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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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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6 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어저께는 그리스도인들의 적인 사단에 대해서 싸우는 것에 대해서 에베소서 6장을 통해서 잠시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구원받고 믿게 되면 대적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신갑주가 필요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단과의 싸움 이외에 또 하나의 싸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과 육에 대한 싸움입니다. 바깥에 있는 대적은 마귀입니다. 저의 속에 있는 대적은 우리의 육입니다. 우리들은 침례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고 그 죽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물에서 올라온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은 대단히 놀라운 것입니다만 율법에 의하지 않은 삶이 주어졌습니다. 구원받았다고 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육이 완전히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다윗왕과 헤롯왕을 비교해보겠습니다.

다윗은 훌륭한 구약의 성도였습니다. 다윗의 믿음이 가장 잘 나타난 곳은 골리앗과의 싸움에서라고 생각합니다. 완전히 주님께 의뢰해서 싸웠습니다. 그 때 다위은 자기의 영예라든가 왕의 딸에게 장가간다든가 이러한 것들을 일체 생각하지 않고 오직 주님의 이름으로 싸웠습니다. 다윗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골리앗과의 싸움에서는 완전히 주님을 신뢰한 충성된 싸움을 싸웠습니다. 그렇더라도 다윗은 나중에 큰 실패를 경험하게 됩니다. 다윗은 여자 때문에 사람을 죽였습니다.

시편 51 1~4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이것은 다윗이 죄를 범한 다음에 고백한 것입니다. 다윗은 훌륭한 성도이지만 그 속에 육이 있다는 것을 잘 가르쳐 줍니다. 주님이 다윗의 자손이라고 일컬을 만큼 다윗의 입장은 놀라운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윗에게 육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사울과 달랐지만 사울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서 블레셋 사람들의 양피를 가져오라고 주문했습니다. 사울이 다윗에게 그것을 요구한 것은 블레셋 사람의 손을 통하여 다윗을 죽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울이 했던 동일한 방식으로 자기의 부하 우리아를 죽일 때 사용했습니다. 육이 나타나서 밧세바를 취할 때 그 부하 우리아를 적의 손에 넘겨서 죽였습니다. 사울왕의 나쁜 것을 다윗은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마음에도 동일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와 비교해서 신약으로 가면 헤롯왕이 세례요한을 죽인 기록이 있습니다. 그 헤롯은 자기 동생의 아내를 취했습니다. 그 사람은 믿지 않는 왕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믿지 않는 헤롯왕은 동생의 아내를 취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세례요한으로부터 책망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헤롯은 세례요한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의 처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어서 왕이 기뻐하며 보상을 물었을 때 그 아이의 어미는 세례요한의 목을 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헤롯은 세례요한을 죽였습니다. 양쪽, 즉 다윗이나 헤롯이나 문제는 여자였습니다. 여기서 믿는 자의 육이나 믿지 않는 자의 육이 본질적으로 같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예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훌륭한 제자였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베드로의 교제가 복음서에 많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베드로의 기록이 없다면 복음서가 얇아졌을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자주 베드로와 예수 그리스도는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이 붙잡혔을 때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뜰에서 거짓말을 하며 세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배반했습니다. 또 한 사람의 가룟유다가 있는데 물론 유다는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었기에 육의 목적을 가지고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면 그 영광에 자기도 동참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육의 생각입니다. 그 가룟유다도 최종적으로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불리우는 베드로도 주님을 배반했기 때문에 베드로의 육이나 헤롯의 육도 본질적으로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을 잃어버릴 수는 없기에 우리들의 입장이라는 것은 완전합니다. 베드로나 다윗이나 믿음을 가졌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 51편에서 정직하게 자기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그리고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고 구약 성도로서 고백을 했습니다. 베드로도 동일하게 신약성도로서 눈물을 흘리며 자기의 죄를 자백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신약에 사는 우리들이 특별한 은혜를 가지고 있지마는 육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주님이 공중으로 오실 때에 우리들은 영광의 몸으로 변합니다. 영광의 몸은 육이 지배할 수 없는 몸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빌립보서에서는 우리의 몸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때까지 그리스도인들은 육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실패해도 좋다는 말은 아니지만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기 전까지는 우리가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일서 1 8~10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9절의 말씀처럼 죄를 자백합니다. 이 죄를 자백하는 자백은 거짓이 없습니다. 다윗은 분명히 하나님 앞에서 내 죄라고 했습니다. 다윗을 정직했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기 때문에 정직한 고백을 사하신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우리들에게는 구원받았을지라도 회복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다윗도 베드로도 둘 다 하나님께 확실하게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에게 육에 대응하는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로마서 6,7장에는 영과 육에 관한 문제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육을 죽이라고 했습니다. 육은 죽이는 것 외에 방법이 없습니다. 저는 이전에 이런 식으로 가르침을 받았는데, 어느 두 나라가 전쟁을 했습니다. 그 전쟁에 참여한 군인에게 자기편이 처음에는 이겼지만 나중에는 적에게 공격을 받아가지고 이 사람이 움직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적군의 장교가 전장을 다니면서 살아 있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를 조사했습니다. 그 때 전장에서 움직일 수 없게 쓰러져 있는 아군이 눈을 떠 보니 적군의 장교이기 때문에 죽은 척 했습니다. 그 때에 아군이 진지를 폭격을 했습니다. 이번에는 상황이 바뀌어서 아군측 장교가 죽은 자 가운데 산 자가 있는지를 조사하러 왔습니다. 그 때에 이 사람이 눈을 뜨고 반응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만약 육이 반응을 할 때 육에는 죽은 것처럼 반응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미 죽었기 때문에 육이 부를 때에는 반응을 하지 않는다고 제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마치 죄의 유혹이 올 때에는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에 죄의 유혹에는 죽은 자처럼 반응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육이 있는데 육을 죽인다는 것은 이런 방식으로 육을 죽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부르면 예! 하고 금방 대답을 하면 좋습니다. 육이 만약에 질투라든가 자기 주장이라든가 갈라디아서에 있는 그런 육의 성질이 부르게 되면 죽었다는 신호로 응답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로마서 6,7장은 어렵기는 하지만 요지는 육을 죽이는 것인데, 죄가 만약에 부추기게 되면 거기에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이 요지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성령의 인도하신 바가 되면 육을 따르지 않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갈라디아에는 가르치는 문제가 있었는데 육을 자랑하는 것이었습니다. 할례를 받아도 좋다는 등 구약으로 돌아가는 것들입니다. 우리들은 육 안에서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아래에서 생활하는 것입니다. 그럼 성령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지고 인도를 하겠습니까? 말씀입니다. 우리들이 구원받은 것은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베드로는 분명히 말했습니다. 헛된 인생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은 복음으로서 말미암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에 보면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 바울이 장로들에 한 말 중에

