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Recent Post

theWord Bible Software

Category

그리스도인들의 은사와

노시로 키요지

안녕하십니까? 오늘밤에도 어제에 이어서 고린도전서를 가지고 몇가지 인도하심을 받고자 합니다.

고린도전서 3 1~6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명기 4 18,19절입니다. 땅 위에 기는 아무 곤충의 형상이라든지,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아무 어족의 형상이라든지 만들까 하노라 또 두렵건대 네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일월성신, 하늘 위의 군중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천하 만민을 위하여 분정하신 것을 보고 미혹하여 그것에 경배하며 섬길까 하노라

그리스도인들의 은사와 일에 대해서 교제를 드리고자 합니다. 그 일군에 대해서 영광을 돌려서 안됩니다. 은사와 일군은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신명기에 나와 있는 것처럼 천하만민을 위하여 분정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일월성신을 천하만민을 위하여 하나님이 분정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는 분정 즉 나누어서 그 일을 정했다. 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고 한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모임에서는 사람을 높이고 사람을 특별하게 대우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전도자나 장로들을 특별한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고가 있습니다. 그 인물에 따라서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라는 사상이 나왔습니다. 고린도전서 3 22절에 보면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일월성신은 바로 만민의 것입니다. 만민의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의 것이기도 하고 나의 것이기도 합니다. 공해라는 것이 있습니다. 공해는 모든 사람에게 주신 것을 나쁘게 하고 더럽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당시에 모임에다가 바울, 아볼로, 게바를 주셨습니다. 바울과 아볼로, 게바는 바로 나의 종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익, 즉 덕을 위해서 주신 그릇입니다. 22절에 말씀처럼 다 너희의 것이니라 그러나 기독교계는 그렇지 아니하고 예를 들어서 로마 교황을 보게 되면 마치 로마교회가 교황의 것인 것처럼 보입니다. 로마교황보다 바울 아볼로 게바가 더 훌륭하지요. 일을 열심히 한 분들입니다. 기록된 대로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가 바로 너희의 종이니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23절에 보면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3장 처음에 그리스도인을 둘로 나누고 있습니다. 신령한 자들과 육신에 속한 자, 육신에 속한 자도 그리스도인입니다. 4절 끝에 보면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여기의 사람은 육의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구원받기 전 상태의 사람을 말합니다. 구원받고서 이 세상 것을 섞어서 믿음생활 하는 사람들은 육신에 속한 자인 것입니다. 고린도 지방에 이와 같이 파벌이 있었습니다. 학자들이 구원받기 전의 방식을 모임 안으로 가지고 들어온 것입니다. 자기를 나타내기 위해서 자기가 좋아하는 게바를 택한다든가, 어떤 사람들은 바울의 이름을 빙자해서 모였습니다. 그래서 3장에서 모임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잘 가르쳤습니다. 사람들이 구원받게 해서 모임을 이루게 하는 그릇으로서 바울이고 아볼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5절에 보게되면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 곧 집사들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인물숭배는 모임에서 있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람들이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않도록 늘 주의했습니다.

