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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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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플레니건

요한복음에 감람산에 대한 언급은 단 한 번뿐인데 여기에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단 한번 만 언급된 것이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이 심지어 한 번이라 할지라도 동등하게 중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모든 독자가 잘 알고 있듯이 고상한 주제입니다. 네 번째 복음에는 어떤 다른 것이 있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요한이 그토록 사랑했던 그분에 대한 요한의 기록에는 구주의 진정한 남성다움에 대한 많은 사랑스러움을 엿볼 수 있지만, 요한의 강조점은 인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분 자신이 신성한 위격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비천한 사람에 관해 말할 때마다, 그는 자신의 독자들에게 갈릴리 사람이 하나님이심을 상기시키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가나에 시골의 한 쌍의 결혼식에서 그분은 진정한 사람이셨기 때문에 그분의 어머니와 함께 손님이 되신 것도 자비로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순식간에 물을 포도주를 만드실 수 있으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은 배고프고 목마르고 피곤해 수가 우물가에서 앉으셔서 오직 유대인으로 기꺼이 인정받기를 원할 수 있지만 전지전능하신 능력으로 그분은 가난한 여자의 과거와 현재의 삶을 드러내며 그녀의 마음에 자신을 계시하실 수 있습니다. 이후 한 장에서 “예수라고 하는 사람”으로 그분을 묘사하며 단지 그 “예수라고 하는 사람”은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발견합니다. 참되고 부드러운 인성으로 베다니의 유족들과 함께 울며 그들에 위해 조용히 눈물을 흘리실 수 있지만 그런 다음에 큰 음성으로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 내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은 모두 요한복음을 통해서입니다. 이것은 영광이 빛나는 복음이며 예수님의 인성은 항상 그분의 본질적인 신성의 증거를 수반하셨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이유로 감람산에서 구주의 움직임이 요한에 의해 자세히 기록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산은 겸손히 의존하는 사람의 고독과 중보와 눈물의 현장이었기 대문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알고 있듯이 누가복음에서 우리는 다른 복음서보다 보다 많이 기도하시는 구주를 발견합니다. 누가복음에서 확인되는 그분의 기도의 7차례의 주의 깊게 비교하면 실제로 주 예수님의 기도하셨던 장소와 주위환경이 다양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거룩한 선호가 있음을 확인시켜 줄 것입니다. 그분이 그토록 친숙했던 조용한 산중턱과 산비탈, 그분은 요단강에 서서 기도하셨고, 광야에서도 기도하셨습니다(눅 3:21; 5:16), 그러나 아마도 누가에 의해 기록된 다른 모든 경우에 그분의 기도는 산허리에서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대부분 사역이 갈릴리에서 있었고 결과적으로 그분의 중보의 일부는 갈릴리의 산들 사이에 있었지만 그분은 또한 종종 유대에 계셨고, 그분께서 여기 계시는 동안은 감람산은 개인적인 친교와 헌신을 위한 그분의 성소가 되었습니다. 그분은 “습관”을 좇아 거기에 가셨습니다(눅 22:39). 유다는 그 장소를 잘 알고 있었는데 왜냐하면 예수님이 수시로 그곳에서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요 18:3).

 

감람산 기도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발견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놀라움은 아니지만 감동적인 일입니다. 그분은 결국 전능한 분이셨고 모든 것이 충분한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영원에서 그분이 기도하셨던 이 감람산의 바로 창조주이셨습니다. 이 감람나무들은 그분의 손으로 만드셨고, 그분은 수천의 언덕에 가축의 소유자이셨습니다(시 102:25, 50:10). 모든 창조물은 그분의 지배, 하늘, 땅, 바다였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그분은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그분의 백성에 대한 어떠한 모본과 격려인가요. 만약 전능하신 그분께서 기도의 시간과 필요성을 찾으신다면 그분의 성도들은 얼마나 더 많이 기도해야 하는가요.

 

그러나 산에서 우리 주님의 그토록 많은 헌신들은 그분의 아버지와 거룩한 교통의 본질을 지니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사실 그분은 때때로 간구하셨습니다. 그분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 모두를 위한 탄원을 가져왔습니다. 흠없는 인성의 의존 안에서 그분은 말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태에서부터 주께 맡겨졌으며”라고 말할 수 있었고 그리고 “그가 주를 신뢰하여”(시 22:10,8)라고 사람들도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조용히 그분의 아버지와 교제하셨을 때 반드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단순히 아버지 품에 안긴 아들의 사랑의 친교의 즐기며 지내던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아버지께 드리는 그분의 말씀에서 종종 단순히 “아버지”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또한 “의로운 아버지”와 “거룩한 아버지”(요 17:1,11,25)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분은 결코 “우리 아버지”라고 말씀하신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기도 할 때, 우리의 아버지”(눅 11:2)라고 가르치셨지만 그분의 아버지와의 관계는 달랐습니다. 그것은 영원하고 유일했습니다. 그분은 진리와 사랑 안에서 아버지의 아들이셨습니다(요이 1:3).

 

얼마나 자주 주 예수님은 이 신성한 친교의 산에서 감사로 기도를 채우셨다. 감람산에서 그분께서 눈을 들어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요 11:41)라고 말씀하셨지만 또한 마태복음 11:25 누가복음 10:21과 비교해 보십시오. 이것에서 그분은 다시 한 번 그분의 백성들에게 감사와 감사하는 마음의 영으로 특징지어져야 한다는 모본을 보여주셨으며, 바울이 그렇게 확실하게 설명하는 열방의 끔찍한 도덕적 타락의 시작은 이것이었습니다 “감사치도 아니하고”(롬 1:21).

 

감람산에서 우리의 복되신 주님의 기도들에 관해 얼마나 기억들이 남습니까? 그분은 중보, 간구, 감사와 아버지와의 거룩한 교제들로 향기로운 산을 만드셨습니다. 만족스럽게 그분은 말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항상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그것들을 행하므로 그분께서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 8:29). 그분의 백성들이 주(週)의 첫 날에 그분을 기억하기 위해 모일 때 노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감람산에 그 밤들
기억합니다,
밤 이슬에 젖은 머리털
기억합니다.
그 날들을 기억합니다
끊임없이 찬양하는 외침
우리가 주님께 올려드립니다
기억합니다.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