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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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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카와 토시히사

오후 시간은 내가 원하는 것과 주님의 뜻이라고 하는 주제를 통해서 인도받겠습니다.

요한복음 11:41-42절입니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나사로를 부활시키기 전에 아버지 하나님께 드린 감사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이 예수님의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뭘 원하셨는지, 무슨 말씀을 들으셨는지 구체적인 표현은 없습니다. 11장 전체를 감안해서 생각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 예수님의 원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부활시킴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항상 내 말을 들으신다는 것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일을 하시기 전에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그 말씀을 드리고 일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스스로 아버지 하나님께 말씀드리지 않고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일을 하실 때 예수님 그 자신의 권위만을 가지고 일하신 적이 없습니다. 대부분 일을 하시기 전에 아버지 하나님께 말씀을 드린 다음에 그 일을 행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께 예수님이 하신 일을 통해서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주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인 모본입니다. 능력이 있으신 주님은 늘 일을 하시기 전에 아버지 하나님께 의탁하셨습니다. 하물며 우리는 예수님이 이러할진데 더욱더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 일을 하기 전에 말씀을 드리는 것이 합당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상생활 모든 일을 할 때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위탁해서 일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에서 이 세상 사람들의 기도와 참된 하나님의 사람의 기도의 차이를 말씀하시며 이 주님이 하신 말씀에서 이 세상 사람들의 기도의 목적은 기도하는 사람의 원함이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의 일차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뜻과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 일차적인 뜻이어야 할 것입니다.

이 기도를 가르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너희가 구하기 전에 너희 아버지께서 아신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으로 삼으신 그분께서는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신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4장 6절에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는 아버지 하나님께 너희의 기도를 하나님 아버지께 아뢰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의 필요를 알고 있는 그분에게 우리의 필요를 구해야 되는 이유는 어디에 있겠습니까?

모든 일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그분께 우리의 모든 일을 구할 때는 무언가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간구를 위해서 열심히 필요를 생각하고 기도할 때, 우리는 그 기도의 노력을 통해서 내 기도의 동기, 그리고 목적, 필요성 그리고 불필요함 등 기도하는 그 자신이 그것을 이해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 기도의 노력 안에서 하나님의 뜻 안에서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하기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도바울이 빌립보서 4장 6절에서 권면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는 그분에게 모든 일에 우리의 필요를 기도로 아릴 것을 권면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곳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합니다.

요한복음 11장 42절에서 “아버지 하나님이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이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항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완전하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왜 아버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를 항상 들어주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이 항상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주시는 이유를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 30절에서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에서 분명하게 증언했습니다. “나의 원하는 대로 하려 하지 않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령 예수님 그 자신에게 아버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 다른 것이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려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하나님 아버지가 원하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가 원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고 아버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모르는 가운데 예수님이 원하는 대로 택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요한복음 6장 38절에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여기서도 아버지 하나님의 뜻과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구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원하는 것을 하려 하지 아니하시고 아버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려 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곳 더 요한복음 8장 29절로 가겠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여기서도 아버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항상 행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시고자 하는 그 일은 항상 아버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증언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과거부터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존재했습니다. 완전한 독립된 인격의 신성을 갖고 계셨습니다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은 아버지 하나님의 신성과 완전히 동일한 신성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전혀 다르지 않는 완전한 신성을 독립적으로 갖고 계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완전하고 가장 훌륭하고 가장 아름다운 것은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일치입니다. 이 세상에는 완전한 독립된 인격을 갖고 있으면서도 완전한 일치를 보인 존재는 아버지 하나님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전지전능을 가진 아버지 하나님과 전지전능을 가진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일치 가운데 있습니다. 사랑에 있어서도 거룩함에 있어서도, 능력에 있어서도 지혜에 있어서도, 일에 있어서도, 그리고 생각함에 있어서도 완전히 일치되는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자로 이 땅에 오셨을 때 다음과 같이 증거되었습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니라고 증거했을 때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입장은 달랐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분이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입장이 달랐습니다. 보냄을 받은 입장에서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주도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보냄을 받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할 책임이 있었습니다.아버지 하나님이 독생자를 이 땅의 사람으로 보내셨을 때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입장에서 달라서 아버지는 보내신 분이고 아들은 보냄을 받은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니라 증언하셨습니다. 가령 입장이 달라도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경우는 이 인간 세계에서는 입장이 다른 입장이라면 각각의 원함이 다른 것이 필연적이야 아닙니까? 보내는 분의 원함이 있고 보냄을 받은 분의 원함이 있는 것이 일반적으로 보면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 스스로는 보내신 아버지와 보냄 받은 예수님이 하나라고 증언했습니다. 방금 확인한 여러 말씀에서 확인되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떠나서 아버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언제나 아드님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면 때때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생각을 훨씬 능가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10절을 열어봐 주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여기에 주님의 뜻이 이사야에 의해서 예언되었습니다. “그로 상함받게 하시기를 원하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즉 하나님이신 주께서 뜻을 가지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만족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어떤 것보다도 그 아드님을 사랑하셔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직접 독생자를 향해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오 내 기뻐하는 자라고 증언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아들을 기뻐하는 아버지 하나님이 그 아들을 상하게 하는 것을 원한다는 뜻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누가복음 11장 11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7장 11절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모는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53장 10절에서는 아버지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아들이 상함을 받는 것을 원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나 구약에서나 아버지 하나님이 독생자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있습니다.

