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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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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교훈

17~16

7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 8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9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10 복종치 아니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특별히 할례당 가운데 심하니 11 저희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를 취하려고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쳐 집들을 온통 엎드러치는도다 12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쟁이라 하니 13 이 증거가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저희를 엄히 꾸짖으라 이는 저희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케 하고 14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좇지 않게 하려 함이라 15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16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다른 시간에 사도바울이 쓴 다른 서신의 일반적인 배경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이 디도서는 1차 투옥과 2차 투옥 사이에 석방되었을 당시에 쓴 서신이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로마의 감옥에 갇힌 두명의 사람에 관해서 들었습니다. 그래서 두개의 편지인데 하나는 2년 전에 쓰여진 편지입니다. 사도바울이 첫번째 투옥 된 것은 사도행전 2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첫번째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4개의 옥중서신을 썼습니다.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그리고 빌레몬서입니다. 4개의 서신 중 3개는 교회에 보내진 것이고 마지막 하나는 빌레몬 개인에게 보내진 서신입니다. 우리는 이 서신을 통해서 바울 자신은 감옥에 갇혀있지만 그가 자신의 고난에 대해서 보이는 놀라운 태도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어떤 군인과 함께 쇠사슬에 매여 있는 중입니다. 그러한 군인은 8시간씩 교대를 하면서 근무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교대없이 쇠사슬에 계속적으로 매인 죄수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빌립보서 4장에서 이와 같은 구절을 만나는 것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는 주께서 가까우시니라고 말합니다. 만약에 내가 편지를 썼다면 내 옆에는 군인이 가깝다고 썼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움직일 때마다 자신을 묶고 있는 쇠사슬에서 소리가 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 로마의 군인을 의식하기보다는 주님의 임재를 더 많이 의식했습니다. 그와 같은 2년간의 감옥 생활이 지나서 1 6개월간 풀려나게 됩니다. 그리고 18개월의 자유로운 기간 동안 디모데전서와 디도서를 쓰게 됩니다.

디모데전서를 보면 주제가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은 신약 시대에서는 지역교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주의 이름으로 함께 모일 때에 주님께서 거기에 임재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함께 계시고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십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서 모든 지역모임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와 같은 모임에 있어서 모이는 것을 존중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모임은 그와같이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모일 때마다 삼위의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일 때에 서로 좋아서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모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위 아래 모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주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전할 때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전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이름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모이는 모임의 중심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는 우리가 지역모임으로 모일 때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디모데후서에서 사도바울은 특별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는 사도바울이 다시 감옥에 투옥되었을 때 쓴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바울이 두번째 투옥되었을 때 몇 개월이나 투옥되었는지를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사고바울을 두번째 감옥에 들어갔을 때 그 감옥에서 결코 나오지 못하다가 처형장에 갈 때에나 나왔습니다. 그리고 디모데는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리는 유일한 인물입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리는 많은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나 디모데는 신약성경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는 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마지막 시대에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가르치는 것이 그 주제입니다.

