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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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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반의

짐 베이커

오늘 저녁에도 여러 성도님들의 얼굴을 뵙게 되어서 감사드리며,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이번 주간에 우리들은 한 사람의 생애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야곱입니다. 그는 우리가 참고할 만한 중요한 인생을 산 사람입니다. 물론 여러 번 실패도 했습니다만.

지난 시간에 창세기 28장을 통해서 그의 생애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그 다음 장인 창세기 29장에서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29장을 시작하기 전에 그동안 있었던 몇 가지 사실을 언급하고자 합니다.

28장에서 야곱은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형 “에서”를 피해 도망가는 중입니다.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잠시 동안만 피해있으면, 곧 돌아오게 될 것이다” 야곱의 생애의 여러 문제들은 어머니 리브가의 잘못된 제안에 기인한 것이 많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이제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합니다. 그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데에는 21년의 시간이 걸립니다. 21년 후에 야곱이 돌아왔을 때에는 어머니 리브가가 이미 죽은 후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 여행은 500마일이나 되는 여행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발달된 교통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야곱은 걸어서 가야 했습니다. 그 도중의 자세한 내용을 성경이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창세기 28장은 그 여행 중의 한 사건만 강조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은 야곱의 생애를 통째로 바꾸게 됩니다. 즉 야곱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게 됩니다. 이 시간에 모인 성도님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개인적으로 다루신다는 점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경험하여 죄 용서를 받지 않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야곱이 발행하여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러 본즉 들에 우물이 있고 그 곁에 양 세 떼가 누웠으니 이는 목자들이 그 우물에서 물을 양 떼에게 먹임이라 큰 돌로 우물 아구를 덮었다가 모든 떼가 모이면 그들이 우물 아구에서 돌을 옮기고 양에게 물을 먹이고는 여전히 우물 아구 그 자리에 돌을 덮더라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형제여 어디로서뇨 그들이 가로되 하란에서로라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홀의 손자 라반을 아느냐 그들이 가로되 아노라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가 평안하냐 가로되 평안하니라 그 딸 라헬이 지금 양을 몰고 오느니라 야곱이 가로되 해가 아직 높은즉 짐승 모일 때가 아니니 양에게 물을 먹이고 가서 뜯기라 그들이 가로되 우리가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떼가 다 모이고 목자들이 우물 아구에서 돌을 옮겨야 우리가 양에게 물을 먹이느리라”( 29:1-8).

이미 말씀드린 대로 이 여행길은 500 마일입니다. 이 거리를 걸어서 가면 최소한 3주가 걸립니다. 그가 약 이틀 반을 갔을 때 하나님을 만나는 놀라운 경험을 벧엘에서 하게 됩니다. 이 경험은 그의 생애에 잊지 못할 인상을 남기게 됩니다. 벧엘사건을 기록한 후 성경은 이제 여행이 다 끝난 때를 묘사합니다. 29 1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야곱 이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러” 거기에는 양 세 때가 누워 있었습니다. 목동들이 양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우물가에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그들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기 어머니의 친족임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여정을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이끌어”( 28:15).

29장에 나와 있는 모든 내용을 다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성도님들께서 이 부분을 펴놓고 말씀을 들으시면 이해할 수 있으실 겁니다.

야곱은 라헬이라는 젊은 아가씨를 만나게 됩니다. 그녀는 아버지의 양떼에 물을 먹이기 위해서 우물가로 오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야곱은 곧 그녀가 바로 어머니와 친족인 것을 알게 됩니다.

라헬은 이 소식을 아버지 라반에게 알립니다. 야곱은 라헬을 잡고 입을 맞추고 울었습니다. 이제 라반이 달려와 깜짝 놀라며 야곱을 껴안고 또 입을 맞춥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족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갖게 하신 애정입니다. 세상은 요즘 이 가족들 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에 역행하는 일을 자주 행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한 가정 내에서 태어나 자라고 사랑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자기 가정을 세우고자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외삼촌 라반과 약속을 맺습니다. 당시에는 아내를 얻는데 지참금을 내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야곱이 7년간 라반에게 봉사하는 조건으로 라헬을 아내로 얻는 약속을 합니다. 그는 충성스럽게 7년 동안 봉사합니다. 이를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년 동안 라반을 봉사하였으나 그를 연애하는 까닭에 칠 년을 수 일 같이 여겼더라”( 29:20).

