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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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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노시로 키요지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우리가 잘 아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창세기 15 5,6절입니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아브라함을 80번 인용하고 있다고 듣고 있습니다. 모세와 다윗은 60회 정도 인용이 되었다고 합니다. 6절에 보면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신 구약을 관통하는 말씀입니다. 의로 여기심을 받는 것은 모세가 율법을 가져와서도 그것을 배제할 수가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율법이 들어오더라도 변할 수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변하지 않는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 로마서 4 2,3절을 보게 되면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확실함이 여기에 나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시는 대로 갈대아 우르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 도시는 상당히 번성한 도시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갈대아 우르에서 나왔습니다. 창세기 12 4절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출발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오 세였더라 여호와의 말씀하신대로 갈대아 우르에서 나왔습니다. 말씀대로입니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의 전 생애를 이어가는 말씀이 되었습니다. 고향을 떠나서 나그네길의 시작이었습니다. 고향도 버리고, 친척도 버리고, 일도 버리고 여러가지를 고향에 두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갈 곳을 하나님이 지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나오라라고 명하셨기 때문에 나왔습니다. 아브라함이 살던 그 도시는 우상의 도시였습니다. 다른 곳에 보게 되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우상을 섬겼다고 말한 곳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 아브라함을 우르에서 불러 내셨습니다. 우리들은 세상에 있지마는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여행길은 좋은 모본이라고 생각합니다. 나그네라는 상징적인 요소가 장막을 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집을 짓지 아니하였습니다. 롯은 집을 지었습니다마는 아브라함은 집을 짓기는커녕 아버지, 아들, 손자 3대에 걸쳐 늘 장막에서 살았습니다.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아들과 손자까지 믿음의 길을 간다는 것은 굉장히 놀라운 일입니다.

저의 자녀는 두 명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손자 손녀 중에 두 명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제 딸의 두 외손자는 아직도 구원받지 않았습니다.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와 아들과 손자 때까지 장막에서 살았기 때문에 나그네라는 것을 반듯하게 증거했습니다. 이것은 신약성경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나그네 생활을 합니다. 인도받아서 화란까지 왔다가 화란에서 가나안까지 갑니다. 가나안에 와서는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12 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 곳에 단을 쌓고 성경 기록을 보면 아브라함은 4번 단을 쌓았다는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네번째 단을 쌓았을 때는 자기 아들 이삭을 드리기 위해서 단을 쌓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과 손자와 함께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라는 것을 단을 통해서 나타냈습니다.

어떤 기록에 따르면 미국에 있는 어떤 판사의 기록인데 그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분이 일지를 썼다고 합니다. 이분이 기록한 일지를 보니까 주일날 한번도 떡을 떼는 것을 거른 적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 판사되는 형제님은 대단히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이 지켜지고 건강이 보호받고 예배를 정확하게 주님 앞에서 보호받을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이상으로 그 인생 자체가 예배의 인생이었습니다. 세상에서 분리가 되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으면 그분의 삶은 복된 삶이 아닙니다.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도 복된 일입니다. 놀라운 그리스도인일지라도 때로는 시련도 하나님이 주십니다. 시련을 당하면 내가 무슨 문제가 있지 않나 라고 생각할 경우가 있습니다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루어지는 시련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기근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나안까지 인도하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반드시 지켰을 터입니다. 양식이 없어서 이집트로 양식을 구해서 갔습니다. 애굽에 가서는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부인을 의뢰했습니다. 사라는 아주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아름다운 아내를 애굽의 왕이 궁궐로 맞아 들이기 위해서 방해되는 자기를 죽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 내 아내라고 하지 말고 내 동생이라고 해 주지 않을거냐고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여동생으로 왕이 맞이하게 되면 나를 죽일 리가 없기 때문에. 이것을 반은 진짜고 반은 가짜입니다. 아브라함은 일이 잘되어 간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자기 생명의 보호를 위해서 자기 아내를 의뢰했던 것입니다. 애굽의 왕은 사라를 맞아들였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 사라는 아브라함을 순종했습니다. 히브리서에서 사라가 순종했다는 것은 이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단히 힘든 일일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축복을 하시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한다는 복을 실행하셨습니다. 그래서 애굽의 왕에게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반은 사실이고 반은 거짓이지만 애굽의 왕 쪽에서 보면 애굽의 왕은 속았습니다.

