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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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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대상

-짐 베이커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12:1-3).

신약에서 어떤 특별한 주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장들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을 다룹니다. 사랑에 관한 주제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그 장은 하나님이 구원한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을 다루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장입니다. 여기에는 믿음의 본을 보인 사람들이 나와있습니다.

이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절에서 11절까지는 인류 역사가 시작되었던 초기의 인물들을 듭니다. 그들은 처음임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들이 믿음으로 살았던 증거를 제시합니다. 두 번째는 우리가 족장들이라 부르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족장들이 걸었던 믿음의 길을 말합니다. 마지막 부분은 위대한 선지자들을 다룹니다. 이들도 다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으로 산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고난의 시대를 살았습니다. 그들이 그 좁은 길을 갈 때 그들에게 힘을 준 것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은 단지 그들 마음속의 믿음이 아닙니다. 그들이 믿음의 대상을 알고 있었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삶에서 모든 것이 되어주셨습니다. 그들이 섬긴 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들이 사랑한 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들이 믿은 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위대한 믿음의 장인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인물은 믿음의 위대한 능력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12장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이들은 우리에게 증거하는 게 아닙니다. 이 증인들은 재판장에서 논란이 되는 사건에서 증언합니다. 아무튼 우리에게는 믿음의 능력을 증거하는 수많은 증인이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길과 같습니다. 우리 모두는 순례자입니다. 이 순례의 길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 때 시작되었습니다. 이 길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합니다. 그날 우리는 주님을 얼굴을 마주 대하고 볼 것입니다. 우리는 이 길이 언제 끝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길을 가고 있는 중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 길을 달리기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이 길을 가는 본을 하나님은 보여주셨습니다. 본은 예를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또한 믿음의 대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본이 되는 분은 누구입니까? 주님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계셨습니다. 우리가 걷는 길을 결으셨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누구보다 강력한 거부를 당하셨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경험을 하셨습니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 길을 가고자 한다면,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한다면,주의해야 할 일이 있다" “첫째로 모든 무거운 것을 벗어버리자" 이는 달리기 비유를 사용한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 여러 곳에서 마라톤 경기가 열리고 있습니다. 먼 거리를 달리는 마라톤을 하려면 사람들은 연습하고 준비합니다. 경기 규칙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라톤 복장의 무게에 대해서는 규정이 없습니다. 42킬로를 달리는 장거리 경기인 마라톤을 하려면 복장이 가벼워야 합니다. 그런데 두꺼운 겨울 코트를 입고 무거운 신을 신고 목에 목도리를 하고 달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는 규칙을 어긴 게 아닙니다. 그러나 경기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매우 줄어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도 그같은 일이 있습니다. 죄가 아닌 게 있습니다. 그러나 유익되지 않는 게 있습니다. 이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지금 성도님들은 얼마나 무거운 것을 입고 계십니까? 어떤 것은 다른 사람에게는 아니나 나에게는 무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모임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를 무시하면 우리 경주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이를 막는 게 있다면 이는 무거운 것입니다. 정기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읽고 거기서 영적 양식을 취하는 것을 막는 게 있다면 이는 무거운 것입니다.

그러나 무거운 것을 벗어버리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얽매기기 쉬운 죄”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두번째로 죄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단이 원하는 것은 우리가 죄를 지어 묶이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주님을 믿어 영원한 죄 용서를 받았습니다. 성도에게서 영원한 생명을 뺏을 수 없다는 것을 사단도 압니다. 사단이 우리가 죄를 범하게 만드는 이유는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지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연합을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한번 주 안에 들어오면 영원히 주 안에 있습니다. 이는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교제를 잃어버릴 수는 있습니다. 연합과 교제는 서로 다릅니다. 우리는 주님과 교제를 쉽게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 삶 속에 자백하지 않은 죄가 있다면 주님과의 교제를 잃어버릴 것입니다. 한국에 올 때,저는 이 집회를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성도님들은 지금 저나 혹은 통역자의 음성을 듣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이게 주님과의 교제입니다. 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기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32:3-4).

이 시는 다윗이 썼습니다. 그는 두 개의 매우 심각한 죄를 지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아내와 간음을 행하고 그 여인의 남편을 죽이도록 명령했습니다.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가장 위험한 전선에서 싸우게 하다 죽게 만든 것입니다. 그가 죽자 다윗은 밧세바와 결혼했습니다. 그는 이제 됐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잊은 것 입니다. 그는 많은 시간 동안 이 죄를 하나님 앞에서 자백하지 않습니다. 그는 주님과 교제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전과 똑같은 삶을 살았지만,기도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주님과 교제가 끊어졌음을 알았습니다. 그 경험을 여기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시를 기록할 때는 이 경험이 다 지난 후입니다. 그는 과거를 돌아보며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시간이 있었다. 내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없었던 시간이 있었다. 내가 죄를 범했기 때문이다. 그 때 하나님의 손이 나를 눌렀다. 그때 나는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다" 저는 여기 계신 분들에게 묻고자 합니다. 과거에 하나님과 즐긴 교제를 이제는 즐기지 못한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과거에는 하나님 말씀을 읽기를 좋아했으나,그리고 기도를 사랑했으나 이제는 침묵하고 계신 분은 없습니까? 이같은 일이 다윗에게 일어났던 것입니다.

