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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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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1. 19. 21:48 횃불/1999년

노아-그의 생애와 그 시대(16)

사무엘 W. 제밍스 지음/ 장세학 옮김

16장 창세기 6-8장의 악한 세대들

주께서는 그분의 사역 당시에 누가복음 17장과 마태복음 24장에서 노아의 날들에 관해 언급하셨다. 그 두 군데에서 주께서 말씀하신 요지는 그 당시 사람들의 하나님을 향한 부주의한 태도와 임박한 심판에 대해 소경된 사실을 증거한 것이다. 그 당시의 기록은 창세기 68장에 있지만, 그러한 세대의 모습은 불과 몇 마디의 말로 요약된다.

하나님의 아들들의 부정한 후손뿐만 아니라 거인들도 동시에 그 땅에 거했다. 이러한 모습은 천사들의 부정한 결합의 결과가 아니라 이미 있었던 악에 덧붙여진 것이다. 이 거인들은 매력적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민수기 13장에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려고 했을 때에 가나안 땅에 다시 나타났고 여호수아 시대에도 다시 출현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이름을 가졌다. 창세기 6 4절에서는 네피림으로, 명기 2 11절에서는 아낙 자손으로 쓰였는데, 이는 민수기 13 33절에 언급된 아낙 자손과 동일할 것이다. 그리고 신명기 2 20절의 르바임은 암몬 사람들이 삼숨밈으로 불렀는데 이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어디서 생겼는지 그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가 않다. 주께서는 성도들이 그 속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보도록 의도하셨음에 틀림없다. 그들은 육신의 상징임이 분명하다. 주님의 명령은 그들을 완전히 진멸하라는 것이었다. 신자는 로마서 8 13절에서 그 똑같은 일을 하도록 명령받는다. 즉 육체의 행위가 나오는 통로가 되는 몸의 행실을 죽이라는 것이다. 만일 이스라엘이 그 거인들을 죽이지 않았다면, 그 거인들이 보잘것없는 이스라엘을 곧 살해했을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는 이렇게 경고한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8:13). 즉 그렇게 살게 되면, 여러분의 영적인 삶이 낭비될 것이라는 말이다. 거인은 육체가 과도하게 자란 것인데, 자연인이 산출할 수 있는 가장 뛰어난 존재이며, 그들은 자연인에게 매우 매력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후손 가운데는 어떠한 거인도 생겨나지 않았다. 그리고 성경에는 하나님께 돌이킨 거인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고 그들은 주님과 그분의 백성들에게 원수로 남았다.

5,6절은 가장 흥미로운데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라는 인간 마음의 어떠함을 폭로하시며, 하나님은 그 존재의 어떠함을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그들에 대해 마음에 근심하시고라고 표현하셨다.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6).

그 동일한 사상이 사무엘상 15 11절에 이렇게 나온다.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리고 사무엘하 24 16절도 이러하다.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 손을 들어 멸하려 하더니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그런데 이러한 말씀들은 그와는 정반대 되는 민수기 23 19절의 말씀을 대할 때 무척 곤란해진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어떻게 이러한 차이들이 조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 하나님의 목적과 그분의 하시는 방법들의 차이를 분명히 이해해야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들은 마치 그분의 보좌가 영원한 것처럼 결코 바뀌어질 수 없다. 그러나 그 목적을 이루시는 그분의 방법은 책임성 있는 인간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변개될 수 있다.

이러한 점에 관한 가장 좋은 예는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주께서 모세에게 하신 다음의 말씀에서 발견된다.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 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3:8).

그런데 여기서는 광야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 없었으나 그들의 생애는 광야에서 40년을 보내게 되었다. 광야는 하나님의 방법들이었고, 그 약속의 땅은 하나님의 목적이었다. 하나님의 방법들은 다음과 같은 신명기 8 2절에 분명히 보인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방법들)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이러한 차이를 이해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후회하심이라는 어려움이 사라진다. 민수기 23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그분의 고정된 목적을 그 문맥이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처럼 말씀하신다. 그분은 그러한 목적에 대해서는 후회하시거나 물러설 수 없으시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으시다( 11:29).

다른 구절들은 책임 면에서 인간의 애씀과 그러한 면에서 하나님의 방법들과의 관련하에서 이해해야 한다. 만일 사람이 실패한다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축복을 주시려는 부분에 있어서 후회하실 수 있다.

