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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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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와 양들

노시로 키요지

요한복음 101~4, 7~9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10장은 대목자장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기록된 장입니다. 어제 장로에 대해 말씀드린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장로, 감독, 목자는 동일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모임에는 목자가 있습니다. 목자장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여기서는 주 예수님이 목자이신 것을 구체적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문을 통해서 들어오셨습니다. 1절에 보면 양의 우리에 들어간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문은 무엇이겠습니까? 알기 쉽게 말한다면 말씀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의로운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문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3절에 나오는 문지기는 누구이겠습니까? 저는 세례요한이라고 생각합니다. 7절의 양의 문은 유대인이 있는데 들어간 것이라고 봅니다. 9절에 내가 문이니의 문은 구원의 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문을 통하여 들어가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을 갖는 순간에 구원을 받습니다. 저는 믿는 순간에 그 문을 통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누구든지 출입이 가능합니다. 이것은 자기 마음대로 무엇을 해도 된다는 자유가 아닙니다. 주님 안에서 자유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은 자유를 오해해서 무엇이든지 자기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자유를 주셨지만 복음에 순종하라 또는 복종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가 구원받은 복음을 무시하고 생활하게 되면 기준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왜 로마서를 기록했는고 하니 복음에 순종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로마서 처음과 마지막에 보면 일본어 성경에는 믿음의 순종(개역성경에는 믿어 순종케 하려고)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믿어 라는 말은 복음이란 말로 바꾸어도 틀리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복음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꼴을 주셨습니다. 꼴은 가르침입니다. 음식이기 때문에 영의 양식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돌보는 목자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평강과 자유를 주시고 그리고 양식을 주셨습니다. 또 하나 목자가 하는 일은 적으로부터 지키는 것입니다. 대적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목자는 그 대적으로부터 지킨다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최고의 목자가 주 예수님이기 때문에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렸습니다.

15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목숨을 버리셔서 우리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늘에 가셔서도 계속 양들을 먹이신다는 것을 누가복음 마지막 장에서 우리들은 읽을 수가 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주님의 부활을 믿은 제자는 그 시점에서는 한 사람도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마리아도, 베드로도 믿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도 제자들 중에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게 기름을 부은 그 여자 한 명만이 주님의 부활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향유를 주님께 부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서로 대화를 나눴는데 어쩌면 토론을 한 듯 합니다. 토론을 통해서는 진리를 알 수 없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토론을 하면 진리를 발견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토론을 통해서는 진리가 발견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두 사람 사이에 나타나셔서 성경을 가지고 잘 설명해 주셨습니다. 말씀으로 목회를 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집에 도착했을 때 눈이 열려서 부활하신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목회입니다. 믿음이 없는데서 믿음으로 인도하는 그러한 큰 일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사람의 마음을 바꾼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복음만이 사람을 바꿀 수 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목숨을 버려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렇더라도 분명하게 목회를 하셨습니다. 또 한가지 부활하신 이후에 도마에 대한 주님의 예언도 하나의 목회였습니다. 차가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 도마에게 주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도마의 눈높이까지 낮아지셔서 밝혀주셨습니다. 그래서 못 자국에 손을 넣어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실은 주님이 꾸짖어도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도마의 입장까지 내려가셔서 믿지 않는 도마를 믿음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도마가 한 말은 나의 주시요 나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나의 주시요 나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은 가장 간단한 예배의 말인 것입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라고 인정을 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예수님이 참으로 사랑의 분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양들을 공격합니다. 실제로 어떤 목자가 양 백여 마리를 치고 있었습니다. 실제 목자가 양을 쳐보고 양은 참으로 약하고 어리석다는 것과 빨리 걷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장이 더딘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한꺼번에 왈칵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왜 양이 어리석겠습니까? 돌아가는 길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에서 한 마리가 나가면 우리 밖으로 따라나가서 계속 길을 헤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실제로 양들을 모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는 목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양들에게는 대적이 있는데 바로 마귀입니다. 또한 거짓 선지자, 거짓 교사도 양의 대적입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는 육이 있는데 육도 우리의 대적입니다. 이 대적들은 양을 잡아 먹어버립니다.

사도행전 20 29,30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이것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가르친 말씀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을 떠나서 앞으로 계속 여행을 합니다. 내가 떠난 후에 너희들 모임 안에 흉악한 이리가 들어와서 공격을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하나는 모임 안에서 일어난다고 말했습니다. 바깥에서 오는 것은 이단이라든가 잘못된 가르침들이 들어와서 성도들을 유혹합니다. 가장 어려운 것은 내부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이 사람들을 끌어서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안팎에서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모세는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비난을 받았습니다.

