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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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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1. 19. 21:54 횃불/1999년

도망친 노예()(2)

빌레몬에게 쓴 바울의 편지

― 제 1 부 복 음 ―

R. H. 사익스

(2) 죄 인

본 서신이 성경의 소중한 가르침에 대한 분명한 그림들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이제 그들 중의 몇 가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는 오네시모 자신에 관한 것이다. 영적으로 볼 때 오네시모에게 해당되었던 많은 일들은 우리 모두에게도 또한 해당된다. 그러한 것들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자.

 

1. (노예)

이미 우리는 그가 종이라는 것을 주목했다. 이는 다른 사람에게 소유되었다는 말이다. 종은 기뻐하는 대로 행할 자유가 없다. 당시 노예 제도는 로마 제국에서 당연한 일이었다. 역사서를 썼던 사람들은 우리에게 이를 알려준다.

로마제국에서는 4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1) 제국을 지배했던 귀족이나 상류층

2) 사업가, 많은 토지 소유자, 의사, 교사 등

3) ‘자유인이라 불린 영세 농민, 기술자 등 이 부류가 가장 많았다.

4) 노예()

세번째 부류까지는 로마의 시민들이었다. 이들은 법에 따라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공정한 재판을 받기까지는 범죄인으로 처벌되지 않았다. 사도행전 22 24-30절에 바울에게 생긴 일을 읽어 보라. 그리고 로마 시민이기에 그 밖의 다른 여러 가지 특권들이 있었다.

하지만 네번째 부류, 곧 노예들은 가장 하층이었다. 그들은 시민으로 계수되지도 않았다. 일부 노예들은 수공하는 일들을 배웠다. 그들 중 많은 자들이 주인의 집에서 가사를 돌보는 조력자였다. 어떤 자들은 광산이나 들에서 일해야 했고, 건축일 등을 돕기도 했다. 그러나 무슨 일을 하든 그들은 노예였다. 로마법은 종은 권리가 없다고 했다. 누군가가 노예에게 잘못을 행할지라도 노예는 불평할 수 없었다. 그에게 잘못한 자를 처벌해 달라고 요구할 수가 없었다. 당시의 로마인들은 그의 종을 때리고, 손이나 발을 절단하기도 했다고 한다. 원하기만 하면 주인은 종에게 많은 고통을 줄 수도 있었고, 죽이기까지 할 수 있었다. 그것에 관해서는 아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쟁기질하는 황소를 죽이면 그 범죄로 인해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종을 죽이면 그것에 대해 질문조차 받지 않았다. 이는 노예는 재산 중에서도 가장 천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부자는 소유한 물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을 것이다. 주택 한 채, 전차 두 대, 말 여섯 마리, 황소 두 마리, 탁자 세 개, 의자 열 개, 침대 두 개, 노예 세 명.

이 모두는 그의 재산이다. 팔 수도 있고, 없앨 수도 있고, 좋을 대로 처리해도 되었다. 노예는 사람 취급조차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이들 슬픈 인생살이는 매우 혹독하였다. 그러므로 많은 노예들이 주인들에게서 도망치곤 했다. 하지만 잡히면 그들은 더욱 더 어렵게 되었다. 달군 쇠로 이마에 표를 받기도 했고, 전보다 두 배나 길고 힘든 일을 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짐승에게 던져저 찢겨 먹히기도 했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들은 벌을 받아야만 했다.

참으로 슬프지 않은가! 그들의 마음은 얼마나 쓰라렸을까! 나날들이 얼마나 암울했을까! 자유롭게 될 수도 없었고, 만족스레 여기는 일들은 할 수도 없고, 자유를 갈망했으나 얻을 수 없었고….

노예 제도가 허용되지 않는 나라에서 사는 우리에게 지금 이것이 아득하게만 보이는가? 오늘날에는 노예가 없는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던 당시의 유대인들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요한복음 8장에 있는 기사를 살펴보자.

여기서 주님은 당신이 어떤 분인지를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님 자신을 세상에 보내셨으며 또한 말씀하실 것을 가르치신다고 일렀다(28, 29).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믿었다. 31,32절에서는 그들이 그분의 가르침에 순종하면 참으로 그분의 제자가 될 것이라고 하셨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다. 그들 중 어떤 자들은 자유케 하는 가르침을 거부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녀이고 노예였던 적이 결코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유케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쭈었다. 이에 대해 주님은 매우 귀중한 말씀을 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34).

잠시 이 말씀에 대해 생각해 보자.

첫째로, 이 말씀은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를 포함한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는 감옥에 갇힐 중한 범죄자를 뜻하지 않는다. 온 인류가 여기에 포함됨은 로마서 3 23절 말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는 말씀에서 알 수 있다. 감옥에 간 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잠시 우리의 생활을 살펴보면 해서는 안될 어떤 일들을 하고 있음을 바로 인정할 것이다. 우리가 아는 일들이 불충스럽고 더러웠던 경우도 허다하다.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은 참이다. 우리 모두는 죄를 범하고 있다.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은 왜 우리가 범죄하는가를 보여준다.

우리가 죄의 종이기 때문이다. 종은 단지 그의 주인에게 복종할 뿐이다. 그는 주인의 손안에 있다. 주인이 명하는 대로 왕래해야 하며 이 일, 혹은 다른 일을 해야 한다.