비록 하나님이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셨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제쳐둔 것은 아니다. 홍수에 의해 모든 장애물이 제거되었지만, 인간은 그분의 행하신 손길을 넘어 의로 다스려야 하며 우리는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다.

또 다른 진술은 훨씬 더 멀리 나아간다. “마음에 근심하셨다.”

인간의 태도와 행위는 하나님의 마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이 정말 사실이지만 그 반대에 대해서는 좀처럼 고려하지 않는다. 완전한 인간이신 그리스도 예수는 하늘이 열리게 했고, 하나님은 그 깊은 기쁨을 온전히 표현하셨다. 로마서 14 68절은 우리 중에 아무도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주를 위해 산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 그분께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성도가 신실함, 거룩, 순종 그리고 그분의 이름으로 드려진 모든 섬김으로 주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러나 그 반대 또한 사실이다. 우리는 성령님을 근심케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님을 슬프시게 할 수 있다( 4:30). 하나님께 있어서 성도는 세상의 소금이다. 하나님은 이 암울한 세상의 그 어떤 것에서도 기쁨을 가질 수 없으시다. 성도들은 거대하게 보이는 이 땅에서는 너무나 하찮은 존재처럼 여겨지지만, 그들이야말로 영광스런 영원한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창세기 6장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피조물이 그릇된 길로 가고 부정한 결합과 부패와 폭력이 난무함을 인해 그 마음이 몹시 슬프셨다. 이제 그러한 피조물들을 멸망시켜야만 했다.

인간의 길들에 대한 이중적인 진술이 있는데, 그것은 6절에서 주님의 마음에 슬픔이 되었던 그 이유를 제시한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6:5).

여기서 2절의 악의 폐해와 타락의 열매를 볼 수 있다. 여호와의 목전에 모든 것이 드러나고 아무것도 감출 수 없다. 사람들은 수치를 모르는 것 같았고, 노아는 당시에 공공연하였던 그러한 악한 일들과 전혀 타협하지 않았다. 오늘날도 그와 마찬가지로 행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빛이며, 주의 자녀들은 오늘날 행해지는 악들에 대해 분명히 거부한다고 말해야 한다. 사람들의 악함이 아니라 사람의 악함이라는 단어에 주목하자. 이 견해에는 모든 사람들의 타락한 성품이 있다. 첫 사람 아담의 타락으로부터 모든 사람들은 그와 마찬가지의 타락한 성품을 지니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들이 거룩한 불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러나 인간은 전적으로 사악하고 죄성이 가득하다. 그는 죄를 멈출 수 없다.

그 뿌리 또한 보여진다.

그 마음의 생각의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이것은 다음과 같은 8 21절의 말씀이 더해져야 한다.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모든 사람들은 사람이라고 가리켜진 단어에 다 포함된다. 그 생각의 모든 상상하는 바란 자연인의 마음이 모든 면에서 하나님과 반대됨을 의미한다. 주께서는 이사야 55 8,9절에서 다음과 같이 그것을 말씀하신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마음의 상상하는 바는 자연인에 대해 묘사한 바울의 에베소서 2 2,3절에서 잘 이해할 수 있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마음의 상상하는 바는 마음의 욕망과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그들이 하기를 원하는 것들과 하고자 의도하는 것들을 전혀 하나님을 생각지 않고 행했고, 종종 하나님의 길을 공공연하게 대적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마음의 변화를 의미하는 회개라는 단어에 빛을 비춰준다. 즉 더 이상 자신의 길을 구하지 않고 주님의 길을 구하며, 거룩하신 하나님의 목전에서 자신의 자아의 죄됨을 인식하는 것이다.

주께서는 홍수 이후에 창세기 8 21절에서 거듭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이것은 홍수가 비단 사람의 마음의 상상하는 바가 악한 것 뿐만 아니라 보다 더 악한 것, 즉 하나님의 아들들인 천사들과 사람의 딸들이 부자연스런 결합을 한 것에도 그 원인이 있음을 보여준다. 인간의 마음은 그처럼 악했지만 이제 또 다른 홍수가 필요치는 않다.

