람의 감정을 우선시하는 일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때도 장로들은 말씀을 올바로 분별해서 말씀대로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저는 강조하고자 합니다. 바울은 그것 때문에 고린도전서 5장을 기록한 것입니다. 모임이 주님 앞에서 복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말씀을 따라 분명하게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여러 문제들이 일어납니다. 인간적인 감정에 휩쓸려 갈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장로의 자녀가 음행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 경우에 장로가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부모는 자식을 사랑합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보다도 우선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 자신을 생각하면 하나님 앞에 저에게 그런 시련을 만나지 않도록 기도하고 싶습니다. 아무 일도 없을 때 말씀대로 따르라고 말하는 것은 쉽습니다. 실제로 문제가 내 몸에 미쳤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는가 어떤가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11절을 보겠습니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여기에 여러가지 문제가 기록되어 있지마는 경험 따라 말씀드리면 어떤 죄가 실제 성도들 가운데 많았는가 하면 이 6가지 가운데 술취하는 죄가 성도들 가운데 제일 많았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음행 쪽에 수가 점점 늘어나는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과 캐나다 쪽에도 이야기를 들어보면 음행 쪽에 숫자가 늘어난다고 듣고 있습니다. 좋은 것들도 구미(歐美)로부터 유입됩니다. 예를 들면 매키온 형제님이 일본과 한국을 방문해서 좋은 교제를 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좋은 일입니다. 역사를 보면 유럽과 미국으로부터 나쁜 것들도 많이 들어왔습니다. 들어왔다는 것이 합당한 표현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미국과 유럽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머지않아 일본에서도 일어날 것입니다. 아마 한국도 예외가 아니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물론 제가 예언자가 아니기 때문에 단언할 수가 없지마는 일본의 현상을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어느 때나 어느 나라에서나 말씀이 기준이라는 것을 강조드리고 싶습니다. 바울은 음행에 대해서는 6장 후반에서 다시 한번 지적하고 있습니다. 6 18~20절입니다.

18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18절에 기록한 대로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몸은 성령의 전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제 교제했던 3장에서는 모임이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는 우리들의 몸이 성령의 전이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우리들 몸에 성령이 와 계시기 때문에 우리들의 몸은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우리의 몸은 존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값으로 산 것이기 때문에 이제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존귀한 성령이 거하시는 몸에 죄를 범하는 것을 좋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젊은 형제자매들이 이러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를 드립니다마는 20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복되겠습니다.

5장 죄의 문제에서 6장으로 옮기고자 합니다. 6 1,2절입니다.