5절에서 그는 자백의 필요를 드디어 시인합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 그가 저지른 것이 하나님 앞에서 죄임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자백했을 때 하나님과 교제가 회복되었습니다. 이제 그는 다시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합니다. 자백하지 않은 죄가 있을 때에는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음성을 듣습니다.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32:8). 오늘 이 글을 읽는 어떤 성도가 하나님께 죄를 자백하고 교제를 회복한다면 이는 놀라운 일입니다. 오늘 이같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첫째 “무거운 것을 벗어라”고 말합니다. 두번째 “죄를 벗어야 합니다. 그리고 세번째로 이같은 경주를 하는 방법을 말합니다. “인내로써 해야 합니다" 이 경주는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해야 합니다. 마라톤 경기에서는 결승지점을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이같은 경주 가운데 어려운 일이 생겨도 성실하게 이 길을 가야 합니다. 그 비결이 2절에 나옵니다. 믿음의 대상인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 적에 부모님이 자전거를 사주셨습니다. 두 개의 바퀴로 된 최초의 자전거였습니다. 자전거를 타려면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뒤에서 붙잡아주셨습니다. 저는 아직도 처음으로 자전거를 탄 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말씀하셨습니다. “땅을 보지 말라. 앞만 봐라. 그렇게 하면 자전거를 잘 탈수 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의 대상인 주를 바라보라. 주님을 바라보면 믿음의 길을 갈 수 있다"

주님은 이미 그 길을 가신 분입니다. 주님도 믿음의 대상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앞에 있는 즐거움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마치고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걸으신 길은 쉽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미워하고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믿음의 대상을 보셨습니다.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보셨습니다.

우리 믿음의 대상은 보좌에 앉은 주님입니다. 과거에 주님은 여기 계셨고 이제 그 길을 다 마치고 영광의 승리를 하셨습니다. 주가 가신 길에는 십자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를 참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보좌에 앉으셨습니다. 성도님들은 믿음의 대상을 보고 계십니까? 우리는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우리 눈을 주님에게 고정할 수 있습니다. 이는 집으로 가는 길을 안전하게 해줄 것입니다.

“예수를 바라보자’는 말에는 특이한 전치사(upon)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먼저 아브라함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삭,모세 등 본이 되는 인물들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를 바라보자고 말합니다. 여기서 특이한 전치사를 사용한 것은 이제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을 보지 말자는 의미입니다. 모세는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지만 실패한 적이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놀라운 분이지만 실수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주님만을 계속 바라보자고 말합니다. 주님은 실패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 여정을 온전히 가신 분입니다. 십자가를 참고 이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우리에게 놀라운 믿음의 대상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어떤 (실패한) 성도를 보고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저 성도를 봐라. 나는 구원받고 싶지 않다" 성도님들 가운데도 다른 성도의 실패를 보고 실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보면 실망이 없습니다. 주님은 실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의 본,믿음의 대상을 주셨습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 하라" 만일 우리가 믿음의 길에서 피곤하거나 낙심하면 이는 주님에게 시선을 두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9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12:4-11)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예수”라고 부릅니다. 저는 주님을 이같이 부르는 게 싫습니다. 주님은 3년간 제자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서양에서는 친한 사람들끼리는 이름을 부릅니다.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먹고 자며 생활했으나 주님을 “예수”라 부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3:13). 우리는 주님이라 불러야 합니다. 성경에서 주님을 “예수”라고만 표현하면 이는 지상의 길을 걸으시는 주님을 말합니다. 주님은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기에 우리 믿음의 대상입니다. 우리가 순례의 길을 갈 때 원칙이 있습니다. 주는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결국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를 주목하게 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이제 히브리서를 받는 그리스도인이 피를 흘려야 할지 모릅니다. 지금도 많은 나라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저는 인도를 두 번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두 아들을 가진 선교사를 만났습니다. 그는 제가 인도를 떠난 지 얼마 후에 순교했습니다. 그는 우상숭배가 심한 지역에 선교하러 갔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가 타고 다니는 차를 불태웠습니다. 그가 두 이들만이라도 차 밖으로 내보내고자 했을 때 사람들은 아들을 끝까지 불타는 차 안으로 집어 넣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주를 위해 죽었습니다. 세계 여러 곳에서 믿는 자들이 지금도 순교하고 있습니다. 어떤 성도는 주를 믿었다는 이유로 투옥되기도 합니다.

