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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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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 in The Song of Solomon
솔로몬의 노래에서 그리스도(2)

짐 플레니건

“그분의 방들에서”

솔로몬의 아가에서 왕에 대한 언급이 다섯 번 나옵니다. 이것은 첫번째입니다: “왕께서 나를 자신의 방들로 데려가셨으니.” “방들”은 왕의 개인적인 은밀한 방을 표시하는 히브리어 헤데르입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자와 그분의 신부가 방해받지 않는 사랑의 분위기 속에서 서로의 교제를 즐기는 사생활과 친밀함의 그림입니다.

 

신부의 “나를 이끄소서” 요구에 대한 반응과 대답입니까? 그녀는 이 신성한 친교를 원했으며 이제 그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구속된 마음의 모든 간절한 마음이 우리가 사랑하는 그분에게 가까이 다가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까? 바쁜 세상 모든 주변에 혼란스럽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을 요구하는 볼거리와 소리들이 있지만 성도들은 마음으로부터 노래합니다.

 

가까이 더 가까이, 당신 마음에 가까이,
나를 이끄소서 나의 구주, 너무나 소중한 당신.
나를 접고, 오 나를 접고, 당신의 품 가까이,
그 안식처에서 나를 안전하게 보호하소서.

 

대명사에서 변화를 주목하십시오. 그녀는 “나를 이끄소서” 그리고 “우리가 당신을 따라 달려 가리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개인 신자들의 열정적인 활동은 이제 왕의 동무로서 사귐과 임재를 바라는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물론 신부는 다른 사람들이 누리지 못하는 친밀함을 누리는 것이 사실이지만 왕에 대한 그녀의 애착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그분에게로 이끕니다. 잘 알려진 또 다른 사랑 이야기에서 룻은 처음에 보아스에게 끌리지 않았다고 지적합니다. 모압 소녀에게 영향을 끼친 것은 전능자께서 나오미를 대하신 일에서 보았고, 부드러운 엘 샤다이에 대해 베들레헴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그녀의 마음에 간절함을 일으켰습니다.

 

나 자신과 내가 하는 일이 다른 성도들을 향해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엄숙하고 진지한 일일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또한 그분에게 끌릴 수 있도록 언제나 우리는 왕의 임재를 누리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러나 그렇다면 그분의 임재를 내가 어떻게 알 수 있는지를 어린 신자가 질문할 수도 있습니까? 어떻게 사랑하는 자의 내실에서 나누는 친교의 감미로움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어떤 의미에서 그 답변은 간단하지만 우리는 살아가는 혼잡한 세상에서 아마 그것은 오히려 어려운 증명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주변의 불안정한 세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조용한 장소 내실입니다. 그러나 기도와 그분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특권을 통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모든 마음은 즉시 접근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성막에 있는 지성소처럼 그 두려운 임재 속에 참으로 어느 정도 외로움은 실제라 할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이 얼마나 떨리며 휘장 안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 보다 더 낮은 수준의 수천의 제사장들이 때때로 휘장 가까이 다가가지만 결코 그것을 넘어서거나 안을 볼 수 없습니다. 지성소 영광에 들어가는 것은 일년에 한 번 한 사람에게 수여된 유일한 특권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신자는 다릅니다. 신부의 애정이라는 감미로운 특권 안에서 우리는 이제 담대하게 나아오도록 초대되었기 때문에 거룩한 친근함을 가지고 들어갑니다. 영적인 마음은 이제 경건한 확신을 가지고 왕의 내실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그분과 평화로운 친교를 위해 때때로 세상에서 물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때때로 그것은 우리가 필요한 때에 가까이 오라는 그분께 간구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때에 은혜를 구하러 오라는 초대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께 우리가 예배하려고 거기에 왔을 때 얼마나 감사해야 하는지요! 그리고 예배는 무엇입니까? J.N. 다비의 정의는 더 낫게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 안에 있는 것과 그것을 주시는 자들에게 의미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영광과 경배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자에 대해 좋게 말하기 위해 우리가 그분에게서 찾은 것과 그분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말하기 위해 다가갈 때 하나님의 마음을 즐겁게 합니다. 이것이 내실의 특권입니다. 그것은 신성한 위격과의 친교입니다.

 

왕의 내실의 복된 고요함은 묵상에 도움이 되며, 신부는 “우리는 기억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바쁜 삶과 요란한 세상에서 벗어나 소중한 묵상을 하는 신자는 기억하려는 시간과 기회를 갖게 됩니다. 그분의 임재 안에서 우리의 마음을 채우는 기억은 얼마나 됩니까! 고귀한 왕이시지만 우리는 그분의 육체의 날들 강보에 싸이고 구유에 누이고 소박한 베들레헴의 낮아지셨던 일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기쁨을 위해 살고 있는 나사렛의 소년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전도, 가르침과 병 고침에서 모든 손에 복을 나누어 주시고, 수가에, 가나에 향기를 가져온 비천한 갈릴리 사람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겟세마네, 갑바다, 골고다 그리고 동산 무덤을 기억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진정으로 기억하고 경배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할 것입니다! 우리는 놀라운 은혜 안에 있으며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신”(요 3:35) 사랑의 고리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따라서 영원 전부터 아버지의 품에 있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은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요 14:3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그분은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요 16:3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요 15:9)라고 말씀하시며 계속됩니다. 각 신자는 개인적으로 또 때로는 모든 것의 복됨을 깨닫고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아들”(갈 2:20)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우리는 함께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고 외칩니다. 그런 다음 때때로 어휘가 부족할 때, 우리는 단순히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요 21:17). 참으로 신성한 사랑의 고리이며 왕의 내실의 고요함 속에서 우리는 “우리는 포도주보다 더 많이 당신의 사랑을 기억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분의 사랑은 세상이 제공할 수 있는 모든 축적된 기쁨보다 더 감미롭습니다. 세상의 기쁨은 일시적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억합니다.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