에스겔은 에스겔 33장 11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리 같은 죄인들이 멸망하는 것보다도 오히려 사랑하는 아들이 상함을 받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상하게 하는 것은 그 아버지 하나님에게 말로 할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이 들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고난을 당하고 사랑함을 받는 것은 그 아드님에게도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언자인 이사야는 그 뜻을 행하기를 원한다고 기록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누가복음 22장 42절에는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 얻은 이자를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겟세마네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는 아버지 하나님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입장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들을 위해서 독생자를 심판하는 입장에 계십니다. 십자가 위에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을 위해서 심판을 받는 죄로 죄라는 입장에 서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는 아버지 하나님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심판하는 입장과 심판을 받는 입장이라고 하는 차이입니다.

겟세마네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는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심판받는 것을 염두에 두고 기도하셨습니다. 이때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께 그 마음을 솔직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고난을 받을 수 있는 그 고난의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솔직하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기서도 예수님은 내 원대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원이었습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것을 감사하나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능력 있는 일을 하실 때는 예수님은 늘 아버지 하나님께 아뢰고 다음의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아버지가 들으심으로 말미암아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시는 일이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항상 아버지께 기도한 다음에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능력을 가지고 기적을 행하시는 것과는 성질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은 아들을 상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이 아드님에게는 말로 행할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기까지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말하기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권면했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말하므로 예수님의 원함을 들어주시기를 일단 기도했어요.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이것이 예수님의 원함이었습니다. 그 이후에 예수님은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원함을 나타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는 말씀의 진실함을 여기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과거에서는 아버지 하나님과 독생자께서는 같은 입장에 있었습니다. 영원히 완전하시고 거룩하시고 같은 입장에 계신 그 시점에서는 하나였습니다. 완전히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죄인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는 아버지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을 상하게 하는 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우리들의 죄에 속함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뜻을 아시고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독생자를 보내시는 쪽에 계시고 아드님은 아버지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로서 이 땅에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셨습니다.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아드님에게 보내는 입장에서 늘 뜻을 아드님에게 나타내셨습니다. 아드님은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따라 항상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위에서는 하나님 아버지는 아드님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이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뜻을 잘 아셨습니다. 아드님은 이 일을 행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에서 땀이 땅에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될 정도로 기도하시면서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를 마무리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큰 과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원을 택할 것인가 주님의 뜻을 택할 것인가라고 하는 선택의 문제라고 하는 과제가 있습니다. 겟세마네에서 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믿는 사람들의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면서 왠지 여러 모양에서 그리스도인들의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들을 경험합니다.

나의 우리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반복하고 반복하면서 아버지 하나님께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원하고 원해도 응답이 없는 것을 때때로 경험합니다. 이때 우리는 바울의 경험을 떠올립니다. 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바울에게 이 가시는 큰 어려움이 수반되는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바울은 이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하나님께 세 번 기도합니다. 바울의 가시가 제거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우리에게 구원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너희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이죠. 바울의 기도는 직접적으로는 응답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세 번 기도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뜻이 바울에게 응답됐습니다.