민수기 12 1,2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미리암은 누나였고 아론은 모세의 형이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동일하게 모임 안에 있는 내부 사람이 이러한 잘못을 저지를 수가 있습니다. 이 경우는 과거의 일이었는데 모세가 지금 현재 나쁜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스 여자를 취해서, 어찌해서 과거의 죄를 심판 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들으시고 모세를 변호하셨습니다. 3절을 보면 모세는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과 직접 교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7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모세의 일은 충성되었습니다. 참으로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일했습니다. 중보를 하였습니다. 기록상으로 모세가 범한 죄는 하나였습니다. 반석을 두번 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거룩을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에 40년간 수고하였지만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실패하였지만 그 외에는 잘못이 없었습니다. 누나 미리암과 형 아론은 모세를 비방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매우 화를 내시며 미리암에게는 문둥병이 발하게 하셨습니다. 15절에 의하면 미리암이 진밖에 있는 동안에 백성은 진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7일 동안 하나님의 백성은 진행치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미리암의 문제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실제 목자가 양들은 어리석고 연약하다는 것을 말씀드린대로 우리들은 육이 있기 때문에 이런 면들이 있습니다. 보통 우리가 비방할 때 행동으로 비방하는 것이 아니라 말로 비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창세기에 노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창세기 9 23,24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것을 보면 대수롭지 않은 문제 같지만 사실은 큰 문제였습니다. 함은 아버지가 옷을 벗고 자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형제 두 사람에게 알리러 갔습니다. 셈과 야벳은 이 이야기를 듣고 뒷걸음을 쳐서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문제가 있을 때 사람들에게 알려서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사람의 죄를 덮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교제에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실패와 약점들을 퍼트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몸을 덮기 위해서 짐승을 죽였습니다. 죄를 범한 아담의 그 몸이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옷을 입히지 아니하면 아담과 교제할 수 없었겠지요? 물론 그 가죽으로 된 옷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로마서에 나오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것은 옷을 입힘을 받았다는 말과 같습니다. 또한 죄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 덮음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은 그 죄를 샅샅이 드러내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서로 물고 먹으면 서로 망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서로 물고 먹는 싸움 가운데서는 세움을 입는 것은 없습니다. 나눈다 또는 싸움이라는 말이 적절하지 않지만 다투게 되면 그 결과는 나쁜 것입니다. 함의 이 작은 행동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덮어주었습니다. 어찌해서 함은 저주받지 않고 함의 자손이 저주받았는지 알지 못하지만 이 벌은 컸습니다. 함의 후손들이 계속 섬기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서로 다투게 되면 집은 세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들은 어떤 면에서 이런 어리석은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육은 믿는 자의 육이나 믿지 않는 자의 육이나 동일합니다. 여수에서 육에 대해서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그 때에 예로서 베드로와 유다를 비교했습니다. 유다는 처음부터 믿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경건한 제자였습니다. 둘다 같은 일을 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베드로도 거짓말을 하며 주님을 저주하며 그리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주의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육이 완전히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삼층하늘에 끌려 올라간 적이 있습니다. 특별하게 복을 받은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그 놀라운 낙원의 경험을 한 바울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교만해진다고 하나님이 생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일평생 동안 사단의 가시를 바울의 몸에 주셨습니다.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그릇으로 쓰임받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그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세 번이나 그것을 제거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주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바울에게 설명하셨습니다. 그 가시도 은혜였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바울에게도 그것을 자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도행전 20장에서 대적이 바깥에서 들어오고 그 안에서도 일어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디모데서를 읽어보면 디모데는 에베소 모임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예언한 데로 디모데가 에베소에 있을 그 즈음에 이상한 사람들이 일어난 듯 합니다. 즉 바울이 예견한 데로 그러한 사람들이 외부에서 들어오고 내부에서 일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복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또한 디모데서를 보면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미 일어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디모데에게 돈을 사랑치 말라고 가르쳤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은 디모데서가 기록된 것과 사도행전 20장 사이에는 시간적인 간격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디모데는 젊은 나이에 상당히 어려움을 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연유로 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주의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또한 여러분들은 장로가 완전하도록 요구합니다. 물론 양들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이 장로들입니다. 말씀을 가르치고, 또한 여러 일 매듭매듭마다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장로들이 비난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 비난이 일어날 때 당을 짓는다든지 비난하는 사람을 따른다든지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완전하지 않지만 주님이 세웠다는 것입니다. 장로가 완전하기 때문에 나는 그 장로의 말을 듣는다, 그 장로가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그 말을 듣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은 성립되지 않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3 2,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제가 아는 그리스도인의 자녀는 영어선생을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영어공부를 하지 않는다고 고집을 부리며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어리석습니다. 영어선생이 싫다고 영어공부를 하지 않으면 손해를 보기 때문에 선생이 싫어도 영어공부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맞지 않기 때문에 그 선생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손해 보는 사람은 그 당사자입니다. 여기서 주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했습니다. 23장 전체가 그렇습니다. 그들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행하는 바는 본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어떤 사람들은 모릅니다. 저희와는 교제를 갖지 않지만 전도에 열심인 기독교 교단이 있습니다. 그 교단은 이렇게 말하는데 학교 선생들이 담배도 피고 술도 마시며 진화론도 가르치기 때문에 학교에 보내면 안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일본 문부성이 이 이야기를 듣고 화를 내었습니다. 의무교육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동경에 있는 다마 대학이라는 대학에 분교를 허락 받아가지고 그들만의 교육제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교단 사람들이 채용한 선생들에 의해서 가르치는 조직입니다. 만약에 선생이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진화론을 가르친다고 해서 그 교과의 내용자체를 하지 않는다면 여기서 말씀하는 말씀과 똑 같은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장로의 결함이 있다고 해서 그 장로가 가르치는 말씀을 거절하면 그것은 이와 같이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마귀는 활동하는 것입니다. 장로형제와 모임의 형제들의 일치야말로 축복의 출발점입니다.

