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Recent Post

theWord Bible Software

Category

주님의 순종하심

노시로 키요지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일본에서 해외에 나가본 적이 없는데 한국을 처음으로 외국으로 나왔습니다. 저의 소개를 드리겠습니다. 저는 18세 때에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 때는 일본에서 전쟁이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 76살입니다. 18세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보호하심을 받았습니다. 26살 때에 동경에 있는 다이쿄쵸 모임에서 개척을 파견 받아서 니이가타로 개척하러 갔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니이가타에 있었습니다. 일본에서의 개척전도는 참으로 어렵고 제가 가서 있는 니이가타 지역은 선교사를 죽이는 그런 지역이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노벨 문학 수상작품인 가와바타 야스나리 작품의 배경이 되어 있는 그 지역이기 때문에 대단히 보수적이고 바깥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그런 지역입니다. 농부들은 일년 동안 일해가지고 눈이 오면 활동을 못하고 그 눈 오는 동안에 양식을 다 먹어버리기 때문에 그런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눈이 오는 지방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돕게 되면 자기가 도움을 입지 못하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생황을 바꾸면 위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보수적인 것입니다. 전도는 혁명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니이가타 지역은 어렵다고 일컬어져 왔습니다. 구원받아서 3년이 되면 그 사람이 없어져 버리고, 또 구원받아서 3년이 되면 그 사람이 없어져 버리고 그 가운데 남아 있는 사람이 모임을 이루는 이런 과정으로 모임이 개척이 되어갔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한 일로 인해서 대단히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젊은 사람이 구원받게 되면 오오사까나 동경으로 가버리기 때문에 모임은 성장을 못합니다. 그러한 일을 그러한 가운데 해 왔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76살이 되었습니다.

성경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주님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마는 성경은 명령과 가르침과 모본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주님을 배우는 것이 믿음의 기본입니다. 제 친구가 영국에 가서 일년 정도 있었습니다. 매일 밤 모임으로 나갔습니다. 매일 모임에 가 보니까 사람들이 열심이라서 왜 그렇게 열심인지 낱낱이 살펴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예수님을 내가 모르기 때문에 잘 못하고 그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게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그 형제님은 주님을 아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연구라는 것은 주님 자신을 아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주님께서 순종하셨다는 점에서 같이 교제를 나누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26 37~42절까지입니다.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주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셨습니다. 이 장면은 생명에 관한 것입니다. 주님은 죽기 위해 오셨습니다만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때에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경우에서든지 간에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구했습니다. 최고의 복종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보다 한걸음도 앞서지 않았습니다. 또 한걸음도 뒤서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완전한 분이십니다. 여기는 완전한 복종입니다. 우리는 복종할 때 자기 상황에 맞으면 복종할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장면인데 주님은 아버지의 원대로 되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다음은 주님께서는 성경말씀에 순종을 했습니다. 54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베드로는 주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칼을 가지고 대제사장의 종을 공격했습니다. 검을 도로 집어 넣으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54절에 기록된대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어떻게 말하는가가 모든 것의 토대입니다. 예수님이 성경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세번째로 주님은 성령을 따랐습니다. 마태복음 4 1절로 가겠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려고 광야로 가셨습니다. 이 세 시험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40일간 굶으셨습니다. 인간의 생명과 관련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이끄신다면 이끄는 대로 가셨습니다. 우리들 그리스도인들도 같습니다. 주님의 뜻은 어떤 것인가? 또 하나는 성경이 어떻게 말하는가? 또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인가? 특히 모임은 성령에 의해서 모든 것이 행해집니다. 이 세 가지 복종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바울은 진리를 말할 때 반드시 성경을 사용했습니다. 사도행전 가운데 문제 해결하는 방법을 보겠습니다만 15장입니다. 5,6절입니다.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여기서는 믿는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주게 할 것이냐 그리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게 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여기서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형제로부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 문제를 의논을 하러 모였습니다. 우선 베드로는 어떻게 복음을 전했는지 그 사실 설명을 먼저 했습니다. 그리고 13절에서는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가로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16~18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우선 이 장면을 보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실이 무엇인가 라는 것을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들에게 전도하여 이렇게 구원을 받았다고 그 사실을 말했습니다. 두번째는 야고보가 성경은 어떠한가라고 성경을 통해서 뒷받침을 하는 말씀을 했습니다. 19절은 결론입니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여기서 판단을 했습니다. 사실이 뭔가를 말한 다음에 성경이 뭐라고 말하는가를 말한 다음에 그것을 근거로 해서 판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말씀이 없다면 사실이 어떠하든지 간에 그 사실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를 봐주시겠습니까? 4 2,3절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요한복음 3 16절에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3 16절은 거의 대부분의 복음진리가 들어 있지마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은 그 속에 없습니다. 로마서 1장에서 8장까지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다는 말이 중심이 되는 기사입니다. 누가복음에는 세리가 의롭다 함은 얻는다는 한 곳 나오지만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진리를 분명히 했습니다. 사람들은 바울의 신학적인 의견이라고 생각할 지 모릅니다. 그래서 성경은 무엇을 말하느뇨 하면서 아브라함까지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처음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아브라함이 나타냈다고 성경의 근거를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5장에서는 역사 가운데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기사를 서술했습니다. 아담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역사는 죄로 뒤덮였습니다. 그와같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말씀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분명하게 증명해 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가 모든 것의 토대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성경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하셨습니까?

