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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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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플레니건

우리가 공관복음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이야기는 두 밤 사이에 있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이 밤을 매우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마 26:20; 27:57; 막 14:17; 15:42). 그러나 요한은 두 개의 동산 사이의 이야기를 기록합니다(요 18:1; 19:41). 겟세마네 동산이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하는 사람은 요한뿐이며, 무덤이 동산 무덤이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하는 사람도 요한 뿐입니다. 두 동산은 기드론 골짜기로 거의 확실하게 구분되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정확한 위치를 알아내기가 가능하지 않을 수 있지만, 겟세마네는 도시에서 계곡 바로 건너 감람산의 비탈에 가장 분명했고, 동산 무덤은 모리아 산의 북쪽 끝에 있었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 주님에게는 참으로 깊은 계곡이었습니다. 밤 사이에 그분에게 오랜 고통이 놓여 있었습니다. 동산 사이에는 슬픔의 계곡이 놓여 있습니다.

 

“겟세마네”는 “기름 짜는 틀”을 의미합니다. 그 전통적인 유적지에는 고대의 감람나무들이 몇 그루 여전히 자라고 있는데 그곳은 분명하게 감람에서 분쇄되어 기름을 짰던 곳이었을 것입니다. “겟세마네”라는 이름은 아람어 Geqshmanei(게드세마네이)로 감람 압착기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이며 마태와 마가 모두 겟세마네로 불리는 “장소”로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은 흥미롭습니다(마 26:36; 막 14:32). 그들이 사용하는 “장소”라는 단어는 cwrivon(코리온)이며, 몇몇 학자에 따르면, 그곳이 둘러싸인 땅, 아마도 실제로 벽으로 에워싸인 동산이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누가 이 동산의 주인입니까? 누가 그 작은 무리에게 고요한 묵상과 교제의 빈번한 순간을 위해 사용하도록 하였습니까?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과 함께 거기에 자주 가셨으므로”(요 18:2). 언젠가는 우리가 알 수 있을 것이지만, 그동안 동산의 주인은 익명인 채로 남아있으며 현재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때가 되면 적절하게 보상해 주실 주님께 수행한 많은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우리 주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기 이전에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시간을 위해 동산을 선택하신 것은 적절해 보입니다. 그러나 겟세마네는 신비에 싸여 있습니다! 나머지 열 한 명 중 여덟은 거리를 두고 있어야 하며, 특혜를 받은 세 명도 남겨두고 그분께서 돌 던질 만큼(눅 22:41) 조금 더 나아가셔야 했습니다(마 26:39). 옛날 거룩한 언약궤와 백성들 사이의 거리가 있었듯이 지금도 그렇습니다(수 3:3-4). 거룩한 구주께서는 아무도 따라갈 수 없는 곳에 가십니다. 그것은 누구도 나눌 수 없는 고통일 것이며, 그분은 홀로 고통 속에 들어가십니다. 골고다에서 닥칠 무서운 죄를 짊어지실 시간을 예상하셨을 때 그분이 견뎌야 했던 압박이 얼마나 겄겠습니까!

 

겟세마네, 감람을 짜는 틀,
그리고 왜 그렇게 불리었나 천사들이 알아보게 합시다.

 

그분은 죽음에서 물러서지 않았지만 이것은 평범한 죽음이 아닙니다. 그분은 그것으로부터가 아니라 그 중에서 구원받으실 것입니다(히 5:7 RV 난하주). 다른 사람을 죽음으로부터 일으키셨던 분이 비록 자신의 불멸의 본성에서 생소한 것이지만 순종적으로 죽음으로 가실 것이며 그분이 알고 예상할 수 있었던 것처럼 어둠과 그 모든 것의 외로움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은 그분에게서 가려질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버림받으실 것이며 죄 없는 분이 다른 사람의 죄를 짊어질 것입니다. 갈보리 바로 앞의 동산에서 이 시간들에 “심한 통곡과 눈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져야 합니까?

 

통곡과 눈물! 우리 신약 성경에서 눈물에 대한 두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들은 그분이 베다니에서 자매들과 함께 눈물을 흘렸던 것처럼 구주의 흘리는 소리 없는 눈물이었습니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의 슬픈 미래를 생각하며 흘린 눈물은 달랐습니다. 그것은 들을 수 있는 울음소리였습니다. 두 단어가 히브리서 5:7에 있습니다. 이 “통곡과 눈물”은 반드시 겟세마네에 국한될 필요가 없지만 우리는 그곳에서 모든 것을매우 특별하게 볼 수 있습니다. “통곡”(kraughv,크라우게)은 누가복음 19:41처럼 들을 수 있는 큰 소리로 우는 것입니다. “눈물”(davkruvon,다크뤼온)은 요한복음 11:35처럼 뺨을 타고 조용히 흐르는 소리 없는 눈물입니다. 그분은 골고다를 예상하신 대로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심한” 통곡과 눈물이었습니다. 형용사 “심한”은 강력한 것입니다. 그것은 강한, 강력한, 거대한, 거친을 의미하는 jscurov"(이스퀴로스)이다. 그것은 천사의 권세(계 5:2), 폭풍의 힘(마 14:30), 심지어 주님의 권세(계 18:8)를 묘사합니다. 지난 밤에 동산에서 우리 주님의 통곡과 눈물을 흘리신 모습이 그러했습니다.

 

결코 끝나지 않은 눈물의 동산
인간은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보통의 흐름이 아닌:
더 깊은 곳에서 이끌린!
소리없는 깊숙함에서 이끌린,
잔디밭을 향하여 진행하며
끝없는 사랑을 말하며
하나님의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그분의 혼의 고뇌로 말미암아 구주께서는 심히 근심하시고 매우 고민하셨습니(막 14:33-34). 그분은 엎드려 기도하셨지만 제자들은 잠들었습니다. 그분은 그들에게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도대체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었느냐?” 그분은 기도하러 다시 가셨고, 그들이 다시 자고 있는 것을 두번째 보셨습니다. 마음이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다는 것을 그분은 아셨습니다. 세 번째로 그분께서 그들을 떠났고 이제 되돌아오셔서 그분은 “일어나라 … 나를 배반하여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고 손짓하셨습니다.

 

우리가 지나온 이 땅은 얼마나 신성한 땅입니까? 베드로, 야고보, 요한의 특권도 여기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신발을 신지 않은 상태로 와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감동으로 그분의 부르짖음을 듣게 되었으며 “내 뜻이 아니옵고 오직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을 행함에 있어서 죽기까지 순종하실 것입니다. 그때 그분 홀로 수반될 조롱의 긴 밤과 밤의 뒤를 이을 고통의 아침의 모든 세부사항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분의 아버지의 뜻이었고, 그분은 가실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또한 유다가 자신의 배신 행위로 그 당시에도 접근했지만 그것이 미래의 “감람산의 추억들”에 속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