이야기가 다른 것이 됩니다만 어떤 구도자가 창세기를 1장부터 마지막까지 읽었답니다. 그 구도자가 말하기를 성경이 이상하다 나쁜 일뿐이다.라고 했답니다. 아브라함은 거짓말을 하고, 리브가도 이삭을 속이지 않나, 자기 딸이 아버지인 롯과 나쁜 짓을 하지 않나, 유다는 자기 며느리하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나, 창세기 마지막 부분으로 가면 형제가 형제끼리 싸우지를 않나, 이와같이 성경은 나쁜 것으로 가득하구나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라고 구도자가 물었답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질을 이미 창세기 단계에서 하나님이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죄를 인정했다는 것은 절대로 없습니다. 죄를 옹호하는 것도 절대로 없습니다.

로마서 3 3,4절입니다.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8절입니다.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받는 것이 옳으니라

이와 같기 때문에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이 아무리 죄를 범한다 할지라도 그 죄가 하나님 앞에서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결과가 좋으면 그 과정에서 나쁜 생각이 괜찮다라고 하는 사고가 있습니다. 교파라던가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모임들은 결과만 좋으면 그 과정은 괜찮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일본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젊은 사람들이 일본에서 유행하는 만자이라고 하는 우리말은 만담이라고 하는 말을 사용해서 복음을 전합니다. 일본에서 이 만자이라는 만담이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을 나타내지 않기 때문에 안된다고 해도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이 결과가 좋기 때문에 괜찮다 이렇게 말합니다.

8절에서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인간의 죄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죄를 시인해서 용납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목숨을 위해서 반은 사실, 반은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애굽의 왕 쪽에서 볼 때는 속임을 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애굽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단을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전에 쌓았던 그 곳에서 단을 쌓았습니다. 실족하게 되면 이전에 있었던 자리로 돌아올지라도 그 기간 동안은 성장이 없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함께 동행했던 롯은 애굽에 가서 세상의 부를 사랑하는 그 사랑을 그대로 갖고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아브라함이 애굽에 들어갔기 때문에 나쁜 것들을 가지고 나왔는데 첫번째로 부를 가지고 나왔고, 롯에게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그만 주어버렸으며, 또한 하갈이라고 하는 여종을 데리고 나와버렸으며 그러한 것을 통해서 아브라함이 나중에 다시 실패하게 됩니다. 부의 결과로 롯과 헤어지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부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롯도 나그네 삶을 살았지마는 부가 들어온 이후부터 롯은 나그네 생활을 그만 두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이 회복되었기 때문에 친척끼리 싸우면 안되니까 롯에게 택할 길을 먼저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다른데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롯은 달랐습니다. 양들을 위해서 롯은 낮은 땅을 택해서 그 근방의 소돔과 고모라가 있는 곳으로 접근하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13 13절에 의하면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이미 소돔 사람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았습니다.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처음에는 그 소돔성 근처에서 장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 성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거기다가 집을 지었습니다. 문제는 자기 재산 그 부가 문제였습니다. 로마서 8장을 5,6절을 봐주시면 롯의 인생에 대해서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죄인데 롯은 육신에게 지배를 당했습니다.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은 그러했습니다. 롯은 거기서 성공을 했다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정치가처럼 롯이 행동을 했습니다. 물론 신약에 따르면 의로운 롯이라고 신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롯은 믿음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신약에 따르면 육신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약 성도에게 비유한다면 데마에게 속하는 그리스도인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데마는 세상을 떠나서 처음에는 바울과 함께 잘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사랑해서 세상으로 갔습니다. 롯은 믿음의 사람이기 때문에 성적으로 타락한 그 도시를 고치게 할려고 마음을 먹었다고 생각합니다. 소돔의 성문에 앉는 것을 볼 때 소돔성의 성주쯤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그 성에 앉는 힘은 정치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도 육신적인 사고방식입니다. 마음으로 이 성은 정말 잘못되었다, 나쁘다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노력은 했지만 고칠 수는 없었습니다. 일본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몸을 씻으려고 대야 안에 들어갈 수는 있는데 그기 들어가서는 대야를 뒤집을 수 없다고(아무도 안 웃었습니다). 예를 들면 잘못된 모임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그 모임을 고치려 해도 고쳐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뒤집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거기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롯은 소돔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한번 롯에게 경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경고했다는 것은 롯이 속해있는 성이 이웃 성과 싸움을 해서 그만 롯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부인과 자녀와 재산이 모두 점령 당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영적인 힘을 가지고 나가 싸워서 롯을 회복시켰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롯에게 경고를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롯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왔기 때문에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했습니다. 그 때 롯은 자기가 속해 있는 성을 전부 잃었습니다. 자기가 세웠던 집도 전부 타 버렸습니다. 재산을 전부 잃고 아무것도 가지고 나올 수 없었습니다. 두 딸의 남편 될 사위도 멸망을 당했습니다. 아내도 그만 결국 죽었습니다. 말하자면 전부 잃은 것입니다. 남은 것은 딸 둘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이 딸들이 성장해 있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처럼 3대에 영향을 끼치기는커녕 자기 사위는 물론이고 자기 딸한테도 영향을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딸들이 자기 아버지를 통해서 자녀를 낳으려고 생각했습니다. 그 마음에 성별해야 된다는 마음 가짐이 없었습니다. 이 두 딸의 자녀들은 축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모두 잃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라는 말씀대로가 아닙니까? 그러나 롯은 구원은 받았습니다. 이것은 전적인 은혜입니다. 신약 성경에는 롯을 나쁘게 기록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입장을 신약에서 롯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만년이 되었을 때에 분명히 축복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위대한 것은 죽음에서 생명을 파는 것이었습니다. 즉 죽음을 무릅쓰는 것이었습니다.