여기서 잠깐 이 점을 강조하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야곱이 그 긴 세월을 짧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주님을 위해서 해야 하는 여러 가지 임무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같은 일들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을 섬기면서도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은 왜 그리 힘이 드느냐? 이게 결국은 무슨 소용이 있는 일이냐?”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보통은 주님을 섬기는 봉사가 반복적이고 지루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일을 해내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주님을 진정 사랑한다면, 그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보내신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한다면, 마치 야곱이 7년을 수 일처럼 여겼던 것처럼 일할 것입니다. 우리의 섬김을 아주 짧게 여기며, 쉬운 일로 여기며, 봉사를 기뻐할 것입니다.

7년이 지나자 야곱은 결혼식을 하게 됩니다. 당시 결혼식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당시 결혼식에서 신랑이 신부를 제대로 볼 수 없었습니다. 야곱은 밤중이 되어서야 신방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이 신부가 라헬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7년 동안이나 일했던 목적이 라헬과 결혼하기 위함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잘 아는 외삼촌 라반이 그를 속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며칠 전부터 계속 살펴보고 있는 야곱의 생애의 특징이 무엇인지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어머니 리브가가 아버지 이삭을 속이기 위해서 야곱의 몸에다가 수염소 털을 입혔던 사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아버지 이삭은 눈이 어두워서 야곱인지 에서인지 구분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야곱을 축복하면서 에서라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야곱은 매끈한 사람이었지만 에서는 털이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는 염소털로 꾸민 야곱을 에서라고 생각하고 장자의 축복을 했던 것입니다. 그 때 속임에 가담했던 사람이 이제는 속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아마 라반이 야곱보다 속이는 데는 더 뛰어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와 같은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6:7). 야곱은 자기가 심은 것을 거둔 것입니다.

라반은 이렇게 변명했습니다. “우리 지방에서는 다 이렇게 한다” 이제 어떻게 해야 될까요? 라반은 이렇게 제안합니다. “다시 7년을 봉사하면 라헬을 주겠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기 때문에 또 7년을 봉사하기로 기꺼이 약속합니다. 그 다음에 야곱이 겪은 사건들이 나오며 그것은 우리에게 매우 실제적인 교훈을 줍니다.

야곱은 칠 일 후 라헬과 결혼하고 7년을 봉사합니다. 그리고 빌하와 실바를 취해 자녀를 낳게 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읽고 성경이 한 남자가 두 여자를 취하는 것을 허락하셨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이후 제정하신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흙으로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의 갈비뼈에서 아내를 만들어서 그에게 주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가정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변함없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야곱의 가정에 일어난 일부다처에 대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 일이지만, 이와 같은 상황을 허락하셨다고 이해하셔야 합니다.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 형을 투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30:1).

가정의 구성원들 사이에 서로 감정적으로 용납하지 못할 때, 불화하는 일들이 생깁니다. 가족이라는 매우 친밀한 관계 속에서도 서로 종종 용납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이를 분명히 말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내는 기꺼이 자발적으로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가정은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기본적인 단위입니다. 가정에서의 삶의 구조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며 하나님은 이를 축복하십니다. 그러나 라반의 집에서 살고 있는 야곱의 가정은 그렇지 못합니다.

창세기 29장에 4명의 자녀가 태어납니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네 사람입니다. 이들은 다 야곱의 첫 번째 부인 레아의 소생입니다. 그리고 30장에서 이제 질투가 시작됩니다. 라헬이 자식을 낳지 못했기 때문에 질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라헬은 야곱에게 자식을 낳게 하라고 불평합니다. 이 이야기에 야곱은 화를 냅니다. 자식을 낳는 것은 겉보기와 달리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잘못하면 질투나 화로 변하기 쉽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나쁘게 변질되기 쉽습니다.

이제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생각이 들었습니다( 30:25). 그는 라반의 집에 와서 21년을 살았지만, 아버지 집에서 훨씬 더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벧엘에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분명하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너 누운 땅을 내가 주리라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리라 …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28:13-15). 그가 집을 떠난 지 이제 21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그의 마음속에서 가끔 하나님의 말씀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라헬이 요셉을 낳았을 때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습니다. “라헬이 요셉을 낳은 때에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나를 보내어 내 고향 내 본토로 가게 하시되”( 30:25). 요셉은 그의 열한 번째 아들입니다.

