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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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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 말기의 믿음의 사람들

노시로 키요지

오늘은 구약성경을 통해서 몇가지 인도받고자 합니다. 사사기 17 1~6절입니다.

1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더니

2 그 어미에게 이르되 어머니께서 은 일천일백을 잃어버리셨으므로 저주하시고 내 귀에도 말씀하셨더니 보소서 그 은이 내게 있나이다 내가 그것을 취하였나이다 어미가 가로되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3 미가가 은 일천일백을 그 어미에게 도로 주매 어미가 가로되 내가 내 아들을 위하여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 차로 내 손에서 이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이 은을 네게 도로 돌리리라

4 미가가 그 은을 어미에게 도로 주었으므로 어미가 그 은 이백을 취하여 은장색에게 주어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었더니 그 신상이 미가의 집에 있더라

5 이 사람 미가에게 신당이 있으므로 또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제사장을 삼았더라

6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사기는 한편에서 현재의 모임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 당시의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는 왕이 없었습니다. 사실은 하나님이 왕이셨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은 사사라고 하는 사람이 다스렸습니다. 어떻게 다스렸는고 하면 왕은 하나님이시고 모세가 준 율법에 따라서 사사가 다스렸습니다. 사실은 사람의 지배가 없었던 것은 축복이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인간의 조직이 없었으므로 축복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주 예수 그리스도와 말씀으로 모임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인간이 만든 교회는 카톨릭처럼 규율이 있습니다. 교의 즉 교리를 지키지 아니하면 가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을 알고서 믿었습니다. 성령이 주어졌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다라서 기쁨으로 믿음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카톨릭에서는 죽기 전에 어떤 예식을 행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위독한 신자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속도위반을 해도 그때는 교통위반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카톨릭에는 7가지 성사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안 지키면 연옥으로 가버립니다. 그리고 신부에게 죄 고백을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가 용서되지 않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카톨릭 신자는 교회의 노예가 되어버립니다.

신약의 믿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기쁘게 자유롭게 주님을 섬길 수가 있습니다. 사사기 시대에도 조직이 없었으므로 우리가 자유가 있는 것처럼 어떤 면에서 이와 같은 자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6절에 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사사기 말기의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에 어떤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미가라는 사람이 어머니의 은 일천 일백개를 훔쳤습니다. 미가가 그것이 잘못인 줄 알고 어머니께 그것을 가지고 갔습니다. 이 때 어머니의 조치가 잘못되었습니다. 이 어머니의 머리 속에는 모세의 십계명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모세의 십계를 통해서 이 아들을 인도하지 못했습니다. 3절에 보면 이 어머니는 여호와께 성별되게 드려서 내 아들을 위해서 신상을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아들이 어머니게 돈을 돌려드렸지만 이 어머니는 그 은 중에 이백을 취해서 신상을 만들었습니다. 이전에도 우상숭배가 있었지만 이처럼 우상을 직접 만들어서 숭배하는 것은 없었습니다. 모세의 십계명으로 말하면 제1계명에서 3계명까지 어기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나쁜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이 아니라고, 부인하고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삼는 것을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십니다. 물론 이방에는 그런 우상이 있었다고 봅니다. 이 사람은 그 이방을 흉내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은 레위지파로서 아론의 후손이 아니면 안됩니다. 이 어머니는 그 아들을 제사장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10절로 나가면 미가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와 함께 거하여 나를 위하여 아비와 제사장이 되라 내가 해마다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식물을 주리라 하므로 레위인이 들어갔더니 어떤 곳에서 레위인이 미가가 있는대로 왔습니다. 미가는 레위인이 왔으므로 제사장을 삼자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고용된 목사의 전형입니다. 인간이 임명을 한 것입니다. 해마다 은 열과 의복과 식물을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오늘날의 제사장 제도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월급으로 고용된 성직자와 같은 것입니다. 참으로 어둡습니다.