디모데전서 5 17

잘 다스리는(일본어성경=잘 지도하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18절은 구약 성경을 통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곡식을 밟아 떠는 소는 힘든 일을 하기에 그 곡식을 아무리 먹어도 괜찮습니다. 그 일에 대한 보상입니다. 그래서 장로들은 존경을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19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 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

그래서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 세 증인이 없으면 받아드려서는 안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장로가 완전한지 완전하지 않은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일로 인해서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 12~14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13절에서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존경하며)라고 했습니다. 역사는 일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완전한가 아닌가가 아니라 일을 하기 때문에 귀히 여기라는 뜻입니다. 신분 때문이 아니라 일 그 자체 때문에 귀히 여기라는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13절에 너희끼리 화목하라는 말을 보아서 문제가 일어날 소지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장로들은 어떤 일들에 대해서 예견을 하는데 이렇게 되면 이렇게 되겠구나 하는 일은 장로들의 일 중에서 중요한 일중의 하나입니다. 바울도 예견을 잘 했습니다. 고린도전서를 읽어보면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는 일부러 바울 스스로가 침례를 많이 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동안에 바울파가 생길 것을 예견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고린도 모임에는 그리스도파, 바울파, 아볼로파라고 하는 파가 생겼습니다. 또한 고린도 성도들로부터 일부러 물질적인 도움도 받지 않았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경제적으로 욕심쟁이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앞으로 바울을 비난하며 바울은 돈 때문에 전도하지 주님 때문이 아니라고 비난할 비난을 예견했습니다. 그러한 것들을 예견해서 고린도로부터는 물질을 받지 않았습니다. 데살로니가에는 빈둥거리면서 일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을 일부러 직접 일을 하면서 전도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모본을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임에서 많은 면에서 이렇게 되면 이렇게 되겠구나 하는 많은 것들을 꿰뚫어 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예를 들면 어떤 형제나 자매를 비난하면 어떤 결과가 되겠습니까?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이니까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빌립보서 19,10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이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은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람에 대한 무엇이든지 다 받아들인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지식이라는 말은 말씀이라고 바꾸어도 틀림이 없습니다. 또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이로 말미암아 사랑이 더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일본어 성경에는 지식이 참된 지식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은 종종 사랑에 대해서 감정적으로 목회하는 사람들에게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참 지식과 총명(일어성경=識別力)으로 말미암아 사랑이 점점 풍성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 자매이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허락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의 실천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목회는 참된 사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형제 자매의 교제는 중요합니다. 표면적이 이유로 말미암아 한편으로 기울어져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는 진실함을 가지고 분별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룟유다가 처음부터 믿지 않는 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12명 전체를 동일하게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가르침을 내실 때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처음부터 가룟유다를 알고 계셨다고 제자들에게 일부러 가르치셨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가룟유다가 배반할 것이라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배반하러 나가는 가룟유다가 명절에 쓸 물건을 사러 나가는 줄 생각했지 배반할 자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가룟유다가 배반할 자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왜 가르치셨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가룟유다가 배반할 것을 몰랐다고 할 것 같으면 다른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어리석다고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분이십니다. 끝내 배반할 유다를 전혀 차별하지 않고 주님은 사랑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모를 정도로 완전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나는 처음부터 알았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어리석은 분이 아니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드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유다가 실족을 해도 다른 제자들은 그것 때문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잘못이라고 제자들이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보이시기 위해서 주님은 일부러 가룟유다를 택하시고 그것을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자들의 목회를 위해서 주님은 마지막에 유다에 대해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목자장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현실적인 목자인 장로들은 결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임에 은혜와 평강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결함 있는 장로라도 모임의 질서를 위해서 장로들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모임이 장로가 없으면 모임이 아니라고 어떤 때는 생각을 합니다. 모임은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모임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실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독재체제입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목자들은 주 예수님의 하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 목자들이 일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배려하는 것입니다. 실제 목자들인 장로들이 안 좋은 면이 있다 할지라도 마치 주님이 베드로에게 가르치셨던 것처럼 베드로가 핍박을 받은 이후에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요한을 돌아보고 주여 저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주님은 네게 무슨 상관이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이 앞으로 박해를 받던 아니던 너와는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시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이 사람이 어떻게 될까?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각각에 대한 주님의 뜻이 다를 수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자기 책임인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요한은 어떻게 되던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다른 사람의 믿음 생활에 대해서 베드로처럼 말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요한도 베드로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랐습니다. 이것도 교제할 때 고려해야 할 사항 중에 하나입니다. 목자들과 양들에 대해서 교제를 드렸습니다.

(2009년 10월24 부산명륜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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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