야곱의 생애를 영적으로 그래프로 그린다면 위로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부침이 심한 모습이 될 것입니다. 어떤 때에 그는 하나님과 매우 친밀한 교제 속에서 삽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지냅니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하나님과 멀리 간격을 두고 삽니다. 그러나 그에 대해 너무 심하게 비판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 자신의 생애를 살펴 보십시오. 우리도 영적으로 부유하게 살 때가 있지만, 그러다가도 쉽게 믿음 이 흔들려버립니다.

그러나 여기서 먼저 한 가지를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성공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을 살려면, 먼저 진정으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구원은 좋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지 하고 결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나아가서 내가 죄인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내 죄를 시인할 뿐만 아니라 죄에서 구원해달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같은 경험을 8살이 되던 때에 했습니다. 매우 오래 전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때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났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그 같은 경험을 했기를 바랍니다. 제가 거듭난 것을 자랑하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후에도 하나님 앞에서 실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로 저를 오랜 세월동안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제 저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얼굴을 마주할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 제가 여러 성도님들께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성도님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항상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구하고 있습니까? 매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계십니까?” 다윗은 시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119:11). 하나님의 말씀은 나를 강하게 하고 유혹에서 돕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되고 부활하셔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이같은 말씀을 믿고 구원받아 계속 말씀을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함이었더라 라헬이 요셉을 낳은 때에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나를 보내어 내 고향 내 본토로 가게 하시되 내가 외삼촌에게서 일하고 얻은 처자를 내게 주어 나로 가게 하소서 내가 외삼촌께 한 일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라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로 인하여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유하라”( 30:24-27).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할 때, 놀랍게도, 라반은 야곱이 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라반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축복하셨고, 그 이유가 야곱 때문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저는 성도님들에게 다시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성도님들은 직장에서 다른 직장 동료가 성도님들이 그리스도인인 것을 알고 계십니까? 저는 많은 성도님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 직장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직장을 축복하신 많은 신실한 성도님들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심지어 그들의 고용주들에게까지 축복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은 라반의 제안을 받아 들여 품삯을 받고 일하기로 합니다. 이는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육신과 관련된 일들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여러 가지로 축복하시며 세상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셨다”(벧후 1:4). 모든 구원받은 성도는 성령께서 내주하십니다. 이는 신약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축복이며 특권입니다. 이것은 야곱이 누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축복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육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단이 우리를 찾아와 우리를 유혹합니다. 물론 우리 속에 있는 새 성품은 죄를 범할 수도 없고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옛 성품이 육체를 인해 반응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자세하게 설명해 놓았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5:17).

야곱의 생애에 이같은 육신과의 영적인 갈등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신약에 있는 성도로서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더 놀라운 축복을 받은 자인가를 기억해야 합니다.

 

“야곱이 들은즉 라반의 아들들의 말이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인하여 이같이 거부가 되었다 하는지라.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본즉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더라.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 31:3).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하나님이 약속한 땅으로 돌아가길 원 했습니다. 그런데 사단은 야곱의 육신을 사용해서 못 가게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이제 라반의 아들들을 사용하여 야곱에게 고통을 줍니다. 그들은 라반의 마음에 야곱을 미워하는 마음을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라반이 뭐라고 제안하던 라반의 아들들이 뭐라고 하던,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약속을 지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야곱이 일어나 자식들과 아내들을 약대들에게 태우고 그 얻은 바 모든 짐승과 모든 소유물 곧 그가 밧단아람에서 얻은 짐승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있는 그 아비 이삭에게로 가려할새 때에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갔으므로 라헬은 그 아비의 드라빔을 도적질하고 야곱은 그 거취를 아람 사람 라반에게 고하지 않고 가만히 떠났더라 그가 그 모든 소유를 이끌고 강을 건너 길르앗 산을 향하여 도망한 지 삼 일 만에 야곱의 도망한 것이 라반에게 들린지라 라반이 그 형제를 거느리고 칠 일 길을 쫓아가 길르앗 산에서 그에게 미쳤더니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가라사대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 31:17-24).

 

라반은 야곱이 도망갔다는 사실을 삼일 후에 알게 됩니다. 그리고 칠일간을 쫓아가서 야곱을 따라잡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야곱을 라반에게서 보호하셨습니다. 밤에 라반의 꿈에 나타나셔서 야곱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라반의 말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너를 해할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너의 아버지 하나님이 어젯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 하셨느니라”(19). 하나님께서 책임을 갖고 붙들고 계신 것을 아무도 건드릴 수 없다는 사실을 여기서 배우게 됩니다. 제 생각에는 야곱도 아마 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문제가 생기면 그것은 자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축복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성도님들이 마지막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며 죄를 자백한 적이 언제입니까?”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살아갈 때만,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삶입니다.

