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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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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과 우리와의 관계

이치카와 토시히사(니이카타)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3:20-21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신약성경에는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에서 두 가지를 대조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들처럼 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2:6-7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처럼 되신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들을 주님처럼 변케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3:21에는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낮은 몸을 가진 사람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장래에 우리의 낮은 몸을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과 같이 변케 해 주시는 것입니다. 양쪽 모두 "같이"라는 말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2장에는 예수님이 우리들 같이 되신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3장에는 예수님이 우리들을 주님같이 변케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대조적인 것, 예수님이 우리들처럼 되신 것과 또 우리들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처럼 변케되는 것 하나, 이 두 가지를 신약성경에서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처럼 변케 하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께서 우리들 같은 몸을 가지셨습니다. 오늘은 신약성경에서 이 두 가지를 중점적으로 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이 우리들처럼 되신 것을 보고 다음으로 예수님이 우리들을 주님처럼 변케하시는 것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예수님이 우리들처럼 되신 것을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14절을 보겠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 말씀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요한복음에서 먼저 예수님의 신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처음도 끝도 없는 영원하신 분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독립된 인격을 갖고 있으면서도 아버지와 동일한 근본인 주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한 만물의 창조자인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한 모든 사람의 빛이신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한 분이 14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고 말함으로써 우리처럼 되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6장에서 하나님은 아무도 볼 수 없고 아무도 접근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1:14절에서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라고 했습니다만 바울은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 말한 바울의 그 하나님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지 않으면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이 바로 요 1:14절의 하나님입니다.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셔서 그 영광을 나타내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우리가 아는 것입니다. 요한은 변화산 상에서 나타내신 주님을 요한복음에서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1:14절에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고 하는 그 영광은 변화산 상에서의 그 영광이 아니고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서 행위와 말에 의해 나타난 인격적인 영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3년 수개월 동안 제자들과 함께 행하시며 나타내신 영광입니다. 여기에 주 예수님께서 우리들처럼 되신 목적이 나타나 있습니다.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사람이 되셔서 우리가 볼 수 있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셋으로 나누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아버지와 영원 전부터 함께 가졌던 영광을 17장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사람으로서 나타내신 영광을 말합니다.

세 번째는 지금 현재 아버지와 함께 나타내는 영광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4절에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라는 그 영광은 말씀이 육신이 된 즉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나타내신 영광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처럼 되신 또 다른 목적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2:14-18절입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히브리서 2장에는 하나님이 우리들처럼 되신 또 다른 면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박해로 말미암아 유대교로 돌아가고자 하는 믿는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완성된 신구약 성경을 갖고 있습니다. 히브리서가 기록될 당시 성도들은 구약성경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히브리서 저자는 구약성경에 근거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일을 말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율법을 갖고 있던 유대인들은 필요 이상으로 천사들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또한 모세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또한 그들이 행했던 의식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히브리서 1장에서는 구약성경을 가지고 아드님의 신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2장에서는 구약성경을 가지고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서 죽음을 맛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또 하나의 목적이 1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을 맛보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서에서 "죽지 않을 것에 거하시고" 라고 하나님을 소개했습니다. 아드님은 어떠하든지 간에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아니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친히 죽음을 맛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사망을 멸하고 사망으로부터 우리를 건지기 위함이었습니다. 또 다른 한 가지 사람이 되신 목적이 1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우리들을 다룰 수 있는 면입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정말로 생각해 주기 위해서는 그 사람과 같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드님이 죄를 제외하고는 모두 우리들과 같이 되어야 하는 것은 동정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히브리서 2장에서 "같이"라는 말이 2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14절에서도 같은 의미의 단어 "함께"가 있습니다. 17절에서도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라고 해서 "같이"가 있습니다.