1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이제 동료 가운데 분쟁에 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라는 말을 볼 때 그리스도인 사이에 문제가 발생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장에 나오는 분쟁과 같은 분쟁이 아닙니다. 6 4절에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장에 있는 분쟁은 영적인 것으로서 모임 안에 있는 분쟁이었습니다. 영적인 것을 육신적으로 다루었을 때에 생길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6장의 문제는 세상 사건으로 일어난 문제였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돈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완전히 돈의 문제가 아니라 할지라도 돈과 관계되는 물질적인 문제였다고 생각합니다. 고린도 모임에는 어떤 형제가 어떤 형제를 재판정에 고소(송사)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1절에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라는 말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불의한 자들이라는 것은 나쁜 사람을 말하기보다 이 세상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인 가운데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해결하라고 바울이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약 형제간의 문제가 있다면 그 모임의 장로가 그 중간에서 중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18장에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장로에게 말하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먼저 두 사람끼리 해결하도록 하고 안되면 장로에게 말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중재하는 사람의 대표적인 사람이 장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는 장로가 아니면 안된다고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장로가 아니더라도 여기 기록한 그러한 형제가 있다면 중재해도 지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일로 그리스도인간에 문제가 생길 때에는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해결하라고 바울은 권하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더 중요한 것은 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만약 물질 문제라면 차라리 불의를 당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불신자들끼리라면 불의를 당하는 것이 절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피차간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기에 문제를 하나님께 맡길 수가 있습니다. 자기가 피해를 당하더라도 넓게 그 형제자매들을 송사하지 않고 넘어갈 수가 있겠습니다. 여기에는 형제자매들에 대한 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물론 자신에게 관계된 일이라면 올바른 것을 끝까지 주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진리에 관한 것이라면 양보할 수도 없고 타협할 수도 없습니다. 만일 나 자신에 관한 문제라면 상대방이 틀리고 내가 옳더라도 내가 옳음을 주장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만약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행동한다면 상대방이 잘못되고 내가 옳을지라도 상대방이 회개하기를 기다리면서 고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갖게 되면 내가 옳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지나보면 옳지 않은 것이 있다는 것을 종종 알게 되는 때도 있습니다. 우리들은 대부분의 경우에 문제가 생기면 내가 옳다고 일방적으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자기가 옳지 않은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만일의 경우에 자기를 옳다고 생각하지 아니하고 불의를 당한다고 생각하면 상황을 올바르게 볼 수 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불의를 당한다는 생각으로 그 문제에 종종 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원칙적으로 형제자매들 사이의 문제입니다. 상대가 믿지 않는 자라면 문제가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원칙이 이러하기 때문에 상대가 믿지 않는 자라도 이 원칙을 취하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유산 상속의 문제가 발생했다고 생각해 봅시다. 유산의 경우에는 금액이 많으면 많을수록 문제가 커집니다만 금액이 작더라도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법률은 모릅니다만 일본의 경우에는 만약에 부모님이 계시고 자녀가 있다면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그 상속의 50%는 어머니가 갖고 나머지는 자식들이 균등하게 갖는 것이 일본의 법률인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법률이 그렇게 정해져 있기 때문에 자기가 취할 권리들은 각각 그렇게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권리를 행사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권리를 자기 형제에게 양보하므로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믿지 않는 자라도 불의를 당한다고 하면 이상하지만 이와 같이 양보하므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일본에는 야쿠자라는 깡패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문제는 양보하게 되면 더욱더 양보를 요구하면서 덤벼든다고 합니다. 그런 경우에는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경찰에 신고를 한다든지 고소를 하는 방법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또한 어떤 경우에는 믿는 자로서 불의를 행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법원에 고소를 하여 그것을 드러내어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상대가 믿지 않는 자라면 주의를 해야 하지만 만약에 상대가 믿는 자라면 말씀에 기록된 대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말하는 것은 쉽습니다. 만약 제가 유산을 상속받을 입장에 있다고 가정을 합시다. 저의 아버지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만 아버지가 가령 재산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말한다면 일본의 성도들 내지는 한국의 성도들로부터 받은 돈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하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쓰게 되는 것이 올바르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그것이 전혀 현실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제가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만약 실제 문제가 발생해가지고 제가 마침 그때 돈이 필요하다고 하는 경우가 되었을 때에 과연 지금 말한 것처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것도 하나님께 기도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해달라고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5,6장에 기록된 말씀은 대단히 엄숙하고 엄한 말입니다. 참으로 자신이 실행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바리새인처럼 형식적으로 지키면 되다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스스로가 행하여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로 실행한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때로는 인간의 상식적인 상정에 위배되기도 하고 또한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가운데 비로소 실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남은 시간 조금 더 앞으로 진행을 시키겠습니다만 7장부터 10장까지는 선택의 자유의 문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강 말씀드리면 6장까지는 하지 않으면 안되는 문제입니다. (즉 선택의 문제가 아닌 반드시 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 있고 그것을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6장까지의 말씀입니다. 7,8장은 자유의 문제인데 (바꾸어 말하면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문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자유의 문제를 통해서 가르침 받는 것은 이 자유를 올바르게 사용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자유이기 때문에 내 이익을 위해서 사용해도 되느냐에 대해서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7장은 결혼의 문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결혼은 자유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결혼은 해도 좋고 안해도 좋은 것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은사의 문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혼은 안해도 되는 은사를 가진 사람은 안해도 된다고 말씀하셨고 또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결혼은 해도 좋고 안해도 좋지마는 그것을 올바르게 사용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로 나아가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7 35절에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하게 하여 분노함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하게 하여 분노함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결혼하지 않은 사람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만 자유를 올바르게 사용하여 자신을 위하여 사용하지 말고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결혼은 음행 문제와도 관련된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전에 결혼은 상당히 수준이 높은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7 2절에는 음행을 피하기 위해서도 결혼하라고 말하기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는 이전에 이런 동기는 정말로 수준이 낮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고 바울은 인간의 연약한 점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정욕이 불일듯할 정도라면 바울은 결혼을 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약점을 올바르게 직시하게 되면 이 말씀을 인정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결혼을 하는 것은 좋지마는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라고 말씀을 요약할 수가 있겠습니다.

8장은 우상에게 드린 식물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우상의 제물은 먹어도 좋고 안 먹어도 좋은 문제가 안 된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상제물을 먹는 것으로 형제자매들을 실족시키면 그것은 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기를 먹는 것은 자유지만 그것을 가지고 성도를 실족시키는데 쓰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어찌해도 좋지마는 올바로 사용해서 형제자매들에게 덕을 세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9장에서는 복음 전하는 자가 물질적인 보수를 받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 전하는 자가 물질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권리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권리가 있지마는 그 권리를 선택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포기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9 23절에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복음에 장애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받지 않은 것이 9 12절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 자유 문제를 정리한 것이 10 31,32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자유 문제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이 말씀으로 요약될 수 있겠습니다.

5,6장에서는 죄의 문제 즉 실패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모임이 취하지 아니하면 안되는 문제도 말했습니다. 말씀을 순종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오는 일이지만 행한다면 복이 되겠습니다. 7장에서 10장까지 가르치는 바대로 자유를 올바르게 사용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한다면 복이 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2006 8 30 김포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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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