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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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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loyd Cain

사면(용서)은 우리의 이전 삶에서 우리의 죄들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또한 구속도 우리의 이전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지만 주로 노예의 신분에 우리가 붙들려 있었다가 지불된 값 때문에 그 속박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칭의는 법적으로 되돌아보게 하며 우리에게 불리한 모든 혐의가 제거된 것을 봅니다. 화목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을 바라보고 관계 회복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속죄는 위를 향해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모든 요구들을 만족시키는 것을 바라봅니다. 이러한 모든 위대한 단어들은 갈보리를 뒤돌아보게 합니다. 사면에서 우리는 우리의 죄들이 멀리 보내짐을 봅니다. 구속에는 속박에서 단절이 있습니다. 화목에서 우리는 적대감에서 접근하도록 바뀐 관계의 상태에 있습니다. 칭의에서 하나님 앞에 신자의 위치가 가장 중요합니다. 성화에서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또한 하나님을 위해 구별된 성별을 갖습니다. 속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의로운 요구에 대한 만족을 갖습니다.

 

사랑과 빛의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

이교도의 개념은 그들이 믿는 신이나 신들로부터 어떠한 복이라도 받으려면 제물에 의해 달래야 하는 진노의 신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신은 달래기 위한 필요가 있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노여움에서 해방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서 계시된 하나님에 관한 정확한 인식이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죄값을 요구하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견해를 제시하는 신학자들은 성경에서 그분 자신을 계시하셨던 하나님을 정확하게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 자비, 은혜의 하나님, 그리고 평화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또한 거룩함과 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의 의는 죄가 처벌받기를 요구하십니다. 요한은 그의 첫 번째 서신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16)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하나님은 빛이시라”(요일 1:5)고 썼을 때 하나님의 성품을 제시합니다. 빛으로서 그분의 성품은 그분의 본질적인 거룩함과 의로움을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분의 의는 죄에 대하여 공의를 요구합니다. 사랑으로서 하나님의 성품과 빛으로서 그분의 성품을 모두 만족할 수 있는 모임의 장소가 있습니까?

 

속죄의 그림

성막의 건축에서 모세가 언약궤에 관련된 지시를 먼저 받았다는 사실은 흥미롭습니다(출 25:9-10). 법궤는 조각목으로 만들고 안팎을 금으로 씌우는 것이었습니다. 궤가 만들어졌을 때 그것들과 함께 관과 고리들과 채가 있고 그 안에 돌판으로 되어 있는 증거판이 놓였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기뻐하오니 참으로 주의 법이 내 마음속에 있나이다”(시 40:8, 히 10:7). 법궤가 완성되었을 때, 또한 속죄(화목)를 불러왔던 속죄소를 두었습니다. 속죄소의 양쪽 끝에는 속죄소를 덮는 금을 두드려 만든 그룹이 있었습니다. 그것들의 얼굴은 속죄소를 향해 서로 마주했습니다. 하나님의 선언을 주목하십시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출 25:22, 개역). 속죄는 오직 만남의 장소인 속죄소 위에 뿌려진 피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목적

신약성경에서 “속죄” 또는 그것의 유사어가 처음 사용된 곳은 누가복음 18:9-14의 비유입니다. 회개한 세리는 “하나님이여 죄인인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라고 기도했을 때, 그는 iJlavskomai(힐라스코마이)”– ‘나에게 호의를 베푸소서!’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는 다만 희생물의 근거로만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하나님께 요청 드렸습니다. 그는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에 내려갔습니다! 왜요? 그는 칭의가 오직 희생물에 근거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즉 속죄에 있습니다.

 

신약에서 속죄(iJlasthvrion,힐라스테리온)라는 단어가 두 번째 사용된 곳은 로마서 3:21-26에 있습니다. “이제는 율법 밖에 있는 하나님의 의 곧 율법과 대언자들이 증언한 의가 드러났느니라 …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구속(救贖)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느니라. 그분을 하나님께서 그분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한 화해 헌물로 제시하셨으니...이때에 자신의 의를 밝히 드러내사 자신이 의롭게 되며 또 예수님을 믿는 자를 의롭게 만드는 이가 되려 하심이라.”

 

본문에서 우리는 “칭의, 구속, 은혜, 죄 사함, 그리고 속죄”라는 단어들이 함께 혼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의”라는 표현에 주목하십시오. 이것은 그분의 신성한 의의 속성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지만 오히려 그분께서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수단으로 가리킵니다. 이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을 주목하십시오. 둘째로, “구속”이란 단어를 주목하십시오. 값이 지불되었고 속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세 번째로, “속죄”라는 단어를 주목하십시오. “속죄소” 또는 “만족시킴” 단어로 대체할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갈보리에서 지불한 속죄의 대가로 하나님의 모두 요구가 법리적으로 충족되었기 때문에 속죄제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만나 교제하실 수 있습니다. 개정역 판은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라고 번역할 때 정확합니다. 믿음은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믿음에 근거하고 전적으로 피의 근거로 용서하시고, 의롭다 하시고, 그리고 화목케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본문에서 사면을 위한 단어는 그렇게 번역된 일반적인 단어가 아니지만 오히려 “pavresi"(파레시스)” – 이전에 넘겨진 죄들을 무시함 – 즉 구약 성도들의 죄들입니다. 갈보리는 아직 미래에 있었고 그들은 신용으로 구원받았습니다. 현재에도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당연히 의롭다 하십니다. “이때에 자신의 의를 밝히 드러내사,”라는 표현을 읽을 때, 우리는 죄인을 의롭게 하실 뿐만 아니라 그분의 의의 속성, 그분의 행위를 보는 것입니다. 사랑과 빛이신 하나님의 목적은 죽으신 그리스도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말씀 안에 교육

속죄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의 다른 네 곳에서 발견됩니다. 히브리서 2:17에 단어는 “iJlavskomai(힐라스코마이)”이고 “속죄”가 아닌 “화목”(한글개역은 구속)으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9:5에 보면 “이 궤 위에는 긍휼의 자리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었는데”라고 했습니다. “속죄소”라는 단어는 로마서 3:25과 동일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만남의 장소였습니다. 우리에게 단어가 두 번 더 있습니다. 요한일서 2:2에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중에 요한은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우리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로 삼으셨나니 여기에 사랑이 있느니라”(4:10)라고 기록했습니다. 요한의 기록에서 우리는 정확하게 “만족시킴” 단어를 대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만족하십니다. 그분의 모든 요구는 갈보리에서 충족되었습니다. 의로우시며 의롭다고 하시는 그분의 본질적인 목적은 구속자, 화해자, 그리고 속죄자이신 의로우신 예수님 때문에 가능합니다.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