잠시 동안 주님께서 어떻게 우리들과 같이 되셨는지를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제자들을 보고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하실 당시를 생각하면 주님은 몸을 가지신 것을 우리들에게 보이시는 것이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몸을 가지신 가운데 약함을 드러내시는 것 중에 하나가 배고픔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배고픔을 느끼신 것이 성경에 두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번은 예수님이 공생에 시작하기 직전에 느끼셨으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아 광야에서 40일 금식하며 주리셨을 때 배고픔을 느끼셨습니다. 두 번째는 첫 번째 주리신 이후 3년째 즈음에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면서 배고픔을 느끼셨습니다. 숙박지인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실 때 "예수님께서 시장하사"라고 배고픔을 기록한 곳이 있습니다. 또 주님이 몸을 가진 증거 중에 하나로 피로, 즉 지침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갈릴리와 예루살렘 사이에 있는 수가성을 지날 때 예수님이 길에서 피곤하사 우물가에 앉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주님의 몸을 가지신 약함의 기록 중에 졸림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8장에 갈릴리 호수를 건널 때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곤하여 주무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몸을 가지신 주님께서는 우리들처럼 몸의 연약함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이 몸을 가지시고 경험하신 것은 연약함 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되신 주님은 신성으로 말미암아 전지전능하지만, 사람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유한성도 가지신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한 주님은 사람으로서 한정된 것 밖에 모르는 것처럼 기록된 곳도 있습니다. 마가복음 11:2에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주님께서 나귀의 새끼가 묶여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같은 마가복음 11:13에서 예수님이 배고픔 즉 시장끼를 느끼신 것이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복을 느끼신 주님은 무화과 나무를 멀리서 보았습니다. 거기에 무엇이 있을까 하고 가까이 다가간 다음에야 비로소 열매가 없고 잎만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전지하신 힘을 가지셨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시장끼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지를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들의 지혜로 이해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써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동시에 주님께서는 사람으로서 한계가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멀리서 있는 것은 알았지만 다가가서 열매가 없는 것을 아는 경험도 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만물을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위탁을 받았습니다. 또한 사람으로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실 만큼 가난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마가복음 13장에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지상재림에 관해서는 아들도 모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는 전지하시지만 사람으로서의 주님은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신약에서는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로서 전지하신 주님과 사람으로서 한계가 있는 양면이 균형 있게 언급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셨습니다. 조금 전에 읽었던 빌립보서 2장에서는 주님이 사람이 되신 또 하나의 목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본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죄를 제외하고는 우리와 같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우리의 본으로 삼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으로서 완전한 삶을 사신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이분을 본받을 수가 있습니다. 곤란과 어려움을 직면할 때에 주님께서 어떻게 하셨는가를 통해서 우리들이 곤란과 어려움을 만날 때 어떻게 할 것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이어서 또 하나를 보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모습을 예수님처럼 변화시켜 주시는 것을 보고자 합니다. 우리들은 비참한 죄인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십자가의 피로 우리들을 구속해 주셨습니다. 머지 않아 예수님의 우리들의 몸을 영광의 주님의 몸처럼 변케 해 주실 것입니다.

 

로마서 8:28-30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9절에 보면 "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들이 예수님의 모습처럼 바뀌는 것에 대해서 아버지 하나님의 관점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계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원한 계시에 대해서 여기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물이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의 뜻 안에서 우리들 각자가 아버지의 마음 속에 있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들이 태어나기 전에 우리들의 모든 것을 아셨습니다. 인격, 성격 우리들의 본질에 대해서 말입니다. 우리들이 존재하기 전에 그 아드님 안에서 우리들을 이미 알고 계셨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우리들을 알고 계셨을 뿐만 아니라 어떤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 아버지의 길을 마음 속에 그리고 계셨습니다. 29절에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궁극적인 목적이 그려져 있습니다. 30절에는 하나님의 경륜의 길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하나님 앞에서의 영화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특권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경륜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아들을 닮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그 아들과 같이 되는 일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썩을 몸이 썩지 않을 몸으로 변하는 것, 낮은 몸이 영광의 몸으로 변하는 것,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을 거둔다는 약한 것에서 강함으로의 변화, 혈육이 있는 데서 영적인 몸으로 변하는 변화, 이러한 길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 아버지 안에 감추어져 있었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주의 영광으로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라고 말하면서 바울은 여기서 성령의 역할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의 변화는 몸의 영화로운 변화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는 저와 같은 형상으로 변하는데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는 주님의 덕스러움의 닮음에 대한 변화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속에 내주하신 성령은 그리스도를 닮도록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여 인도합니다. 이것은 미래에 관한 영광이 아니라 현재 믿음 가운데 살면서 나타내는 영광을 말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노력이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영으로 말미암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6절을 읽지 않았습니다만 주님의 영광의 모습으로 변하기 위해서 우리들 측에서 해야 될 책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주님께로 향하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음과 의지를 주님께로 향하는 것, 곧 주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의 큰 책임은 거울처럼 주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가리워진 것이 거두어져야 합니다. 이점에서 이스라엘은 큰 실패를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경을 살피는데 열심이었습니다. 그들은 매 안식일마다 성경을 읽었고 율법학자들은 그 성경을 해석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가진 것으로 만족해서 그것을 실행하는 데는 소홀했습니다. 우리들은 믿음생활 하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실패를 반복할 위험성이 있습니다. 말씀을 갖고 있는 것으로 만족해서 말씀을 실행하는데 소홀히 할 수 있는 위험성입니다. 바울은 말씀을 해설하는 최고의 사람이었음과 동시에 말씀을 실행하는 최고의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 받는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순교자 스데반은 순교를 당할 때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향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아갔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했던 스데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반사할 수 있었습니다. 스데반이 순교할 때 그 놀라운 모습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모습의 반사였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향할 때 주님의 영광을 반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로 향할(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혼란이나 시련이 있을 때 주님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의 마음이 주님을 향할 때 연약함이 있어도 주님의 영광을 반사할 수 있습니다.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라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주의 영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다시 빌 3:21절로 돌아가겠습니다.