2032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우리가 기업을 잇게 되는 것은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0장은 사도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을 초청해서 목회의 방법을 일러주는 내용입니다. 바울이 떠나게 되면 흉악한 이리가 들어와서 성도들을 해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것이라고도 말했습니다. 바울은 내가 가르친 것을 기억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기억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여기서 기억하는 것은 바울이 각 사람들에게 훈계하며 가르치던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장로들을 어떻게 인도하는고 하니 나에게 편지를 보내면 당장을 한다는 식으로 말한 것이 아니고 이제 만날 수 없기 때문에 은혜의 말씀께 부탁을 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믿는 자들을 든든히 세워서 그 기업을 잇게 하시리라고 말했습니다. 장로들이 말씀을 교제합니다만 말씀 그 자체가 성도들을 가르치고 세우고 기업을 잇게 한다는 것을 또한 말하는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들을 지켜주기도 하고 인도해 주기도 합니다. 바울은 말씀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물론 바울 자신의 말이기도 하지만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양육할 때 즉 목회할 때에 말씀을 사용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4 26,27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여기는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있던 일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동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모았다고 해도 믿지를 못했습니다. 이로 보아서 그 당시에 제자들 중에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던 사람들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베드로도 마리아도 그 외 제자들도 그 당시에는 믿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고 이 두 사람도 그러했습니다. 주님은 이 두 제자를 긍휼히 여기셔서 모습을 바꾸어서 나타나주셨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성경 전체에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목회의 방법입니다. 구약 성경에 예수님에 관해 예언되어 있는 전체를 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이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하는 것입니다. 이 두 사람과 함께 식탁에 앉았을 때 이들의 눈이 뜨였습니다. 말씀은 눈을 뜨게 하는 것입니다. 때때로 모임을 형제들의 모임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모임을 형제들의 단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형제라고 부르기 때문에 형제교회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말씀에 따라서 형제자매라 부르는 것일 뿐이지 형제 자매들의 조직 가운데 있는 형제 자매들이 아닌 것입니다. 모임은 말씀을 순종한다는 것이 토대가 되어야 합니다. 능숙한 설명은 아닙니다만 저는 종종 오끼나와에 전도를 돕기 위해 방문합니다.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오끼나와에 있는 그리스도센터라는 조직 가운데 일부가 모임에 영접되고 싶다는 의사를 타진해왔습니다. 30명 정도가 그리스도센터라는 조직에서 모임으로 옮겨왔습니다. 그 때 오끼나와 모임은 그 사람들에 대해서 실패했습니다. 원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말씀에 근거해서 영접을 했어야 되는 것인데 30명을 한꺼번에 영접을 했기 때문에 실패를 한 것입니다. 말씀에 따라 모인다는 것을 그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영접을 해버린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모임에 영접된 지 8년 정도 지났을 즈음에 그 사람들은 다시 모임에서 나가버렸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이 한 사람 한 사람씩 말씀을 인정하고 모임에 영접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룹으로 영접되었기 때문에 말씀이 어떠한지를 몰랐던 것입니다. 8년 정도 가르쳤지만 그 사람들은 자기들이 이전에 생활하던 것이 상황이 좋지 않기 때문에 더 좋은 상황으로 바뀌었다 정도로만 생각을 하는 것이 그 사람들의 사정이었고 말씀을 근거로 해서 바뀐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전에 그리스도의 센터라는 곳에서 나오는 것과 모임에서 나가는 것에 대해서도 저항감이 없었습니다. 말씀을 근거로 해서 산다면 상황이 어떻던 그대로 살 것이지만 상황에 따라서 산다면 그 상황에 따라서 옮기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모임에 나갔다가 최근에 들으니까 또 거기서 다른 곳으로 나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토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으로 반듯하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영접할 때에 모임이 말씀대로 한다는 것은 인정할 때 영접하면 그것은 안전한 것입니다. 저는 저의 경험으로 알게 되었는데 모임에 영접할 때 집단적으로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적으로 영접해야 된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의 목회에 문제가 있습니다. 도마에 대해서