모임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전도를 하여 그 터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놓았습니다. 이것은 바울과 아볼로의 일이었습니다. 그 터 위에 모임을 세우는 것이 고린도의 형제 자매들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구원받고 모임에 더해졌습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임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볼로도 아니고 바울도 그 터가 아닙니다. 이 두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또한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그 터 위에 각각 집을 세우는 것처럼 세우는 것입니다. 그 터 위에 어떻게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는 금, , 보석, 나무, 짚으로 그 재료를 비유하고 있습니다. 불에 타는 것과 타지 않는 것으로 대별되어 있습니다. 개척전도를 나간 어떤 분이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평생을 전도해서 모임을 세운다 할지라도 말씀에 근거하지 않다면 짚으로 세운 것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예를 들어 자기 생각대로 모임을 세운다면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불타버립니다. 일평생을 다해서 모임을 세웠는데 그것이 불타는 모임이라면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그래서 모음을 세우는 방식에 있어서 주의하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15절입니다.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집은 불타지만 구원을 받은 사람은 남는다고 말합니다. 평생 수고한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면 슬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너무 인원수에 구애된 나머지 말씀을 소홀히 해서 나중에 보니까 구원이 아닌 사람이 모임에 많이 있다면, 바깥에서 보면 사람들이 아주 많아서 번성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없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짚 같은 모임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경우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터이고 그 위에 각각 세우기를 조심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의미는 16,17절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여기는 하나님의 모임을 성전이라고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성전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놓여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구원받기 전에 죄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별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내주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이름을 두는 모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거룩한 것입니다. 옛날에 모세가 하나님의 성막을 세웠습니다. 다 지은 다음에 하나님께 성별해서 드렸습니다. 그 때부터 성막은 거룩한 것이 되었습니다. 드리기 전에는 사람들이 그 성막을 보든지 손을 대든지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성별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것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모임도 성전이기 때문에 그와 같습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어떤 의미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은 구원받은 죄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3장 처음에 나오는 것처럼 신령한 자가 있는 것처럼 육신에 속한 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성별된 모임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더럽혀서는 안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교회는 지역교회 하나하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몸된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나라에 있는 무슨무슨 모임이라는 것도 아닙니다. 각 지역모임 하나하나를 성전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모임은 거룩하기 때문에 만약에 이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모임은 존귀하게 다루지 않으면 안됩니다.

21절에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그릇과 하나님의 모임은 분명하게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차별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구별은 성경이 가르치는 가르침입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속된 것과 거룩한 것을 구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문둥병이 들면 그것은 더럽다고 제사장이 판단합니다. 그 증세를 보고 나았다면 성별 된 것으로 보고 교제를 했습니다. 음식도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구별했습니다. 그래서 구별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교만을 잉태시키는 차별은 안됩니다. 아볼로나 바울을 너무 소중하게 여긴 나머지 그러한 실패를 했습니다. 물론 형제님들을 존경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모임에서 장로를 장로로 인정하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은사가 있는 자를 은사가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을 겸손한 사람이 취할 태도인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를 않으려 합니다. 교제 가운데 존경할 자를 존경하고 높일 자를 높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중심으로 그룹을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분열의 원인이 여기에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이러한 말씀을 교제했습니다.