“내 은혜가 내게 족하다”고 하는 응답이었습니다. 약할 그때에 강하다고 하는 하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바울 몸에 있는 귀찮은 가시를 없애달라고 바울은 세 번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은 바울의 기도를 들으시고 예수님의 뜻을 바울에게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놀라운 경험들이 많았습니다. 셋째, 하늘에까지 끌려 올라간 경험도 있었습니다. 바울이 받은 계시가 너무 크기 때문에 자고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바울의 몸에 주님이 가시를 주셨습니다. 바울은 이 하나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의 약함을 자랑한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이로 말미암아 주님의 뜻을 알고 이 주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더욱더 진보했습니다. 우리들이 우리들 그리스도인들 삶에서 주님의 뜻이 무언가에 대해서 우리에게 일러주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39절과 40절을 열어주시기 바랍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38절에서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9절과 40절에서 아버지의 뜻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보냄을 받은 분으로서 예수님에게 주신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을 나중에 다시 부활시킨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기록을 보면 예수님은 어떤 경우에 있어서든지 간에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뜻을 우리는 알고 격려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21장을 열어 18-19절을 봉독하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이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어떻게 죽는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시몬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이 말씀 가운데 특징적인 것이 있습니다. 젊어서는 원하는 곳으로 베드로가 다녔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늙어서는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시몬 베드로가 순교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못 박히는 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인 것을 알았습니다. 사람으로서 인자로서 예수님에게는 예수님의 원함이 있었습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기소서”라고 하는 예수님의 원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하나님의 원대로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젊어서의 시몬 베드로의 삶과 늙어서의 시몬 베드로의 삶을 대비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개성이 강한 제자였습니다. 대단히 두드러진 제자였습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금방 입으로 뱉어내고 금방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베드로는 실패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해 버렸습니다. 이것은 시몬 베드로에게 가장 큰 시련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믿음을 위해서 예수님은 기도하셨습니다. 회복된 시몬 베드로는 목자로서 주님께로부터 위임을 받았습니다. 이 시몬 베드로에게 네가 늙어서는 이라는 말을 시몬 베드로는 들었습니다.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시몬 베드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를 나타낸 말씀이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은 시몬 베드로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 원대로”라고 하는 주님의 뜻, 이 말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큰 과제입니다. 지금도 믿음 생활 가운데 생각대로 안 되고 바라는 대로 안 되고, 원하는 대로 안 되는 경우들이 많은 것을 경험하셨을 겁니다.

바울은 바울 몸에 주어진 가시를 위해서 세 번이나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은 세 번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저는 기도의 많은 경우의 목적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달라고 하는 것보다도 기도의 진정한 목적은 주님 앞에 어떻게 기도할지를 생각하고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순종해서 주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그 힘을 달라고 하는데 기도의 큰 목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히브리를 쓴 기자는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기도에 대해 기록하였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큰 눈물과 통곡으로 구했는데 거기에 응답됐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는 그 기도의 응답을 위해서 아버지 하나님은 독생자에게 능력을 힘을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일생을 통한 생각해야 될 과제가 있습니다. 나의 뜻과 주님의 뜻에 있어서 어느 것을 선택할지 하는 선택의 과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나의 원대로 마시고 하나님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모임의 형제자매님들은 각각 십자가를 지고 믿음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각 성도님이 지고 있는 십자가는 다른 성도님이 상상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 형제님에게 이렇게 행하시는가라고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왜 주님은 이런 것을 내게 주시는가라고 하는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 주시기를 하고 내가 바라는데 왜 그렇게 안 해주시는가라고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인데 이러한 경우에 바울의 권면처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하는 말씀이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들의 필요를 모두 알고 계신 그분에게 모든 것을 알리는 우리의 기도의 목적은 바울처럼, 예수님처럼, 그로 말미암아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알고 뜻을 이해할 뿐 아니라 그 뜻을 받아들이고 그 뜻을 순종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부활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님들의 삶은 성도님들이 원하는 방식이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가 아닐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연약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를 통해서 나타내시고자 하고 계십니다. 모쪼록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순종해서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는 길이 되면 좋겠습니다.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을 놓고 과제로 생각하는 이 과제는 저 자신의 나 자신의 평생의 과제입니다.

 

3일 동안 신세를 졌습니다.

일본에 돌아가셔도 미력하지만은 형제자매들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복주시길 바라면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강서모임  - 말씀 - 10월 9일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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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