라반의 추격에 잡힌 야곱은 화가 나서 논쟁합니다. “야곱이 노하여 라반을 책망할새 야곱이 라반에게 대척하여 가로되, 나의 히물이 무엇이리이까? 무슨 죄가 있기에 외삼촌께서 나를 불같이 급히 쫓나이까”(36),

그리고 야곱은 자신의 목자로서의 그동안의 삶을 말합니다. “내가 이 이십 년에 외삼촌과 함께 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들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떼의 수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38).

그는 목자로서 양들을 돌보기 위해서 해야 했던 구체적인 일들도 말합니다.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었나이다”(40). 이것에 대해서 적용해 보겠습니다. 오늘 여기 앉아계신 분들 중에 하나님께서 장로의 직분을 주신 분들이 계실 겁니다. 여기에 양들을 20년이나 돌본 사람의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그는 양을 돌보았습니다. 만약에 양떼 중에 새끼 양이 태어나면 잘 받아내서 돌봐주었습니다.

물려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지 아니하고 스스로 그것을 보충하였으며 낮에 도적을 맞았든지 밤에 도적을 맞았든지 내가 외삼촌에게 물어 내었으며”(39). 이는 단지 돌보는 정도가 아닙니다. 정직하게 책임지는 것입니다. 자기가 잃은 것은 스스로 책임졌습니다. 양을 훔치지 않았으며 항상 양들을 세고 있었습니다.

이 구절은 지금 현재 지역모임에서 경건하게 장로 일을 하시는 분들에게 중요한 교훈이 됩니다. 야곱은 낮의 더위와 밤의 추위에도 잠자지 않고 양들을 돌보았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그의 우선순위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양이었습니다. 모임의 장로들은 성도들을 돕기 위해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상으로 보상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양들을 잃게 되면 하나님 앞에서 계산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외삼촌의 집에 거한 이 20년은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14년 외삼촌의 양떼를 위하여 6년을 외삼촌을 위하여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삯을 열 번이나 변형하려 하셨으니”(41). 이같이 돌보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20년 동안이나 했던 섬김인 것입니다. 저는 어떤 성도님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20, 30년간을 한 지역모임에서 변함없이 섬긴 분들입니다. 이것은 신실함을 말합니다.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의 경외하는 이가 나와 같이 계시지 아니하셨다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공수로 돌려 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께서 나의 고난과 내 수고를 감찰하시고 어젯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41). 이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이 그동안 했던 노동과 봉사를 보상해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라반이 야곱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딸들은 내 딸이요 자식들은 내 자식이요 양 떼는 나의 양 떼요 네가 보는 것은 다 내 것이라 내가 오늘날 내 딸들과 그 낳은 자식들에게 어찌할 수 있으랴 이제 오라 너와 내가 언약을 세워 그것으로 너와 나 사이에 증거를 삼을 것이니라 이에 야곱이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또 그 형제들에게 돌을 모으라 하니 그들이 돌을 취하여 무더기를 이루매 무리가 거기 무더기 곁에서 먹고”(43~46).

라반의 말에 오늘날 이 무더기가 너와 나 사이에 증거가 된다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갈르엣이라 칭하였으며 또 미스바라 하였으니 이는 그의 말에 우리 피차 떠나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너와 나 사이에 감찰하옵소서 함이라”(48-49).

이 구절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야곱은 라반과 논쟁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자신의 노동과 수고, 즉 간증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증거는 명백합니다. 라반은 이 증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라반은 이 무더기가 증거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미스바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보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또 산에서 제사를 드리고 형제들을 불러 떡을 먹이니 그들이 떡을 먹고 산에서 경야하고 라반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추며 그들에게 축복하고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더라”(54-55).

모임이 어려워지는 것은 주로 형제들이 불일치하고 갈등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종들이 어떻게 행해서 서로 평안을 끼쳐야 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헤어지고 있지만 그들 사이에는 평화가 있습니다.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32:1-2).

야곱은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천사들을 보게 됩니다. 야곱은 전에도 천사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벧엘에서 천사들이 사다리 위를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21년이 지난 지금 다시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야곱은 이들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군대다.” 그리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증거라는 의미입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이 주제에 대해서는 내일 계속 말씀드리겠습니다. 주님께서 저희에게 허락하신 말씀이 축복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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