디도서는 모든 이와 같은 생각들을 한꺼번에 일반적으로 쓰고 있는 내용입니다. 디모데는 에베소에 남겨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는 에베소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람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올 때까지 디도는 어떤 한 섬에 있습니다. 그 섬 이름이 그레데입니다. 그리고 그레데에는 여러 개의 모임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곳에 가서 복음을 전했고 그 복음을 듣고 여러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으며 그렇게 해서 작은 모임들이 여러 개 생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레데에 있는 여러 작은 모임들은 세워진 지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성도들이 누가 장로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 지역모임 내에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더욱 성장하며 자기를 개발하고 있는 사람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디도에게 이와 같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 지역 모임에서 누가 장로인지를 알 수 있도록 도와주어라. 장로라는 것은 그와 같은 직위에 임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장로라는 것은 모임에서 하나님의 일에 수고하는 자들입니다. 모든 지역모임에서 장로직이라는 것은 주를 위하여 봉사하는 일입니다. 장로는 지역모임에서 양떼를 먹일 책임을 가진 자들입니다. 지역모임에 대해서 성경은 여러가지 비유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건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부라고 말합니다. 성전이라고도 말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양떼라고도 말합니다. 양떼라고 하는 것은 보통 양의 무리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이야기가 목자와 양과의 관계입니다. 구약에서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주의 일을 감당하기 전에 목자 일을 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야곱, 모세, 다윗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이 처음에 양들을 돌보는 경험을 통해서 후에 하나님의 백성을 어떻게 돌볼 것인가를 적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 장로에 관한 말씀을 드린 것은 5절에 이와 같이 쓰여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디도에게 두 가지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부족한 일을 바로 잡으라. 두번째는 장로들을 세우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운다는 것은 손가락으로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5절에서 이와 같이 두 가지 일을 말해놓고 기술하면서 두번째 장로를 세우는 일을 먼저 설명합니다. 왜 그랬는지는 오늘 아침에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오늘 저녁에는 부족한 일을 바로 잡는 내용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아침 교제의 마지막으로 9절을 말했습니다마는 각 모임에서 장로는 성경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키는 자라야 합니다. 각 모임이 말씀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지역모임의 가장 중요한 생명적인 내용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여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아는 데는 성경이 유일한 안내서입니다. 그래서 모든 지역모임의 장로들은 성경말씀을 진실하게 붙들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20장에서 사도바울이 에베소의 장로들을 모아놓고 똑 같은 이야기를 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라. 그리고 하나님의 미쁜 말씀이 너희를 지키시리라. 그리고 이 말씀이 너희로 하여금 성도의 영광의 기업을 잇게 하리라.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현재 이 시대에 우리를 힘있게 하고 우리를 세우는 능력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미래의 놀라운 소망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된 무리들 가운데서 얻게 될 영광스러운 유업에 대해서 성경은 말해줍니다. 9절에서 이와 같이 성경말씀의 가르침을 붙들어야 되는 이유는 바른 교훈으로 가르치며 그리고 거스리는 자를 책망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9절을 읽고 그레데 모임에 어떤 문제가 있었을까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레데 모임에 일어난 문제들을 10~11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복종치 않는 자들, 헛된 말을 하는 자들, 속이는 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대부분 할례당원이었습니다.

할례에 대해서 잠깐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여 부르실 때에 갈대아 우르에서 살고 있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거기서 부름을 받아서 최초로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이삭과 야곱을 낳게 됩니다. 그리고 야곱이 12아들을 낳고 그 12아들이 이스라엘의 12지파가 됩니다. 창세기 마지막을 보면 그 가족이 많은 숫자로 불어나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출애굽기가 시작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4백 년간 애굽에 머무르게 됩니다. 출애굽 할 때에 그 숫자는 약 2백만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이스라엘 민족 중에 모든 민족 중에서 구별하고 있는 표시 중에 하나가 그것이 할례입니다. 남자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 몸에 하는 작은 표시입니다만 그리고 지금도 이스라엘에는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할례를 하는 관습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례라는 단어를 만나면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구원받았을 때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모든 경계를 허무셨다는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택하신 유일한 백성은 이스라엘입니다. 그리고 신약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와 그를 믿는 모든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2장 오순절날 시작된 하나님의 교회는 이방인과 유대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교회에는 주인도 있고 노예도 있습니다. 그리고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습니다만 이 모든 것들이 한 몸을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경계를 허무셨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가 시작된 이 시절에는 이와 같은 진리가 분명히 다루어질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진리는 특별히 유대인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독특한 율법에 관한 것을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독특한 율법이라는 것은 제사, 성막, 예물 등입니다. 그리고 레위지파가 특별히 제사장 지파가 된다는 것인데 레위지파에게는 놀라운 특권이며 그들에게는 즐거운 것입니다. 그들이 배우기 쉽지 않습니다만 이제 신약에서는 다른 가르침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유대인과 이방 사이에 담이 허물어졌다는 진리를 배워야 합니다. 구약에서 만약 이방인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자 한다면 이스라엘 민족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오늘날 전하고 있는 복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오늘날 전하는 복음은 갈보리에서 흘린 주님의 피를 믿는 모든 자에게 주어지는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은 이방인에게도 필요할 뿐만 아니라 유대인에게도 필요한 것입니다. 여전히 유대교의 여러가지 의식에 대해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은 복음을 믿고서도 이와 같은 생각을 합니다. 그들은 머리가 매우 뛰어난 사람들이고 그래서 이와 같은 생각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희생제사는 참 좋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은 놀랍고 위대한 일이다. 그와 같은 주님의 십자가의 사역을 믿는다고 하는 것도 참 좋다. 그러나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 그것이 할례당들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적으로 틀린 것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것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전하는 것은 거기에 무엇인가를 덧붙인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 위에 무엇인가를 덧붙인 것을 믿는다고 한다면 십자가의 복음을 약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이상한 거짓 가르침을 가르치는 거짓교사들의 숫자가 늘어났습니다. 이와 같은 가르침들을 서신서에서 여러가지로 경계하는 것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로마서에도 그와 같은 경계가 있구요.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히브리서에도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서신서에도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잘못된 가르침이 모든 곳에 퍼져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와같이 새로운 가르침이 성공한다면 우리가 오늘날 믿고 있는 믿음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혼합시키는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요한 일을 하셨지만 전부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혹은 다른 서신서들을 읽는다면 그와 같은 가르침은 잘못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여러가지 의식을 끝내셨습니다.

