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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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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

노시로 키요지

열왕기상 13 1~4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하여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 마침 여로보암이 단 곁에 서서 분향하는지라 하나님의 사람이 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가로되 단아 단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저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 제사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고 그 날에 저가 예조를 들어 가로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예조라 단이 갈라지며 그 위에 있는 재가 쏟아지리라 하매 여로보암 왕이 하나님의 사람의 벧엘에 있는 단을 향하여 외쳐 말함을 들을 때에 단에서 손을 펴며 저를 잡으라 하더라 저를 향하여 편 손이 말라 다시 거두지 못하며

여로보암 왕 때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한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았는데 이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리었습니다. 신약에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리운 사람은 디모데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이 하나님의 사람도 젊었고 디모데도 젊었습니다. 디모데는 젊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리면서 열왕기에 나오는 이 사람을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사람은 여로보암 왕조가 멸망하는 것을 예언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여로보암은 우상을 두 군데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자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람이 왔습니다. 그 제단의 재가 쏟아졌습니다. 그 때 왕은 하나님의 사람을 향해서 손을 폈습니다. 그 손은 거기서 그만 말랐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기도하자 마른 손이 나았습니다. 왕은 자기 손이 나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을 자기 집에 초대해서 음식도 대접하고 물도 마시게 하려 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의 사람은 분명하게 거절했습니다. 이 사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일은 이 예언을 하고 나서는 음식도 물도 대접받지 말고 오던 길로 돌아가지 말라고 명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일로 하나님께서 직접 하나님의 사람에게 직접 계시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오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늙은 선지자 하나가 다가왔습니다. 이 늙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을 속였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이르기를 물도 마시고 떡도 먹고 오던 길로 돌아가라고 늙은 선지자는 말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집으로 데려가서 떡도 먹고 물도 마시게 했습니다.

20~24

저희가 상 앞에 앉았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 사람을 데려온 선지자에게 임하니 저가 유다에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을 향하여 외쳐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며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한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돌아와서 여호와가 너더러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 한 곳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셨으니 네 시체가 네 열조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자기가 데리고 온 선지자가 떡을 먹고 물을 마신 후에 그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니라 이에 그 사람이 가더니 사자가 길에서 저를 만나 죽이매 그 시체가 길에 버린 바 되니 나귀는 그 곁에 섰고 사자도 그 시체 곁에 섰더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은 시정하지 않고 변경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기사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직접 하나님께 명을 받았습니다. 말씀대로 했더니 왕의 손은 말랐고 또 고칠 수도 있었습니다. 말씀대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예조가 나타났는데 말씀 그대로였습니다. 늙은 선지자가 와서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도 임했기 때문에 먹어도 된다고 이 사람을 데리고 갔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확신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말씀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 젊은 선지자는 속임을 당했을지라도 말씀을 순종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선배되는 형제 자매들이 하나님께 자기가 말씀을 가르침 받았다고 하면서 젊은 사람들에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우리 가운데 어떤 단체의 우두머리 또는 선배들 가운데도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되게 말한다면 그 말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됩니다. 이 젊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만약 다름 사람이 그것을 말한다면 음미(분별)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 말씀을 들을 때에 말씀을 음미하기를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전한 말씀을 음미하면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분별하면서 끝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람을 심판하지 않는다면 여로보암에게 여로보암이 멸망할 것을 예언한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6~19장에는 하나님의 진노의 기사입니다. 우리들은 그대로 믿습니다. 그것을 왜곡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변경하는 조짐이 보일 때는 이 젊은 사람을 사자를 통해서 죽이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32그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벧엘에 있는 단을 향하고 또 사마리아 성읍들에 있는 모든 산당을 향하여 외쳐 말한 것이 반드시 이룰 것임이니라

이 사람이 한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한 나라에 관한 일이었습니다. 그 나라에 있는 단은 반드시 무너집니다.

34이 일이 여로보암 집에 죄가 되어 그 집이 지면에서 끊어져 멸망케 되니라

여로보암의 왕조가 지면에서 끊어져 멸망케 되니라고 했습니다. 여로보암의 죄라는 것이 북방 이스라엘 왕들의 죄 가운데서 계속 이어져 왔습니다. 남방 유다 왕조의 기록의 기준은 다윗과 같았다 같지 않았다 하는 것이 기준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여로보암의 죄는 그 자손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중요한 예언을 이 하나님의 사람은 그만 가볍게 다루고 말았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전해진 말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 젊은 선지자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말씀의 권위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으로 가면 주 예수님께서는 마귀와 싸우셨는데 여기도 말씀의 권위가 나타나 있습니다.

마태복음 4 5~7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

예수님은 여기서 주님 자신을 나타내도록 시험 받았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나님의 아들다운 일을 해보는 것이 어떠냐?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뛰어 내리더라도 부상을 입지 않을 것이라고 마귀가 말했습니다. 마귀는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어떤 때는 우리들도 말씀을 통해서 시험을 당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잘못된 주장이나 잘못된 해석으로 말미암아 시험을 당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때에는 말씀을 통해서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뛰어 내려도 발이 부딪히지 않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 된다고 대답하셨습니다. 말씀으로 말미암아 사단의 공격을 이겼습니다. 세번 시험을 당하셨지만 전부 말씀을 통해서 대처하셨습니다. 그래서 말씀은 양날의 칼인 것입니다.