로마서 4 19,20절입니다.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라의 태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라를 통해서 자녀를 준다는 그 믿음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죽은데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생명이 태어났던 것입니다. 또 하나 죽음에서 생명을 얻었다고 하는 것은 히브리서 11 17~19절입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여기서는 모리아 산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도록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았습니다. 말씀이 주어지자 다음날 아브라함은 곧바로 실행에 들어갔습니다. 그때에 아브라함은 아들 대신에 동물이 어떻습니까?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대신에 내가 죽으면 안됩니까?라고 묻지도 않았습니다. 제 아내를 드리면 어떻겠습니까? 라고 하나님께 묻지도 않았습니다. 이전에는 아내를 의뢰했습니다.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즉시 하나님을 예배하러 모리아산으로 향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믿음이 진보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0절에 보게 되면 하나님이 이삭을 드렸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삭을 죽였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정말로 아브라함은 이삭을 완전히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완전히 드려서 이삭이 죽었다 할지라도 살리실 것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두 말씀으로 말미암아, 즉 네 자손은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는 말씀과 아들을 드리라는 두 말씀을 통해서 이삭이 죽을지라도 이삭을 살려서 그 자손이 태어날 것이라고 믿고서 이삭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죽음에서 생명을 얻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정말로 놀라운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를 의로 여기신다는 말씀이 바로 이러한 행위를 통해서 믿음이 완성되었습니다. 야고보서에서는 믿음과 행위를 설명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예로 들었습니다. 어디까지나 믿음이 먼저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기 때문에 행위가 수반되는 것입니다. 행위가 먼저고 믿음이 나중이 아닙니다. 믿음에 이어 수반된 행위를 행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구원받는 것은 믿음입니다. 로마서에 나오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진리는 위대한 진리입니다. 이 믿음의 힘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믿음과 함께 로마서 8장에서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은 로마서 가운데 가장 놀라운 장이라고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죽었던 몸들이 나중에 다시 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믿음이 주어졌습니다. 또 하나는 성령이 주어졌다는 것은 신약시대 성도들에게 축복인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어떤 형제로부터 산상수훈의 말씀을 실행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웃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을 주는 것은 곤란하지 않을까라고 저는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행할 수 있는가라고 제가 말했습니다. 성령으로 하면 완전하게 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그 선배 형제님이 말했습니다. 그 선배 형제님이 말하기를 형제님의 믿음으로는 안될지 모르지만 성령으로는 된다고 했기 때문에 받아들여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행한 실예가 있습니까?라고 제가 물었습니다. 그 선배 형제님은 스데반을 예로 들어서 설명했습니다. 스데반은 성령으로 말미암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인도받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제가 그 때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인간의 행위로는 안되지만 성령의 능력으로는 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을 말씀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로마서 8장에 따르면 성령으로 인도를 받는, 즉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받는 이러한 표현이 나옵니다. 로마서 8장에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믿음이 완전해진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아브라함보다도 더 복을 받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이고, 행하는 사람이고, 또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아브라함은 교제에서도 존귀한 사람이었습니다. 소돔이 멸망 직전에 있을 때 롯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롯이 포로되었을 때에 도우러 갔습니다. 아브라함은 기도했고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적용시키면 교제를 존중히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교제라는 것은 짐을 같이 지는 것입니다. 피차간에 짐을 지는 것이 교제입니다. 롯은 대부분이 아브라함의 기도와 아브라함의 교제를 통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기도했기 때문에 롯이 소돔으로부터 건짐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는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것들이 잘 나타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에 대해서 피차간에 배우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은 고향으로부터 나온 이후에 절대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고향으로 나오라 했기 때문에 절대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하늘이 본향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1 16절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놀랍습니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바람이 있었습니다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셨지만 아브라함에게는 묘지 밖에 주시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그 당시로서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아브라함은 가졌습니다. 영적인 고행을 바라고 아브라함의 믿음은 완성이 되었습니다. 우리들도 피차간에 그것을 바라며 걸어가고자 합니다.

2008_04_13(김포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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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