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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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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

아가에서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에 대한 세 번의 언급이 있습니다. 첫 번째 언급에서, 그분은 그분의 배우자를 자신과 함께 있도록 부르십니다(2:8-10). 두 번째로 그분은 그녀에게 그녀의 함께 있을 처소를 제공할 것을 요구하십니다(5:2). 마지막 언급에서 그녀는 그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민감해지기를 간단히 기도하는 것으로 아가가 끝납니다(8:13). 신부의 목소리에 대한 언급은 단지 한 번뿐입니다(2:14). 그녀의 목소리는 그분에게 달콤하고 그분은 그녀의 말을 듣기를 갈망하십니다.

 

신약성경에는 아가에서의 어떤 인용도 없다는 말을 종종 듣고 있으며, 이것은 실제로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요한계시록 1:7에 “보라, 그분께서…오시느니라”에서 반복되는 세 단어 하나의 작은 구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내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이다”라고 배우자가 외칩니다. “목소리”는 발자국 소리와 마찬가지로 “소리”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번역이 선호되든지 의미는 같습니다.

 

사랑하는 자는 다가와 부르며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라고 말씀합니다. 겨울의 어두운 밤이 끝나고 새로운 여름날이 밝을 때 그분과 함께 있도록 그녀를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미래의 고통받는 남은 자들에게 얼마나 적절하고 얼마나 소중한 일이 될 것입니까! 환란과 박해의 어두운 시절은 메시아가 오실 때 밝은 천년의 여명이 밝아올 것입니다.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 그분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그러나 오늘날 신자들은 증거의 밤 이후에 신부를 부르는 신랑의 목소리에 기를 기울이며 동일한 소망 안에서 기뻐합니다. 많은 개인적인 성도들에게 참으로 춥고 어두운 고통의 겨울이었습니다. 많은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이 있었습니다. 실망과 슬픔, 질병과 고통, 육체적 허약함, 사별(死別), 그리고 애도의 날들, 사랑했던 사람들과 이별의 슬픔, 구원받지 않은 가족에 대한 깊은 슬픔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게 슬픔의 긴 겨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곧, “내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가 있을 것입니다. 그분은 오실 것입니다. 그분은 오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임재의 영원한 여름은 밤의 어둠을 영원히 몰아낼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그녀에게 이르기도 전에 그녀는 그분의 나타나시는 징조를 봅니다. 그분은 벽 뒤에 서서 창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고 창살을 통해 흘깃 바라보십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단순히 벽에 있는 구멍이나 틈을 의미하는 “창살” 단어가 나오는 유일한 곳입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그분은 지금도 이스라엘과 열방들을 다루시면서 세상 환경의 창살을 통해 그분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십니까? 얼마나 당연하게 우리는 노래하는지요-

 

그분의 발소리를 거의 들을 수 있습니다 
문의 문턱에서 
그리고 내 마음, 내 심장은 갈망합니다 
그분과 영원히 함께하기 위해.

 

머지않아 우리는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는 그분의 목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마라나타!

 

하지만 그날까지 우리는 또 다른 측면에서 그분의 목소리에 민감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의 음성에 대한 두 번째 언급(5:2)에서 그 장면은 요한계시록의 3:20에서 라오디게아에 보낸 서신에 그것을 연상시킵니다. 그분은 밖에 계십니다. 그분은 문을 두드리며 “내게 열어다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그분의 신부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기를 간절히 원하시며 왜 그녀가 그분에게 열어야 하는지 다섯 가지 설득력 있는 이유를 제시합니다. 동일한 조건이 오늘날에도 발생하며 동일한 이유가 거부된 주님을 위한 여지를 만들기에 충분합니다.

 

그분은 “내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순결한”으로 자신의 배우자를 부르며 바깥에 있는 고통에 대해 말합니다. 여기에 “내 누이”는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관계입니다. 이 근거로 그분은 호소합니다. 세상 일에서 그분을 배제한 세상에서 그분은 그녀가 가진 전부입니다. 확실히 이런 이유로 그녀는 그분에게 마음을 열어야 했습니다. 또한 여기서도 “내 사랑”이라는 그녀에 대한 그분의 깊은 애정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가에서 첫 번째가 아니라 그분은 그녀를 “나의 비둘기”로 부르실 때 이 모든 경우의 다정함이 다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 다음 도덕적 타락의 장면에서 그분은 그녀를 “나의 순결한 자”로 부르십니다. 오늘날 그분의 백성들이 더럽혀지고 타락한 세상에서 그분의 거룩함을 보여주면서 그분에게 있어야 하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그러나 그분이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 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가장 설득력 있는 이유입니까? 그분은 밖에 계십니다! 심지어 그분의 육체의 시절 때에도 그러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베들레헴에서 “방이 없었다”라고 말했으며 그분은 밖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은혜로운 사역 이후 나사렛에서 쫓겨났습니다(눅 4:28-30). 가버나움에서 그분의 능력이 그들 가운데서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불신앙이 그분을 배척했습니다(마 11:23). 결국 위대한 예루살렘 자체가 그분을 쫓아냈고 그분은 “성문 밖에서”(히 13:12)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것은 여전히​​ 동일합니다. “우리의 주님은 지금도 거절되고, 세상에 의해 관계를 부인 당하십니다.” 그분이 어디에 계시든 그분의 백성과 함께하셔야 했으며, 우리에게 그분은 “내게 문을 열어 달라”고 호소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함께 만찬을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으리라.”

 

실제적으로 이것은 우리의 가정, 우리의 삶 속에, 우리 집회들에, 우리의 사역에, 우리의 마음의 자리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그 중심에 계시면, 그때 다른 것들은 제자리를 찾을 것입니다. 한 때 사람들은 행성 지구가 중심에 있고 그 모든 것은 그 주변을 움직인다고 믿고 있었던 때, 그들의 예측과 계산은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 중심인 것을 발견했을 때, 그때 모든 일들이 순리대로 움직였습니다. 그들은 바로 중심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은 세상에 의해 거절되신 “가운데서”(요 19:18)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이며, 그분은 이제 그분의 백성들 가운데 자리를 원하십니다.

 

“내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 어느 날 그분은 우리를 그분과 함께하는 곳으로 부르실 것입니다. 오늘날 그분은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한 장소를 요구하십니다. 우리의 기도는 신부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나니 나로 하여금 그것을 듣게 하소서”(8:13).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