요한복음 20 27,28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도마는 차가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전에 주님이 제자들 가운데 나타났을 때 도마는 거기에 없었습니다. 주님을 만난 제자들이 도마에게 주님이 부활하셨다고 증거를 했습니다. 도마는 그 못자국을 보고 그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여드레 후에 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 때는 주님이 도마를 목회하셨습니다. 주님은 정말 겸손하셔서 도마의 눈높이까지 주님의 눈높이를 낮추셨습니다.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도마의 입장에서 도마의 수준으로 내려가서 도마를 목회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면 주님은 완전한 목자이셨습니다. 이 때 도마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주님을 고백했습니다. 믿음의 고백의 아주 짧은 말입니다. 이 때 주님은 말씀과 실제를 가지고 도마의 믿지 않는 상태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24장의 믿지 않는 두 제자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본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이러한 연약함의 일면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향해서는 대제사장으로서 우리들을 늘 중보해주십니다. 주님은 이와 같이 목자장으로서 오늘날도 우리들을 돌보아주시는 것입니다. 모임의 장로들은 이 예수님 밑에서 일한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 베드로서를 보면 예수님을 목자장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5 3,4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여기에 목자장이라고 나와있습니다. 목자의 일을 한 사람들은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모임의 장로들은 그 일이 힘이 듭니다. 말씀으로 형제자매들은 인도한다는 일이 있는 것입니다. 도마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모임에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목자들은 겸손한 마음으로 그 사람들을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목자의 일을 하게 되면 여러가지 피해도 느끼게 됩니다. 주님처럼 때로는 방문하거나 교제를 해도 어떤 경우는 차갑게 대우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오해를 받을 수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공격의 표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목자의 일은 중요한 일입니다. 5절에 보면 젊은이들에게 장로들에게 순복하라고 말씀합니다. 물론 장로들도 겸손해야 되고 젊은이들도 겸손해야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장로들은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양들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말씀을 공급해야 합니다.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주님이 은사를 주셔서 놀라운 일을 하게 하는데 여기에는 성령의 능력도 있습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들에게 육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자들은 이러한 것들을 통찰한 가운데 목자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바울은 때때로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된다고 예견을 하면서 행동을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침례를 베풀 때 일부러 몇몇 사람들에게만 침례를 주었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나중에 바울파가 생기지 않도록 침례를 주는 단계에서 예견을 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장로들은 예견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경제적인 면에서 민감한 생각을 가진 고린도 성도들로부터는 물질을 받지 않았습니다. 고린도 성도들 가운데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일어났을 때 바울을 향하여 바울은 돈 때문에 활동했다는 비난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고린도 성도들로부터는 돈을 받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20장에 주는 자가 복이 있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주님이 가르치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일을 하면서 실천해 보인 것입니다. 장로는 이와 같은 예견도 필요한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 13,14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여기에 보면 장로들이 권면하고 권계하며 약한 자들은 안위하고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장로들의 일의 내용입니다. 보통 일반 교회의 목자처럼 지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인도하는 장로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게 하면 피차간에 유익을 얻습니다, 장로들도 육이 있기 때문에 결점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책망하면 안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영과 육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리고 육을 죽인다는 것을 원칙으로 생각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만약 실패하는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다지 비판하지 않고 적절한 대책이 강구될 것입니다. 만약에 이러한 것들을 인정하게 되면 동정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의 무서운 점은 반드시 인정을 해야 합니다. 다윗에게도, 베드로에게도 육이 있었습니다. 물론 믿지 않는 사람들은 육의 덩어리이지만 믿는 사람들도 육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인도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어찌하던 육은 죽이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육은 육이라는 것을 반드시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육을 순종하지 말고 말씀을 순종하게 해달라고 주님께 도움을 요청해야 할 것입니다.

(2009년 10월 19일(월) 여수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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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