누가복음 24 24~27절까지입니다.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에 부활을 믿는 제자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마리아도 믿지 않았습니다. 물론 베드로도 믿지 않았습니다. 24장에는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고 있습니다. 글로버를 포함한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부활을 말했습니다만 이 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부활을 설명하셨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물론 나타냈지만 다른 모습으로 나타내시며 직접 안 드러내시고 26,7절에 보면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부활과 십자가를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나타내실 때에 말씀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45~47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 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예수님이 성경을 사용하셨다는 것은 대단히 놀라운 일입니다. 그것도 모든 성경을 사용했습니다. 성경의 한 부분만 가지고 판단하면 여러 문제가 생깁니다. 예를 들면 바울의 서신인 경우도 서신 전체를 가지고 부분부분을 판단하지 않으면 잘못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을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하는 것을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인용하는 가운데 이사야 53장을 주님이 설명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이사야 53장은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굉장히 놀라운 것입니다. 그것을 조금 구분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사야 53장을 보시겠습니다. 읽으면 길어지니까 1~4절까지는 종이 되신 그리스도 이십니다. 사람으로 나타나셔서 종의 입장을 취하셨습니다. 5,6절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7~9절에서는 체포와 재판과 십자가와 장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놀라운 묘사입니다. 10~12절까지는 헌신자로서의 주님의 모습입니다. 10절을 봉독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여호와께서 원하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강압되어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에 대한 봉사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행하는 것입니다. 그기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기는 또한 만족이 있습니다. 모임의 문제이지만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강제가 아닙니다. 예를 들면 로마카톨릭은 강제적입니다. 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미슈 그룹이라는 것이 미국에 있습니다. 같은 옷을 입습니다. 전기를 쓰지 않습니다. 전화도 쓰지 않습니다. 자동차도 타지 않습니다. 그들은 독일에서 이주한 그대로 지금도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도덕적으로는 높습니다. 그러나 그 생활의 모습은 강제적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세상으로부터 멀어진다는 의미에서는 놀라울지 모릅니다. 스스로 자원해서 헌신한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0장에 의하면 주님은 그 생명을 버릴 수도 있고 얻을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은 주님이 생명을 버리지 아니하면 아무도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기에 스스로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참으로 주 예수님은 본이십니다. 그래서 주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순종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아서 성경을 읽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 인도하심 가운데 그것이 곤란하더라도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 발자취를 따라간 사람이 바로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은 간증할 때 거의 자기 경험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얼마 정도 경험을 말했습니다만 상세하게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어떠하든 말씀에 근거해서 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자기 경험이라든가 신학이라든가 세상의 이야기라든가 그런 것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성경에 의해서 해야 되는 것입니다. 구원받을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사도행전을 한번 더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4 12절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구원은 예수님 이름 외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그 사람이 구원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자면 우리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아래 모임에 더해졌습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모든 것입니다. 우리들이 복음을 전할 대 십자가와 부활이 없으면 복음이 아니라고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성경에 순종한다는 것, 예수님의 순종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에 주님의 겸손에 대해서 교제를 드리겠습니다. 요한복음 13장입니다. 여러분 아시는대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겸손한 일입니다. 어찌해서 왕이 신하, 즉 종들의 발을 씻기시겠습니까? 이 발을 씻은 사람 중에 유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정말로 관용적인 분이셨습니다. 13장의 반은 발을 씻는 것이지만 반은 유다에 관한 것입니다. 왜 여기에 유다에 관한 것이 자세히 기록되었느냐 하면 주님은 유다에게 회개를 구했습니다. 최후로 떡을 떼서 주었습니다. 유다는 나갔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유다가 왜 나갔는지 몰랐습니다. 이때까지 주님은 유다를 똑같이 다루었습니다. 굉장한 관용입니다. 왜 유다를 예수님이 택하였나 하면 모든 사람을 주님이 사랑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배반자를 자기 제자들 속에 넣어서 동일하게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유다가 나갔을 때 유월절날 쓸 것을 준비하러 가는 줄 알았습니다. 만약 유다가 돈을 훔쳐 간 것을 주님이 알고 계신데 이것을 얼굴에 표정을 나타내거나 만약에 다른 표시를 했다면 다른 제자들이 알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크신 분이십니다. 이 때 주님은 유다가 배반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만약에 이것을 모르고 있다면 제자들이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 나중에 실족할지도 모릅니다. 만약에 제자들이 주님이 모르고 있었다면 제자들이 실족할 수 있는데 주님은 알고 있었다라는 것을 알리시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올 때까지 절대로 차별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관용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유다의 부정을 결코 보아 넘기지 않으셨습니다. 나쁜 것은 나쁘다. 그러나 회개할 때를 두었습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13장의 반은 유다에 관해 기록된 것입니다. 유다의 발을 씻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배반자의 발을 씻었다는 것은 정말로 대단한 일입니다. 유다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 놀라운 주님을 만났어도 유다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3장에서 예수님의 겸손과 관용을 배워야 합니다.