저는 구원받기 전에 이와 같은 복음을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을 제가 알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마음 속에 내가 하나님께 죄를 범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다. 이런 생각은 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어느날 어떤 사람이 그에게 조그마한 전도지를 주었습니다. 그 전도지에는 이와 같은 글이 쓰여져 있었습니다.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느니라 거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림이라는 말과 설명도 없이 단지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다라는 단어만 쓰여져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하여 피흘리셨다는 복음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생각하기를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새를 한 마리 잡았습니다. 그는 순진하게 잡은 새의 피를 흘리면 내 죄가 용서 될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새가 죽이기 전에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그 새를 설령 죽여서 피가 흘려졌다 할지라도 그의 죄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며칠 후에 북아일랜드에 있는 모임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날 저녁에 전도자가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 전에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 전도자는 히브리서 10장 말씀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저녁에 이 곳에 어떤 사람도 양을 끌고 온 사람이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왜 아무도 양을 끌고 오지 않았느냐 하면 히브리서 10장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더 이상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왜냐하면 주님께서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기 때문이다. 물론 그 전도자는 어떤 구도자가 왔는지 알지 못하고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날 저녁에 그 전도자로 하여금 올바른 교제를 전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성경을 사용하셔서 구약의 제사가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고 끝났음을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젊은 사람은 그날 저녁에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모든 죄인들을 위하여 피를 흘리시고 모든 죄가 용서되었다는 복음을 그가 처음 듣고 구원받았습니다. 만약에 혹시 이 가운데 아직 구원받지 못하신 분이 계신다면 여러분은 죄인입니다. 여러분의 죄로 인해서 여러분은 죽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원자를 모시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지옥에 갈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오늘 저녁에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유일하게 만족시킬 수 있는 그리스도의 피가 흘려졌기 때문입니다. 결코 죄를 범하신 적이 없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어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린다 할지라도 그 사람의 피는 죄인의 피에 불과합니다. 그와 같은 죄인의 피는 하나님께서는 받으실 수가 없습니다. 어떤 짐승들의 피도 여러분의 죄를 영원히 속하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구약의 모든 희생제사의 완성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구약의 제사장도 없습니다. 이젠 더 이상 장막도, 성막도, 제단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지역모임으로 단순하게 모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았습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 앞에 모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단순히 주님의 이름으로만 모이는 것입니다. 물론 구약의 이스라엘의 놀라운 종교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만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모든 종교의식들을 폐하셨습니다.

신약의 유대주의에 있어서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성막이 있고, 성막 뒤에 휘장이 있는데 그 휘장 뒤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그 휘장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오직 일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날 그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던 것입니다. 밑에서 위로 찢어진 것이 아니고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찢으신 것입니다. 위에서 아래로 찢으신 것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구약의 모든 율법의 의식을 폐한다.

그리고 두번째로 유대인들의 의식 가운데 중요한 것은 대제사장입니다. 많은 레위 자손들이 제사장으로서 섬겼습니다. 속죄일에 지성소까지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대제사장 한 명뿐입니다. 대제사장은 특별한 대제사장의 의복을 입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휘장이 찢기고 대제사장이 스스로 자기 옷을 찢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상징 두 가지가 찢겨버립니다. 이와 같은 것들을 자세히 설명한 것이 히브리서의 내용입니다. 사도바울은 아마도 유대인 가운데 구약에 가장 열심있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구원을 받고 하나님께서 구약의 모든 율법의식을 폐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여러 서신을 통해서 할례당의 위험에 대해서 경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르침을 가진 사람들이 이 지역모임들에 많이 들어오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10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할례당 가운데 심하다. 사도바울은 저들의 입을 막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13절에서는 저희를 엄히 꾸짖어라 14절에서는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좇지 않아야 한다. 유대인들의 의식에는 어떤 동물들은 정하고 어떤 동물들은 부정하다는 것이 있었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어떤 것은 정하고 부정한 고기가 없습니다. 정하고 부정한 음식은 유대인들과 관련된 경륜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깨끗하니 누구든지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느니라 그래서 15절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하게 되었다. 그리고 깨끗하게 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다. 그래서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 거룩하게 되지 않은데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그와 같은 사람들에게 말로는 시인하지만 행위로는 부인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말씀을 분명히 알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달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하나님의 성도들을 파멸시킬 수 있는 무서운 것은 잘못된 교훈입니다. 강단에서 전하는 말씀은 깨끗해야 하고 그리고 순수한 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2장 초반에 이와 같은 교훈이 계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1~7