에베소서 6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인의 무기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의 검 곧 말씀의 칼로 사단을 물리쳤습니다. 우리는 마귀나 여러가지 반대적인 공격에 대해서 말씀으로 싸우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본을 보이셨습니다. 여기 기록된 대부분의 무기들은 방어무기였지만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은 공격무기였습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승리하는 것입니다. 대적만이 칼을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말씀을 가지고 자기 육을 가르는 것입니다. 공격무기라고 해서 적을 향해서만 검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검을 휘둘러서 자기 자신을 베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자기 자신을 분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육적인 자기를 살려두지 말고 성령의 칼로 자기 자신을 베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에게 베이는 것보다 자기 스스로 자신을 베는 것이 복됩니다. 이로 말미암아 말씀은 놀랍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백부장이 자기 종이 아플 때 그 종을 낫게 해 달라고 주님께 사자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말씀만 하옵소서 라고 하며 제 아래도 부하들이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말씀만 하셔도 낫는다고 했습니다. 그 때 주님의 말씀으로 백부장의 종은 나았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백부장의 믿음 같은 믿음을 이스라엘에서는 만나보지 못했다고 그 백부장을 칭찬하셨습니다. 우리들은 말씀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았습니다. 그래서 말씀으로 믿음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의 구원의 증거를 듣고 감동해서 그것을 흉내 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그 증거인 감정은 그 당시에 감동을 주는 지 모르지만 지속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남의 경험이 반드시 나의 경험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말씀에 감동해서 그것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단순하게 말씀을 믿는 것은 복된 것입니다. 어떤 경우는 이해가 되지 있을지라도. 성경에는 이해 안되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단순하게 믿으면 능력이 됩니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말씀을 들으면 아무도 그 재림을 경험하거나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것을 믿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드러낸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하셨다기보다도 사도들의 말을 통해서입니다. 공중재림에 관한 가르침은 사도 바울이 가르쳐 준 것입니다. 얼마 전에 미국에서 주님의 공중재림 하실 때 일어날 것을 예상해서 소설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있는 것을 여러분이 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 때 일어날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혼란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읽으면 소망이 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맞으러 오실 때 혼란을 야기 시키겠습니까? 그 사람이 쓴 소설 같은 이야기대로 라기보다도 그것을 능가하는 광경이 될 것입니다. 성경에는 주님이 공중재림 하실 때의 광경을 기록하지 않고 오신다는 것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징조에 관한 것들은 지상재림에 관해서만 기록이 되어 있는데 지상재림에는 징조가 있다는 표시들이 성경에 있습니다. 그래서 단순하게 믿으면 기쁨도 있고 힘도 있는 것입니다. 또한 믿은 결과를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형제자매들을 말씀을 가지고 위로할 수도 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위로 받은 사람은 그분이 당한 병이라든가 어려움들이 위로 받는 것으로 없어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 고통이나 고난을 가볍게 할 수는 있습니다 말씀으로 인도를 받게 되면 소망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상대방을 위로하면 그 상대방에게 힘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하면 그분에게 위로도 되고 힘이 되고 능력이 실제로 됩니다.

에베소서에 보면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말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6 18,19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어기에 성령의 층만을 얻으라고 말했습니다. 충만을 받는 것에 대해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성령에 충만되는 것은 말씀으로 충만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황홀한 상황으로 들어간다든지 특별한 경험을 하는 것보다도 말씀으로 충만되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19절에 찬미, 노래, 그리고 서로 화답한다는 말씀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에게는 말씀을 통해서 찬송이 나오며 서로 화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주께 찬송하면 노래하는 것입니다. 술 취한다는 것은 그 사회에 지배를 당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지배를 당하는 것은 이것은 성령에 충만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술 취한다면 이상한 방향으로 나갈 것입니다. 성령 곧 말씀의 충만을 받으면 조금 전에 말씀드린 방향으로 나갈 것입니다.

또한 말씀의 권위에 대해서 요한복음 17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그래서 변경이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기도하신 한 구절입니다. 19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 그리스도도 말씀으로 말미암아 거룩해졌습니다. 모본을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일평생 이 땅에 계실 때 말씀을 순종하셨습니다. 끝까지 순종한 것은 십자가였습니다.