이 구절에서 관찰될 수 있는 또 하나의 관점은 하나님께서는 청년의 때를 책임을 져야할 때로 보신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죄 가운데서 태어나기 때문에 그분은 출생시로부터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청년기로부터 자연인의 마음과 상상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벗어나서 가게 된다.

로마서 1장의 죄와 범죄에 관한 긴 목록은 홍수 이후의 인간에 대한 묘사인데 이처럼 인간은 변화하지 않았다. 홍수는 지질학적인 변화는 가져왔지만 인간의 마음은 변화시키지 못했다.

상상의 모든 영역이 부분적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영향을 입게 되었다.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 목전에 범죄자로 제쳐졌다. 인간은 하나님 또는 어떠한 권위로부터 어떠한 통제도 원치 않는다. 결국 더욱 더 악화될 뿐이다. 그같은 불의가 가득차게 되어 주께서 인간의 모든 어리석은 상상을 마침내 끝내기에 이르게 되었다.

노아는 그 방주를 짓는데 100년이 걸렸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악은 점점 더 증가되었다. 동시에 노아는 의를 전파했고, 주께서는 오랫동안 기다리셨다. 사람들은 물에서 아주 떨어진, 마른 땅 위에 배를 만드는 그를 바보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한 번만 말한 것이 아니라 두 번이나 말씀했지만 인간은 인식하지 못했다.”

하나님은 그 기간 동안 적어도 세 가지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1) 노아의 삶과 그의 전파를 통해 의를 증거했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했으며, 그들의 악한 행위로 인해 그같은 증거를 거부했다.

(2) 방주를 짓는 것은 하나의 표징이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볼 수 없었다. 그것은 또한 모든 사람들이 부주의하게 지나쳤던 것이다. 그 징표는 거의 인식되지 못했다. 복음서에서 사람들은 표적을 구했지만, 주께서는 매일 넘치게 나타내셨다.

(3) 죄의 끔찍한 증가 또한 하나의 메시지였다. “그같은 악이 종국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 사람들이 생각해야 했지만, 전혀 그러지 아니하고 그들의 마음의 의도가 항상 악을 행하려는 것뿐이었다.

 

이제 이러한 세 가지 목소리가 오늘날의 세상에도 있다. 즉 복음의 증거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그리고 별반 다를 바 없는 세상의 악한 모습이 그것이다.

이스라엘과 열방의 징조들 그리고 모든 형태의 악이 끔찍하게 증가되는 것은 주의 오심이 심히 임박했음을 나타낸다. 사람들은 이러한 일들을 생각하고 회개해야만 한다. 그러나 노아의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세상도 그러하다.

7장에서는 홍수에 대해 다루는데, 물이 갑자기 위에서 쏟아졌고 땅 아래서도 솟아났다. 그것은 아마도 사람들에게 대단한 충격이 되었을 것이다. 유일하게 안전한 장소는 방주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문은 하나님에 의해 닫혀졌고 아무도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었다. 이제 거기는 더 이상 아무런 소망이 없었고 오직 절망과 쓰라린 후회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서 물속에 휩싸여 영원한 흑암속으로 떨어졌다. 비록 개중에 눈물로 신중하게 회개의 기회를 얻고자 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더 이상 기회란 없었다. 그들 자신의 악한 마음의 의도를 따르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모든 빛을 거부하고 결국 하나님을 망각한 자들의 비참한 결말은 그러하다. 주께서 다시 오실 때 이 모든 일들이 거대한 규모로 다시금 재현될 것이다. 그렇지만 주께서 재림하시기 직전의 세대의 모습은 동일하게 주의 경고를 부주의 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8장의 까마귀는 그 방주를 떠나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것은 부정한 짐승으로 자연인의 모습을 나타내주는데, 그 까마귀는 심판 받은 세상 아래에서 만족해 하였다. 심판으로 인하여 물 위에 떠있는 시체들이 까마귀에게는 잘 맞는 환경이었다.

결국 모든 인간의 영광, 즉 거대한 문명 세계의 영광은 심판의 파도 아래로 그 인간과 함께 가라앉았다. 그들은 커다란 죄와 더불어 놀랍게 진보하고 사업이 성공하는 가운데 있었고 부정한 결합을 하며 살았다. 이러한 일들은 인류의 보존과 그분의 목적을 이루실 완전한 인간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오심을 위해 하나님의 심판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주께서 친히 지으신 모든 것을 다스릴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1999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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