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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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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플레니건

이전 묵상에서 언급되었던 것처럼 벳바게의 이름은 성경에 단 세 번 언급되고 세 번의 언급은 모두 동일한 사건과 관련이 있습니다(마 21:1; 막 11:1; 눅 19:29). 비록 그것은 유대 탈무드에 여러 번 언급되지만, 그것은 구약성경에는 한 번도 언급되지 않습니다. 요한은 벳바게라는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다른 세 복음서 저자들과 함께 그 마을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장엄한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요 12:12-15).

 

벳바게는 베다니의 이웃 마을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에, 베다니와 감람산의 꼭대기 사이에 ​​위치하였으며, 오늘날의 아부디스 마을과 동일시됩니다. 이름은 "무화과의 집”을 의미하며 이것은 이전의 보다 비옥한 날들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여리고에서 감람산으로 가는 길은 광야를 지나므로 그래서 산의 무화과 나무들과 감람나무가 참으로 보기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용한 벳바게 마을은 고대의 예언의 성취와 관련이 있게 되었고, 이러한 이유로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슥 9:9).

 

작은 교무리인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이 여리고에서 감람산으로 가는 길에 구주께서 두 제자를 벳바게로 보내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전지전능하심을 모두 나타내시려고 하셨습니다. “너희 맞은편 마을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즉시 너희가 매여 있는 나귀와 그것 곁의 나귀 새끼를 보리니 그것들을 풀어서 내게로 끌고 오라”(마 21:2) 그분의 전지전능한 지식으로 그분은 동물이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이 마을에 들어갈 때 발견되는 바로 그곳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아직 나귀 새끼 위에 어떤 사람도 타지 않았고 꺾이지 않고 길들여지지 않았으며 누군가가 동물을 데려가려는 제자들에게 질문할 것을 또한 알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그분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았습니다. 그들이 나귀새끼와 함께 나귀를 발견하고 그것들을 풀기 시작했을 때 누군가가 실제로 “어찌하여 나귀새끼를 푸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주께서 그것을 필요로 하신다”고 지시받은 대로 대답했으며 거기에 아무 이의가 없었습니다. 마태는 성경이 성취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역사적인 날이자​​ 중대한 사건이 될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유월절을 위해 전국 각지에서 순례자들이 찾아와 붐볐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셨다는 소식이 전파되고 무리는 그분을 맞으러 나갔습니다. 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길에서 펼쳤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분을 앉도록 하기 위해 나귀 위에 겉옷을 펴고 그분의 오심을 위한 준비로 거친 길에 그들의 옷을 펴기도 합니다. 군중들은 기뻐했습니다. 시편 118:25-26의 말씀에서 그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외쳤습니다(마 21:9).

 

소박한 벳바게의 마을로부터 큰 행렬이 산을 올라갔습니다. 스가랴의 고대의 예언은 문자 그대로 성취되고 있었습니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느니라. 그분은 의로우시고 구원을 소유하시며 겸손하사 나귀를 타시되 나귀 새끼 곧 어린 수나귀를 타시느니라”(마 21:5; 슥 9:9). 그들이 천천히 산을 오르면서 기억에 남는 시간이었습니다. 산 꼭대기에 가까워질수록 그들은 어깨를 돌려 내려오기 시작했으며 돌연히 태양 아래 황금 빛으로 빛나는 도시 전체가 보이는 그 지점에 도착했습니다. 그것은 장엄한 전경이지만 그 광경은 곧 왕 자신의 눈물에 가려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기뻐서 하나님을 찬양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왕은 우실 것입니다. 그분은 그들이 알지 못하던 것을 아셨으며 누가는 말합니다, “그분께서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눅 19:41).

 

제자들을 나귀에게 인도하신 바로 그 전지하심 안에서 그분은 앞을 내다보셨고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눈물로 흘리며 “네가 알았더라면”하시며 얼마나 슬프게 우셨습니까? 그들은 그분께서 그들 가운데 사역하셨던 동안 그들의 방문하는 날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평화에 속했던 것들을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백성들이 기뻐할 때 그들의 교만한 지도자들은 원망하며 그들을 꾸짖으라고 지나치게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 날로부터 사십년이 채 되지 않아 즉 그분의 사역의 시작에서 사십년이 채 되지 않아 은총을 받은 예루살렘 성의 기반이 파괴될 것이었습니다. 구주께서는 그것들을 둘러싸고 있는 참호처럼 포위에 직면할 것입니다. 도시와 성전은 파괴될 것입니다. 티토와 그의 군대는 이 언덕에 앉아 도시의 포위를 지켜보고 최종적인 멸망을 계획했습니다. 다른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아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위대한 왕의 도시였고 그분께서 바로 그 왕이셨지만, 예루살렘은 그분을 위한 장소나 때가 없었습니다. 벳바게와 베다니는 그분을 환영할 수 있었지만 큰 도시는 아니했으며, 이제는 운명이 정해졌습니다.

 

또 다시 감람산은 그분의 눈물에 젖었지만, 이 눈물은 베다니에서 요한복음 11:35의 소리없는 울음과는 달랐습니다. 이제 그분은 소리 내어 우셨습니다. 그분의 울음소리는 이제 들을 수 있었고, 벳바게에 시작되었던 이 기쁨의 날이 그 성 안으로 들어갈 때 슬픔으로 관을 씌울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성전 뜰에 들어가셨고 왕의 권위를 가지고 전에 하셨던 것처럼 성전을 깨끗케 하기 시작하셨습니다(요 2:13-17). 탐욕스러운 사람들이 성전 뜰을 장터로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부정직한 거래로 그곳을 도둑의 소굴로 만들었습니다. 그분은 환전상의 상을 엎으시고 신성한 것으로 장사하는 사람들을 쫓아내셨습니다.

 

이제 밤이었습니다. 다사다난한 하루가 저물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무엇입니까? 그분은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을 넘어 다시 베다니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들은 비록 “가난한 사람들의 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그분을 영접하고 후대를 베풀었습니다. 그들은 그분에게 감사하고 그분은 그들의 감사를 인정(감사)하셨습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역에서, 우리의 마음에서, 우리의 가정에서, 우리의 모임에서 그분에게 큰 자리를 드려야 합니다. 세상은 그분을 쫓아냈고 그분은 그분의 백성들을 가운데 있을 곳을 찾으십니다.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