그 십자가의 광경을 이사야 53 10,11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53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가운데 십자가에 관해 자세히 말씀해 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10절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상함을 받으신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이 나와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말씀에 따라 말씀대로 상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뜻이 완성되었습니다. 자기 영혼의 수고하신 것을 보고 기뻐하셨습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겟세마네에서 주님이 기도하셨을 때 아버지 하나님의 대답은 없으셨습니다. 세 번이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대답은 없었습니다. 상하시는 것이 아버지의 뜻임을 알고 십자가로 향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뜻은 우리들에게 말씀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꿈이라든가 환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말씀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는 말씀을 통해서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도 주님처럼 말씀을 통해서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순종한다는 것은 거룩하다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과 우리들을 구원하는 것 때문에 수고하셨고 수고한 것을 보시고 만족해 하셨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최고의 분이십니다. 그분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을 완전히 순종하셨습니다. 이사야 53 10,11절을 통해서만 보아도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하신 분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하다는 것을 아는 것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는 거짓말이 없다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다고 봅니다. 의롭다라는 말의 배경의 뒷받침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신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대단히 무게가 있는 말입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에게 거짓말이 하나라도 있으면 성경은 무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먼저 본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해버렸습니다. 반 정도는 지켰습니다. 그러나 반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셈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젊은 하나님의 사람은 사자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또 하나의 성경의 권위에 관한 것은 요한계시록 22 18,19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일본에 재미있는 유별난 장로가 한 분 있었습니다. 이분은 모임의 진리를 지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모임의 형제들이 그 장로분에게 이와 같이 성경의 말씀을 지킵시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모임의 진리는 주로 서신서에 기록되어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분은 서신서를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모임의 진리를 거절했습니다. 최종적으로 그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분이 하는 말이 마태복음부터 요한복음 까지는 예수님의 말씀이라서 믿지만 그 이후부터는 나는 안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자기 형편에 따라서 말씀에서 더하거나 빼거나 하는 것을 하나님은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그 모임은 점점 사람이 없어져서 그 사람과 그 아들만 남는 모임이 되었습니다. 말씀을 토대로 하지 않으면 모임생활도 믿음 생활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빼서도 안 되고 더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꺼꾸로 생각하면 이와 같이 놀라운 책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원히 변하지 않는 빛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왜곡했는데 그 사람 속에 평안이 있겠습니까?

우리들 손에 성경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갈라디아서를 읽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을 가지고 종교개혁을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종교개혁이 아니고 성경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1800년 경이 될 때 성경말씀을 지키고자 하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성경을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으로 돌아가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영국과 자메이카라든가 여러 나라들에서 모임들이 생겼습니다. 말씀이 드러났지만 그 가운데는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어떤 모임에서는 그 모임의 일치가 깨어졌습니다. 그것도 성경을 잘 알았던 분이 그 모임의 일치를 깨어버린 일도 있었습니다. 어떤 분이 잘못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서 잘못 해석을 하는 일들이 발생했습니다. 그것을 조금 기다렸으면 좋은데 금방 판단해버렸습니다. 새로운 하나님의 빛이 연속적으로 비치고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그만 분열이 생긴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임이 말씀에 서 가는 과정에서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모자라는 부분들이 말씀으로 밝혀짐에 따라 점점 복된 모임들이 생겨났습니다. 말씀에 기록된 것을 받아들일 때 그렇습니다. 문제가 있으면 말씀을 읽고 인내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모임이 시작될 때에는 말씀이 충분하지 않아 논쟁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그 과정에서 반드시 자기를 나타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발생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말을 듣고 말씀을 읽고 말씀을 통해서 분별합니다. 그럴 때 성급하게 하지 말고 인내를 가지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기도하면서 말씀을 읽고 관용하는 마음을 가지고 천천히 기다리면 그 문제가 해결되거나 그 문제가 어떤 문제인지 분명해지거나 할 것입니다.

빌립보 모임의 경우는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 두 자매들은 바울과 함께 일을 하는 분들이기 때문에 열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 그 두 분에게는 가르침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문제 내용을 바울은 기록하지 않았지만 그 두 사람이 화목하도록 권면했습니다. 참된 협력자가 그런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양쪽을 다 잘아는 분에게 부탁했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협력해서 해결해 줄 사람의 이름을 바울은 쓰지 않았는데, 다른 말로 말하면 중간에 누가 개입해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문제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이름은 유오디아, 순두게라고 분명히 기록해 놓았습니다. 양쪽 다 동일한 말로 권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직접 이야기하는 것이 좋지만 어떤 경우에는 중간에 개입자가 있어서 협력하여 해결하는 것도 좋을 수가 있습니다. 빌립보서는 전 장을 통해서 그 모임의 불일치를 일치라는 관점에서의 말씀을 마지막까지 계속 쓰고 있습니다. 빌립보서는 일치의 책입니다. 물론 교제의 서신, 기쁨의 서신이라고 분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하나는 감사의 서신입니다. 바울은 유오디아와 순두게 두 사람의 불일치가 빌립보 모임에 큰 문제가 되면 안되기 때문에 정성 들여서 빌립보서를 썼습니다. 분열은 반드시 막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바알 신이 서로 다투면 그 나라가 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해결은 역시 말씀입니다. 부디 말씀에 기초해서 모임 생활이나 개인 생활을 풍요롭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20091026() 의왕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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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