우리들을 위해 역사하는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 즉 일하는 힘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의 그 능력은 말씀 안에서의 힘입니다. 사람으로서 이 땅에 계실 때에도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었습니다.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는 이 사건은 예수님이 공중에 오실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우리의 시민권(국적-일본어성경)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예수 그리스도가 공중에 오실 때 살아 남아있는 우리들은 예수님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화될 것입니다. 죽어 있는 성도 곧 자는 성도들은 부활한 다음에 예수님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화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낮은 몸을 전능의 능력으로 주님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하실 것입니다. 그 때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은 있는 그대로 주님의 영광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 몸이 주님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화될 때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관여하는 것을 우리들에게 나타내었습니다. 로마서 8장에서는 우리가 주님의 영광의 몸처럼 변함에 있어서 아버지 하나님의 관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나타냄에 있어서는 고린도전서 3장에서 성령이 역사하는 것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빌립보서 3장에서는 주님 자신이 공중에 오실 때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화시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영원 전부터 계획하셨습니다. 그 정거로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성령은 우리 속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도록 인도하십니다. 머지않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의 영광의 형체와 같이 변케하실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아드님이십니다. 그분이 2천년 전에 우리와 같은 몸으로 사람이 되셨습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우리들에게 보이기 위함이었습니다. 죽음이 없는 하나님이 죽음을 맛보시고 우리들을 사망으로부터 건지기 위해서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죄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우리와 같이 되셔서 우리를 동정하기 위하여 즉 대제사장이 되기 위하여 몸을 가지신 것입니다. 지금 주 예수 그리스도는 영광으로 넘치고 있습니다.

지금 영광 가운데 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가 머지않아 우리들을 맞으러 오실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뜻을 세우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그 아드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증거로 우리 가운데 성령의 인을 주셨습니다. 성령은 우리들이 약하지만 이 땅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도록 우리 가운데 내주하셨습니다. 머지않아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맞으러 오실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우리의 낮은 몸이 주님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화될 것이며, 낮은 몸에서 영광의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썩을 몸에서 썩지 않을 몸으로 변할 것입니다. 약한 몸에서 강한 몸으로 변할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죄를 범할 수 없는 죽을 수 없는 몸으로 변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위해서 얼마나 원대한 계획을 세우셨습니까? 또한 하나님은 우리들을 위해서 얼마나 놀라운 일을 실행해 주셨습니까? 또한 하나님은 얼마나 놀라운 약속을 하셨습니까?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모든 성도가 함께 변화되어서 직접 주님의 그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들의 관계를 두 가지 관점에서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들과 같이 되신 것, 또 하나는 예수님이 우리들을 예수님의 영광의 몸처럼 변화시키는 것. 우리들에게는 놀라운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은 살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2015524일 강서모임 말씀집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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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