다음은 예수님은 베드로에 대해서도 어떤 태도를 취하셨는가 하면 요한복음 21장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15절입니다.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자기 말에 책임도 지지 않고 자기 몸에 위험이 닥치니까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러니 이 베드로는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했습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들어가신 지 삼 일이 지났습니다. 부활해서 처음 만난 사람은 베드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용서는 위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베드로가 처음 만난 기사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을 보면 베드로를 처음 만난 것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기록된 기사가 복음서에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아마 그때에 부인한 사실에 대해서 엄하게 고쳤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엄했기 때문에 기록 안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1장은 회개한 이후에 예수님이 다시 사도로서 신임하는 장면입니다. 완전한 용서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질문하셨습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인도자로서 믿는 자들을 양육하라는 그런 뜻입니다. 먹이라, 치라, 먹이라 이렇게 3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양육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도 예수님의 돌보심을 받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양을 먹이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공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제자들이 전부 있었습니다. 전부가 있는데서 베드로가 배반한 것을 증거했습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베드로가 제자들과 함께 일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당신은 배반하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용서 받았습니까? 그래서 모든 사람이 있는 가운데서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신다고 했을 때 내 양을 먹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진실하게 회개한 베드로에게 사도로서 다시 재신임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놀라운 분이 아니십니까? 참으로 주님은 크신 분이십니다. 찬송을 해야 할 분이십니다. 사도행전에 가면 베드로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하게 됩니다. 여기 21절에서는 기도하지 않고 고기잡으러 갔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게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의 고백 속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7절을 보겠습니다.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베드로는 주님을 어떻게 알았느냐 하면 이미 전능자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모든 것을 아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같다는 것은 예수님이 전지전능하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경험으로서 예수님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알고 싶은 마음이 나왔습니다. 우리들은 서로간에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순종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마쳐야겠습니다.

20010423

'주옥같은 말씀들 > 노시로 , 이치가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역교회의 문제들과 일치됨  (0) 2008.04.29
성경의 중심되신 예수 그리스도  (0) 2008.04.24
베드로를 훈련하신 주님  (0) 2008.04.23
기도  (0) 2008.04.22
바울의 믿음과 그 삶  (0) 2008.04.21
아브라함  (0) 2008.04.20
하나님의 사랑  (0) 2008.04.19
하나님의 사람  (0) 2008.04.18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