그런데 9 1,2절로 가시면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재미있는 것은 고린도 사람들이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라고 말했지만 정작 바울에 대해서는 사도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사도라 할지라도 2류 정도라고 생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12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제2의 제자이라고 생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비판을 했습니다. 바울의 사도권이 무시 당하게 되면 바울이 전한 진리가 무시를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여기서 분명하게 변명을 했습니다. 내가 사도가 아니냐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바울을 고린도에 보내어 전도하게 해서 영혼들을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셨다고 하는 증거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도에게 주어진 많은 권리들을 다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해도 받았습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 같아서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로부터 도움을 거절했습니다. 12절을 보시면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 만약 바울이 돈을 받았다면 돈 때문에 바울이 일한다든지 하며 바울을 많이 비난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사도이기 때문에 일을 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설명을 했습니다. 9절에서는 모세의 율법을 가지고 그 원리를 설명했습니다. 11절에서는 신령한 것을 뿌렸으면 육신의 것을 거두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14절에서도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 군사들도 자비량해서 군사로 다니지 않는다고 정중히 설명했습니다. 또한 포도원을 가꾸는 자는 거기서 나는 소출을 먹는다고 말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도 일하는 소에게는 망을 씌우지 말아서 그 곡식을 먹어도 된다고 말했습니다. 14절처럼 신약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자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고린도 성도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돈을 받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조금이라도 복음에 장애가 되는 것들을 거절했습니다. 지금은 이렇지 않은 전도자와 목사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하는 일을 소개하면서 은행구좌를 적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주님을 의지해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도움을 입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거절했습니다. 고린도후서에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데살로니가에서 전도할 때에도 바울은 거절했습니다. 왜냐하면 데살로니가에는 일하지 않고 빈둥거리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열심히 일해서 그러한 사람들에게 모본을 보여준 것입니다. 바울의 생활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됩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는 사람들이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 19절 이하에서 말하는 것처럼 여러가지를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 유대인과 같이 이방인이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 이방인같이 그것이 19절부터 죽~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읽고서 현재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이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 무슨 짓을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 모든 사람처럼 되었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짓을 해도 좋겠습니까? 바울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21절입니다.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분명히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율법을 분명히 지키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말씀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이방인에게는 이방인같이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은 이것을 무시하고 사람들이 구원받는다면 무슨 일을 해도 좋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구원받고 나서도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2 4,5절입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어떤 기사에 보면 바울을 향해서 어떤 왕이 너의 많은 학문(박식한)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유대교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유대교의 젊은이 가운데 최고라고 일컬어지는 사람이었습니다. 로마 시민권을 가진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대해서나 사회에 대해서나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지식을 토대로 해서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이론대로 설명해서 그 이론대로 믿었다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바울이 믿는 믿음으로 지지를 받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학식에 의해서 유지되는 그러한 믿음의 사람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믿음이 능력에 있기를 원했습니다. 저의 친구가 한 친구를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 낚시를 같이 갔습니다. 이제 붕어를 낚으러 갔습니다. 붕어 낚시를 가서 구원받은 것으로 보이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의 삶은 슬슬 놀면서 살아도 된다고 하는 사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전도를 그렇게 했으니까. 만약에 학문에 의해서 믿음에 들어온다면 구원받고 나서도 계속 학문의 지지를 받으며 생활하게 될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말씀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아니했다고 말했습니다. 여러가지 면에서 주의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명치시대에 일본에 복음이 처음 들어 왔을 때 그 때에 복음을 믿은 사람들 중에 지식층 계급이 많았습니다. 그때에는 지식을 가지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사고들이 있었습니다. 전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런 연유로 해서 바울은 말씀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전했습니다. 말씀을 무시하여 무엇이든지 복음을 위해서 사용해도 된다는 그런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11장으로 가겠습니다. 11장은 너울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이미 아신다고 생각합니다. 고린도교회 문제로서 머리에 너울과 그리고 모일 때 여자들이 가르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너울을 쓰지 않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고린도전서가 가르치는 것은 지역교회 안에서의 질서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11장에서 질서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머리는 그 상위에 있는 존재를 나타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3절입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입니다. 여자의 머리는 남자입니다.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입니다. 상위의 것에 영광을 나타내는 데는 질서가 있습니다. 여자는 남자의 영광을 나타내기 때문에 남자의 영광은 하나님의 교회에서 가리워져야 되기 때문에 여자의 머리를 가리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여자의 머리카락이 여자의 영광이니까 여자의 영광도 가리는 것입니다. 15절을 보면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신 연고니라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영광으로 그 머리카락을 주셨습니다. 긴머리는 여자에게 영광이 됩니다. 그래서 남자의 영광도 가리고 여자 자신의 영광도 가려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기 때문에 너울을 쓰는 것입니다. 인간은 감추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주님이시라고 그래서 자매님들의 너울을 보게 되면 머리는 그리스도요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라는 것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임이기 때문에 쓰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위해서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너울을 볼 때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울은 중요합니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에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일본교계에서 보게 되면 불교에서 기독교로 바꿨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모임 진리를 나타낼 때에도 우리가 그것을 바꾸었다는 의미가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했다고 하지만 루터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역사는 그것을 개혁이라고 부르지만 루터는 고민 끝에 카톨릭에 귀의를 통해서는 구원받지 못하는 것을 알고 믿음으로 구원받는 다는 것을 알고 믿음으로 산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이 제시되면 그 말씀에 순종해서 살기 때문에 우리 가운데 변화가 보이는 것입니다. 너울을 쓴다는 것은 말씀 가운데 산다는 것의 모습입니다. 카톨릭에는 여자는 전부 너울을 씁니다. 그들에게는 율법입니다. 그들이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지만 카톨릭은 대부분이 말씀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카톨릭은 딱 두 가지만 지키고 있다고. 너울 쓰는 것과 여자가 잠잠한 것.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도 율법적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읽고 질서를 알고 10절에 나오는 것처럼 권세를 그 머리에 두는 것처럼 알고서 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형제와 자매는 그 가치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너울을 통해서 모임의 질서를 인정해야 하고 그리고 주님을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야 합니다. 긴머리가 여자에게 영광이 된다는 것을 그대로 인정한다면 그대로 인정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장로형제가 여자의 머리카락의 길이를 정한다면 그것은 율법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기록되어 있는 것은 긴머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행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령이 주어졌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평강으로 인도하십니다.