18 18절을 보게 되면 그 다섯 사람이 미가의 집에 들어가서 그 새긴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과 부어 만든 신상을 취하여 내매 제사장이 그들에게 묻되 너희가 무엇을 하느냐 여기에 단 지파가 자기들의 영토를 넓히기 위해서 다가왔습니다. 미가집에 와보니 신상이 있으므로 그 신상을 가져다가 이번에는 단 지파의 신상으로 삼자고 생각했습니다. 19,20절을 보면 이 단 지파 사람이 미가집의 제사장이 되는 것과 단 지파 전체의 제사장이 되는 것 중 어느 것이 좋으냐고 묻고 20절 뒤에 보면 이 제사장이 마음이 기뻐하여 그 백성 중으로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작은 한 집의 제사장에서 한 지파의 제사장이 되었으므로 소위 말하는 출세를 한 것입니다. 제사장이 마음에 기뻐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 율법에 따라서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144,000명이 택함을 받는 기사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해석입니다만 그 144,000명 중에는 단 지파가 빠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에스겔서를 보면 그 해석이 옳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에스겔에는 단 지파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 지파가 이스라엘의 12지파 중에 우상, 신상을 경배했다는 이유 때문에 불명예스런 것을 가져왔습니다. 이것이 이 당시의 영적인 상태였습니다. 뒤를 읽어나가면 결혼도 많이 문란해 있는 것을 봅니다. 뒤로 나가면 약탈 결혼까지 성행합니다.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혼란스러웠습니다. 21 25절을 보면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 사람들은 자기들의 눈으로 보는 관점으로 봤지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지를 못했습니다.

이 어두운 사사기 가운데서도 뒤에 룻기가 나오는 것처럼 놀라운 하나님의 시각을 가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룻에 의해서 나타난 믿음과 헌신은 놀라운 것입니다. 룻기 1장에 보면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베들레헴에 살고 있었지만 영적으로 매우 약해졌습니다. 아마 이 시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 베들레헴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준 땅이기 때문에 아무리 기근이 생겨도 부족함이 없는 땅입니다. 그래서 기근이 들어 양식이 없으므로 저주받은 땅인 모압으로 가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엘리멜렉은 참으로 처참한 결과를 맞이했습니다. 두 아들도 죽고 자기도 그 땅에서 죽었습니다. 아내인 나오미는 큰 슬픔을 경험했습니다. 남편도 죽고 두 아들도 죽었습니다. 이것은 엘리멜렉이 씨를 뿌린대로 거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의 모형입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이방인이 구원받는다고 하는 현재 시대의 하나의 모형입니다. 로마서에 그 원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멜렉의 불순종으로 이방여인인 룻이 축복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그 이름이 올라와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인 룻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여기에서 놀라운 것은 룻은 자기의 모든 것을 그 시어머니에게 바쳤습니다. 인간에게 바친다는 의미에서 룻은 최고였습니다. 룻은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사랑했습니다. 나오미는 실패자입니다. 룻은 나오미 속에서 어떠한 희망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나오미는 다시 아들을 낳아서 룻의 남편을 만들 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재산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적인 희망은 룻에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가지고 있는 것은 나오미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뿐이었습니다. 룻은 자기 고향과 부모를 버리고 외국으로 가는 셈입니다. 자기 가족과도 헤어지고 민족과도 헤어지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로 가게 되면 말도 달라지는 법입니다.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나오미 밖에 없습니다. 룻은 말하기를 어머니의 백성이 내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죽기까지 내가 어머니를 떠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룻은 모압에서 생활할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돌아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룻은 모든 것을 나오미에게 바쳤습니다. 만약 룻을 예수 그리스도 앞에 놓고 생각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마치 룻처럼 우리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당신 자신을 위해서 사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시면서 우리들을 위해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흔히들 전도자들을 헌신자라고 하지만 참된 헌신자는 바로 이것입니다. 이와 같이 놀라운 기록이 사사기 속에 있습니다.(룻기는 사사기에 포함되는 기록입니다) 영적으로 문제가 있었고 기근이라는 문제가 있었지만 이와 같이 믿음의 놀라운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1 1절로 가겠습니다.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자가 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더라 여기에 엘가나라고 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엘레멜렉이 살고 있던 그 근방에 사람입니다. 엘가나는 기근이 일어나더라도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더라도 모압으로 가지는 않았습니다. 모암은 저주 받은 땅입니다. 그기에 양식이 많이 있어도 엘가나는 모압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우리들도 믿음의 눈으로 그런 것들을 판단할 필요가 있습니다. 엘가나는 두 아내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창세기에 보면 일부일처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허락하신 가운데 일부다처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아내를 여럿 거느린 사람들은 그 사람 스스로가 고통을 겪었습니다. 아브라함도 하갈을 아내로 맞이했기 때문에 14년간 가정에 혼란이 생겼습니다. 야곱은 4명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여러가지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일단은 허락은 하셨지만 그러나 그 보응을 거두지 않으면 안됩니다. 3절에 보면 매년 실로에 올라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려고 이것은 엘가나의 가장 뛰어난 점입니다. 매년 그렇게 했습니다. 엘리멜렉은 모압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배하러 왔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는 저주받은 땅에서 죽었습니다. 사사기에서 조금 전에 보았던 것처럼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타락해서 단 지파가 우상을 섬기는 그러한 어두운 시대였습니다. 엘가나는 그러한 환경에 있으면서도 매년 실로에 하나님을 경배하러 갔습니다. 엘가나의 두 아내 즉 한나와 브닌나가 있었는데 브닌나에게는 자녀가 있었습니다. 브닌나는 한나를 괴롭혔습니다. 그래서 그 가정에 문제가 있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엘가나는 가정에 문제가 생겨도 예배하러 가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은 때때로 사회적인 문제나 가정적인 문제 때문에 하나님께 예배하러 가지 않는다는 일이 발생합니다. 오늘날로 치면 너무 바빠서, 세상이 변했다든가, 그러나 아무리 변해도 주님 앞에 예배하러 나와야 합니다. 그 점에 있어서 엘가나는 놀랍습니다. 가정에 문제가 있어도 하나님을 제일로 삼고 그 문제에 휘둘리지 않았습니다. 한나와 브닌나를 데리고 하나님을 경배하러 갔습니다.

