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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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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플레니건

기록되어 있는 주 예수님의 모든 눈물은 감람산에서 흘리신 것이지만 아마도 그분의 백성들이 가장 다정하게 기억되었던 눈물은 “예수님께서 우시더라”라는 두 가지 가슴 아픈 말씀으로 우리를 위해 기록된 베다니에서 눈물일 것입니다(요 11:35). “가난한 사람의 집” 베다니는 실제로 “슬픔의 집”이 되었고 구주께서는 그들과 함께 슬픔을 나누셨습니다. 사건 후 육십 년이 지난 후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이 그분의 베다니 친구들과 함께 우셨던 눈물의 놀라운 광경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다양한 슬픔

두 자매의 슬픔은 복합적이었습니다. 그들의 오빠 나사로가 병들었으며, 이것은 다만 그들의 슬픔의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의 주님이시며 친구가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았다는 사실로 인해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실제로 그분은 침례요한이 침례를 주던 곳인 요단 건너편 베다바라에 아주 멀리 계셨고(요 1:28; 10:40), 그것은 2,3일 거리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사람을 보냈지만 그들의 슬픔은 더하기 위해 그분은 즉시 오지 않으셨습니다. 날이 지나고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그런 다음 매장의 슬픔과 여전히 구주는 그들에게 오지 않으셨습니다. 그 힘든 날 동안의 슬픔에는 참으로 슬픔이 겹쳤습니다.

 

고통의 신비

요한복음 11장의 앞 구절들에는 흥미 있고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마르다와 그녀의 자매와 나사로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을 언급했으며 그 다음 “그분께서 그가 병들었다는 것을 들으신 뒤에 자신이 계시던 그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시고”라고 말합니다. 분명히 이상한 관찰은 이것입니다. 그분께서 그들을 사랑하셨다고 “그러므로” 그분은 이틀 동안 그들에게 가시는 것을 늦추셨습니다!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다시 가자 하시니!” 만약 그분께서 그들을 사랑하셨다면 왜 지체해야 했습니까? 만일 그분께서 그들을 사랑하셨다면 왜 병과 사별의 슬픔을 그들과 함께하기 위해 서두르지 않으셨습니까?

 

이 동정의 산에는 위대한 원리가 있습니다. 물론 그분은 마음속으로부터 강렬하게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것들은 베다니에 있는 이 작은 가족 집단에게 많은 것을 의미했습니다. 사실 그분은 그들이 바라는 것이나 생각했던 것보다 그들을 위해 더 큰 일들을 염두에 두셨습니다. 그들은 곧 베다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었으며, 그분의 지체는 그분의 능력을 나타내기 위한 계획의 일부였습니다. 종종 말씀하셨던 대로 그분의 지체는 거절하심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분을 신뢰해야 하며, 결국 우리는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분의 흐느낌의 위엄

그들이 바로 마을 밖에서 그분을 만난 것은 복잡한 감성과 감정이었을 것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친구들은 모두 한 마음으로 위로하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모여들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그분을 보고 안도하고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분은 일찍 그들에게 오지 않으셨습니까? 슬픔에 잠긴 두 자매는 그분에게 똑같은 말을 말한다, “주여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들은 그분의 치유 능력에 관해 의심치 아니했지만, 그분은 베다니를 위한 치유의 기적보다 더 큰 것을 염두에 두셨습니다. 베다니가 결코 잊혀지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의 영광이 그렇게 나타내셨으며, 그래서 그 사람들은 그 이후 내내 나사로의 마을을 엘 아사랴로 부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승리하기 직전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분의 아름다운 피조물들 가운데 얼마나 큰 재앙을 초래한 죄와 그분의 피조물들 사이에 얼마나 슬픔이 있었습니까? 애도하는 자들의 작은 무리가 통곡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눈물의 중요성 때문입니다. 슬픔의 사람은 동정심으로 그들의 눈물에 동참했지만 소리 없이 그분은 실제로 다른 경우에 큰 소리로 우실 것입니다(눅 19:41), 하지만 지금은 그분의 눈을 적시고 부드러운 뺨을 적시는 것은 소리 없는 눈물입니다. 바로 그분은 살아있는 그들의 오빠를 그들에게 돌려주실 것이지만, 그들은 아직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분은 그들의 슬픔이 깊고 현실적임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그들을 위해 그들을 위해  함께 우십니다.

 

여기 동정의 산에는 큰 원리가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랑하는 성도들이 기도하고 간절히 기도하고, 오랫동안 기도했지만 주님은 듣거나 대답하는 것을 보이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많은 비통한 마음들이 “왜?”라고 묻습니다. 신자들은 노래합니다

 

아직 답변이 없습니까?

당신의 입술로 간청하는 기도
이러한 몇 년 동안 마음의 고통속에서.
믿음은 실패하기 시작했습니까?
희망은 사라졌습니까?
아니면 그 떨어지는 눈물이 모두 헛된 것이라 생각합니까?

 

물론 그분은 들으시고, 마리아와 마르다와 나사로를 사랑하신 것처럼 모든 성도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가 구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하십니까? 우리의 제한된 지식과 함께 실제로 미래에 관한 인간의 무지로 인해 그분은 우리가 이해하거나 예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으로 우리를 위해 계획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마르다에게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것이 그분께서 바로 즉각적인 대화에서 그녀에게 이것을 말씀하셨다는 것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그분께서 그들과 함께 지난 날과 밤 사이에 그들에게 가르치려고 노력해온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원칙은 변하지 않습니다. 신뢰하고 영광을 보십시오. 그분은 또 다른 슬픔의 기회에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막 5:36)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신뢰를 요구하십니다. 우울함과 우리의 눈물을 통해 단순히 ​그분께 맡기고 신뢰하는 것이 때로는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그러나 이것은 그분께서 몹시 바라시는 것입니다.

 

역시나 감람산은 그분의 눈물로 젖었지만, 베다니의 자매들과 함께 우셨던 마음은 변함이 없으시며 여전히 곳곳에서 그분의 백성들의 슬픔을 보시고 함께 하십니다. 결국 모든 것이 영광이 될 것입니다. “밤새 울음이 있을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임하리로다”(시 30:5).

 

아직 답이 없습니까?
아니요, “들어주지 않는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아마 당신의 역할은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일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
당신의 기도가 발해졌고,
하나님은 그분이 시작하신 일을 마치실 것입니다
만약 타는 향기가 유지될 경우,
그분의 영광을 당신은 볼 것입니다
언젠가 어딘가에서.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