그 다음으로 만찬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24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가장 중요한 것은 나를 기념하라 만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 또는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실제로 떡을 떼어 먹고 잔을 마시지 않으면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육체를 가지고 이 지상에 오셨습니다. 우리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그 행위를 통해서 계속 오실 때까지 증거하는 것입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오늘날까지 계속 되는 것입니다. 26절에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감사만이 아닙니다. 또한 예배만도 아닙니다. 때때로 기도집회처럼 기도하고 끝나는 것입니다. 만약 찬송가를 택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찬송가를 책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찬송가에는 위로의 찬송도 있고 권하는 찬송도 있고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면 또는 기억하는 가사를 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때는 말씀을 읽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때도 권유하는 말씀을 찾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인에게 덕을 세우는 말씀을 찾는 것도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말씀을 골라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위해서 낭독만 하는 것이 아니고 간단한 가르침도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기도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기념하는 말을 나타냅니다. 찬송가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성경낭독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또한 말할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가 이러한 분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모여진 분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향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두번이나 나를 기념하라 나를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된 다음에 떡과 잔에 참예하는 것은 축복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만찬이 축복이 되면 믿음생활도 축복이 됩니다. 이 만찬이 혼란스러우면 많은 손해를 봅니다. 그러나 고린도에 믿는 자들은 이 만찬에 실패했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들이 자기 마음대로 행동을 취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만찬의 의미를 나타내면서 가르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명령하셨습니다. 사도행전에서 그 모본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 만찬의 참된 의미는 11장에 나타나 있습니다. 23절에 있는 것처럼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주님께서 예루살렘 이층 그 다락에서 떡을 떼실 때 바울은 아직 구원받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23절에서 내가 주께 받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이 만찬에 관한 것을 주님께로부터 직접 계시로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의 기록방식은 어떤 의미에서는 재미있습니다. 고린도에 있는 그 혼란으로 말미암아 만찬에 대한 철저한 가르침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고린도에 믿는 사람들은 여러가지로 실수했습니다. 실수했기 때문에 진리가 분명해졌습니다. 우리는 모임에서 여러가지 문제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 문제들은 이미 고린도에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그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길 때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말씀이 있습니다. 성령이 인도해 주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존귀한 자들입니다.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받았습니다. 완전한 입장을 확보했습니다. 우리들 마음속에 성령이 내주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놀랍습니다. 또한 존귀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이 썩을 몸은 영광의 몸으로 변할 것입니다. 나 자신은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보시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합니다. 그 마음 속에는 성령이 내주하십니다. 이 몸을 더럽게 하지 아니하고 영광의 몸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우리들의 축복을 위해서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교제할 때 다른 사람의 덕을 세운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은사를 가진 사람도 그 은사를 자기를 위해서 사용하지 않고 남의 덕을 위해서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임이 성장하기 위해서 남의 덕을 분명히 생각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덕을 세우기 위해서 하라는 말씀이 여러 번 나옵니다.

14 26절입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모일 때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모임에서 말할 때에 모임을 비판한다든지 다른 사람을 욕하게 되면 절대로 덕이 되지 않습니다. 자기의 재능을 나타내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다른 사람의 덕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판단하고 분별할 때 덕이 되는지 안되는지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고린도전서는 지역교회가 어떻게 덕을 세우기 위해서 있는가를 기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배울 수 있기를 원합니다. 이상입니다.

2005430 모래내모임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