3절을 보게 되면 이 사람이 매년에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거기 있었더라 왜 이것이 기록되어 있는고 하니 실로에 회막이 있는데 그기에 사람들이 경배하러 출입을 했습니다. 그기에 하나님의 성막이 있는 그 자리에 아주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이 거기에서 제물을 횡령하고 있었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아주 나쁜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엘가나는 거기에 가면 나쁜 제사장이 있으니 나는 안 가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모임에 가면 문제가 있다고 하면서 모임에 나아가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을 해봅시다. 그런 문제에 휘둘려서 모임에 가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분쟁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또한 모임에 자기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 발생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은 경배하고 예배합니다. 하나님의 증거를 증거합니다. 모임에 모여서 서로간의 덕을 세웁니다. 문제를 보고 모임에 가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브닌나와 한나 사이의 문제는 교만이 문제였습니다. 엘가나는 그런 문제가 있어도 매년 하나님을 경배하러 가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엘가나로부터 그런 태도를 배울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여기는 한나가 놀라운 자매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남편 엘가나도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한나는 여러가지 문제로부터 어떻게 인도를 받았는가를 보면 첫번째가 기도였습니다. 10절에 한나가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남편은 브닌나 보다도 한나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매우 괴로웠습니다. 마음이 괴로웠기 때문에 어디로 갔는고 하니 바로 이것이 축복으로 연결되었는데 그녀는 주님에게로 갔습니다.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가 더욱 더 성별되어서 하나님이 아들을 주시면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까지 성장되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마음이 이루어지면 된다고 하는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기도가 응답이 된다면 그 응답을 주님께 드리겠습니다. 고통에서 기도로 그 기도에서 영광을 돌리는 쪽으로 진보한 것입니다. 12,3절을 보면 한나는 오래 기도했습니다. 마음 속으로 기도했습니다. 제사장 엘리는 한나가 술 취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녀가 주어지자 젖 땔 때까지 옆에 두고 있다가 젖을 때자 엘리에게로 데리고 갔습니다. 하나님의 큰 뜻은 엘리와 그 아들 제사장들이 회개하지 않으므로 이들을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한나의 기도로부터 다른 제사장 사무엘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2 30절로 뛰어 넘어서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영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사무엘서의 기본 원칙은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는 것이 원칙입니다. 오늘날에도 이 원칙은 변함이 없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존중히 여기는 것은 대단히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들은 믿음을 멸시해서는 안됩니다. 엘리는 하나님보다 자기 아들들을 더 소중히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실족시키는 그 아들을 그대로 놓아두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섭리 가운데 엘리의 집안을 단절시키셨습니다. 한나는 하나님을 존중히 여겼습니다. 엘가나도 하나님을 존중히 여겼습니다. 그 자녀들이 복을 받았습니다. 엘리는 제사장이었지만 하나님보다 아들을 존중히 여겼으므로 그 집안이 망했습니다. 이와 같이 사사기처럼 어두운 시대에도 룻 같은 믿음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또한 엘가나와 한나 같은 놀라운 분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시대가 어둡더라도 그러한 증인들을 모아 두시는 것입니다. 시대가 좋지 않더라도 이러한 믿음의 삶을 나타내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피차간에 그렇게 되었으면 합니다. 고맙습니다.

2005 51 모래내모임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