히브리서는 성도들을 격려하고자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같이 악한 일을 한다 하더라도,순교할지라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하고 있다" 하나님은 악한 자의 핍박을 항상 막아주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만 아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종이 죽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위대한 선지자 이사야는 53장에서 주님에 대해 놀라운 예언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톱으로 켜서 죽었습니다. 주님의 제자 야고보는 헤롯 왕이 칼로 목을 베어 죽였습니다. 스데반은 신약 최초의 순교자입니다. 그는 돌로 맞아 죽었습니다. 우리는 아무도 우리 여정이 어떻게 끝날지 모릅니다. 세상은 성도들에게 점점 공격적으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히브리서 기자의 경고를 들어야 합니다. 사람이 너희를 미워할 때 하나님은 너희를 사랑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시고 받은 자를 채찍질 하신다" 우리의 순례 길에는 끝임 없는 징계가 있습니다. 징계는 아들 된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 징계를 허락 하십니다. 그러나 그때 기억해야 할 것은 아무도 주님처럼 고난 받는 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으면 주님과 함께 통치할 것입니다. 지상에서의 고난은 하늘에서 얻을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서 징계가 슬퍼 보이고 즐겁지 않지만 그로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열매가 가득할 것입니다.

스데반이 예루살렘 성 밖에서 돌에 맞았을 때 그의 영혼은 몸을 떠났습니다. 그때 주님이 그 영혼을 받으셨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영광입니다. 우리도 곧 주님을 얼굴을 대하고 볼 것입니다. 주님은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룻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16:2-3). 그들이 우리를 핍박하는 것은 우리가 가진 영생을 모르기에,우리가 즐거워하는 구원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고난은 장차 영광과 족 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12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 12:12-14).

첫째로,우리 순례 길에는 본이 있습니다. 둘째,순례에는 원칙이 있습니다. 즉 고난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이 땅이 아닌 하늘입니다. 셋째,이 순례 길에는 목표가 있습니다.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발을 위한 곧은 길,저는 다리를 고치기입니다. 이같은 교훈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의 영적 성품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의 은혜와 주님을 아는 지식에서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영적 성품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낙심하기 쉽습니다. 악한 교훈에 낙심하게 되며,고난에도 낙심하기 쉽습니다. 사단은 우리를 낙심시키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 사용합니다. 이같이 낙심이 올 때에는 하나님이 주신 충고를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로 피곤한 손을 일으켜야 합니다. 마라톤을 할 때 보통 손을 흔듭니다. 피곤하지만 손을 흔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상을 얻기 위해 경주합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 고린도전서에서도 경주를 말합니다. 물론 히브리서와는 약간 다른 관점입니다. 고린도전서의 경주에는 모든 사람이 경주하지만 상은 한 명뿐입니다. 이는 무슨 의미입니까? 상을 얻도록 달리라는 의미입니다. 상 받는 사람은 한명 밖에 없으므로 모든 힘을 다 쏟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한국 청년들이 좋은 직업을 얻기 위해 많은 애를 써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를 비판할 마음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 삶에서 첫 자리를 차지하셔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 피 흘린 주님이 우리 생애에 최우선 자리에 계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같은 자를 존중히 여길 것입니다.

마라톤 경기를 완주하려면 아마 몇 시간을 달려야 할 것입니다. 그동안 피곤해지기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손이 내려갑니다. 발도 힘들어집니다. 이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시 용기를 내야 합니다. 성경 읽기와 기도를 하지 않으면 낙심할 것입니다. 말씀 속에서 격려를 받아야 합니다. 주님의 임재 속에서 용기를 얻어야 합니다.

또 다른 충고가 주어집니다. “곧은 길을 만들라" 우리가 가는 길이 하나님을 슬프게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의심스러워하는 곳을 가면 안 됩니다. 세상,경건치 않은 지를 친구로 삼으면 안 됩니다. 성도 중에서 친구를 삼아야 합니다. 특히 영적인 분들과 가까이 지내야 합니다. 우리 삶에서 주님을 첫 자리로 놓으면 반드시 보상하실 것입니다.

또한 내가 가는 길이 다른 사람에게 본이 되게 해야 합니다. 나이 드신 성도님들께 말씀드립니다. 많은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조언을 해주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삶의 본이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옳은 삶을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다리를 저는 자는 그가 가는 길이 어긋날 것입니다. 저는 다리는 연약한, 낙심한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만일 의심스러운 일을 하면 젊은이가 따라가 넘어질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모든 사람과 화평해야 합니다. 주님과 교제하며 살면 분쟁을 일으키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항상 논쟁하기를 좋아합니다. 함께 사귀기 어려운 사람도 있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4:5). 영적인 삶을 살면 본이 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학교, 직장에서 사람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 삶을 봅니다. 그들은 우리를 말로 평가하지 않고 삶으로 평가합니다. 만일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면 이는 복음에 장애가 될 것입니다. 다른 성도님들에게도 장애가 될 것입니다.

주님을 뵐 날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영광스러운 아버지 집으로 가는 순례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이 순례의 길에 주의할 것을 히브리서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교훈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축복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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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