1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하여 2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근신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케 하고 3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참소치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말며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4 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5 근신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6 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권면하여 근신하게 하되 7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여 교훈의 부패치 아니함과 경건함과

오늘 아침에 디도서 1, 2, 3장은 각각 다른 강조점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1장은 우리들이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모임내에서의 행동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장은 우리의 개인적인 삶과 가정의 삶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3장은 우리의 세상에서의 삶 즉 사회적이고 공적인 삶에 대해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이라는 것은 이 세 가지 영역에서 다 관련된 것입니다. 학교와 직장에서 사람들이 우리의 행동을 보고 우리의 삶이 다르다고 느껴야 하며, 모임내에서의 우리의 행동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개인적인 삶과 가정의 삶도 다르게 살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야 합니다.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은 교인명부에 내 이름을 기록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거듭난다고 하는 것은 성령께서 내 마음에 역사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에서 사도바울은 그와 같은 내용을 말한바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자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구원받았기 때문에 내가 변화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진정한 구원을 검사하는 내용입니다. 저의 아버지는 선원이셨고 그리고 술주정꾼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구원받았을 때 삶이 변했습니다. 그리고 그 동네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가 변했다고 알아보았습니다. 또한 저의 어머니도 아버지의 삶이 변했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구원이 한 사람의 생애에 역사하고 있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2장은 개인적인 삶과 가정의 삶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절은 사도바울이 디도에게 하고 있는 말입니다. 그 앞에서는 잘못된 것을 가르치는 거짓교사들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2장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디도에게 너는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해라 바른 교훈이라는 말은 건강한 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온 세계에 사람들이 건강에 대해서 관심이 아주 많다는 것을 압니다. 제가 어디를 가든지 그곳에서 사람들이 다이어트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건강식품들도 복용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건강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우리가 건강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육체가 건강하기를 단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거듭나게 된 우리의 속 사람이 건강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속 사람은 건강해야 할 뿐만 아니라 성장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주제를 베드로는 베드로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갓난 아이같이 신령하고 순전한 젖을 사모하라 아이가 태어나면 단단한 식물을 못 먹습니다. 오늘도 여러 성도들께서 맛있게 저녁식사를 하셨습니다만 가장 순전한 것은 어머니의 젖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만약에 여러분의 삶이 열매가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성도로서의 삶에 열매가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기도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그렇지만 이 두 가지를 하신다면 여러분은 성장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의 서신의 마지막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은혜 가운데서 자라가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바울이 디도에게 건강한 교훈을 말하라고 한 것은 네가 말씀을 전하므로 성도들이 더욱 건강해지고 성장하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늙은 사람이 아무리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늙고 오랜 세월이 지났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읽어야 합니다. 4절에 보면 늙은 여자들은 젊은 여자들을 잘 가르쳐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디모데에게도 역시 젊은 사람들을 격려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대로 성경 말씀은 모든 나이의 사람들을 격려해주는 말씀입니다. 목자가 양떼들을 몰고 풀밭으로 데리고 갈 때 목자들은 어디가 좋은 꼴이 있는 목초지인지를 분별합니다. 이끌고 가는 양떼들 중에는 아주 어린 양도 있습니다. 어린양들도 그 풀을 먹습니다만 어린양이지만 더 이상 엄마의 젖을 못먹습니다. 그래서 그 어린양도 엄마양과 똑같이 풀을 뜯어 먹어야 합니다. 그 어린양은 다른 양처럼 많이 먹지를 못합니다. 온 양 떼가 동일한 풀을 먹는다는 것을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와 같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은 늙은 사람들에게도 필요합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젊은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양떼를 위하여 디도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범사에 본이 되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하나님의 종은 반드시 그가 가르치는 말씀에 본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제가 지금 이곳에서 여러 성도님들을 먹이고 가르치고 교훈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열어서 거기에 있는 교훈을 끌어낼 뿐입니다. 제가 교제해 드렸던 이 말씀들이 이 모임에 유익이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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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