죄의 가공할 능력은 많은 사람들을 주정뱅이로 만든다. 그들은 알코올의 종이다. 많은 사람들은 마약의 종들이다. 그들은 코를 꿰어자유로울 수 없다. 또 다른 자들은 음욕의 종이고 탐욕적이다. 그들은 정욕을 떨칠 수가 없다. 그들이 죄의 지배하에 있기에 이 모두가 사실이다. 이들은 반드시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종(노예)인 오네시모는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 모두가 처한 참된 상태를 의미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종들로서 우리는 자유케 될 필요가 있다. 자유를 원한다. 죄의 사슬로부터 풀려나기를 간절히 원한다. 그런데 누가 우리를 자유케 할 수 있을까? 감사하게도 한 분이 계신다. 참으로 주 예수께서 친히 요한복음 8 36절에서 하나님의 아들인 그가 우리를 자유케 하면 우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고 하셨다. 그분은 죄의 사슬로부터 죄인들을 구출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세상에 태어나시기 전, 천사는 그분이 사람들을 죄로부터 구원하실 분이므로 예수라 이름하라고 말하였다(마태복음 1 21). 당신은 그분이 당신의 죄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시길 원하는가?

 

2. 도망자

오네시모에 대하여 두번째로 주목할 일은 그가 주인으로부터 도망쳤다는 사실이다. 15절에 보면 그는 주인 빌레몬으로부터 떠났거나 도망하였다고 한다. 물론 그는 불행으로부터 도망친다고 생각했다. 자유를 찾을 거라고 생각했다. 혹시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할 수 있다는 생각했는지 하였는지 모른다. 주님으로부터 도망치려는 많은 다른 죄인들과 똑같이 말이다. 첫 조상 아담과 하와는 창세기 3 8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그로부터 도망치고 숨었다. 장남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이고, 여호와 앞을 떠났다( 4:16). 많은 세월이 지난 후 요나는 여호와께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 서바나로 가는 배를 탔다( 1:3). 누가복음 15장에서 주님은 잃은 아들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 젊은이는 먼 나라로 떠났다. 또한 할 수만 있으면 멀리 떠나려 했다. 이 모든 것들은 죄인의 본질적인 욕구를 그리고 있다.

오늘날 사단은 똑같은 방법으로 우리를 속이려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피해 숨으라고 말한다. 그러나 복과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갈 때에만 임한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거나 도저히 숨을 수가 없다. 다윗은 이것을 매우 잘 알았다. 시편 139 7절에서 내가 주를 떠나 어디로 가리이까?”라고 고백했다. 흑암에서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보실 수 있다.

도망친 종 오네시모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멀리 떠난 모든 죄인들의 그림이다. 에베소서 2 13절에서 보듯 구원받지 못한 백성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난 존재이다.

 

본질적으로도 실제적으로도 멀리,

하나님으로부터 까마득히 멀어진….

 

우리는 이것을 물리적인 거리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도덕적이며 영적인 거리이다. 로마서 5 10절에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들이다. 요한복음 15 18,23절에 보면, 인간은 본질상 하나님을 미워한다. 이러한 증오심의 정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가운데서 보여진다. 우리는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는 분을 미워했다. 그분이 말해야 했던 비탄의 심정을 들어보라.

무고히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내 머리털보다 많고…”( 69:4).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과 어찌나 다른지! 요한복음 3 16절을 보라. 그분의 마음은 우리를 위한 사랑과 긍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그를 향한 증오와 적대감이 넘친다. 우리 사이에는 멀고 먼 거리감이 너무나 크다! 그 큰 거리에 누가 다리를 놓을까? 바울은 골로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받지 못한 시절에 그들이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었다고 했다. 그들은 그들의 악한 행동과 생각으로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그들을 자신에게로 이끄셨다. 그는 그들을 당신의 친구로 삼으셨다( 1:21,2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자들이여, 하나님을 찬양하라.

 

가까이, 하나님께로 아주 가까이,

더할 나위 없이 더 가까이,

하나님의 아들의 위() 안에서

우리를 그에게 가까이 하셨기에.” (C. Paget)

 

3. 비행자(범죄자)

셋째로, 오네시모는 비행의 범죄자였다. 법에 따르면 그는 중범의 죄인이었다. 18절은 그가 주인인 빌레몬에게 잘못했다고 말한다.

어느 날 아침, 오네시모는 일하러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날, 그 다음날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해야 할 일들을 하지 않았다. 이것이 몇 주, 몇 개월, 아마도 몇 년이 계속되었다. 그는 허락 없이 일터를 떠났으며, 이는 종에게 중대한 범죄였다.

그러나 그는 또한, 분명히 빌레몬으로부터 돈을 훔쳤다. 이것은 그의 범죄를 더욱 더 중하게 한다. 잘못 위에 잘못을 쌓았고, 범죄 위에 범죄를 쌓았다. 그의 악행은 로마법 앞에서 그를 죄인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에 대한 또 다른 그림이다.

우리는 매번 하나님의 법을 깨뜨리고 있다. 우리는 해서는 안 될 일들을 행함으로 죄를 범하였다. 또한 해야 할 일들을 행하지 않음으로 죄를 범한다. 다른 사람에게 속한 어떤 물건을 훔치면 나는 유죄이다. 그리고 갚아야 할 빚을 갚지 못한다면 나는 유죄이다. 출애굽기 20장에 있는 십계명을 읽어 보라. 당신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율법에 불순종함으로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알 것이다. 로마서 3장에서 하나님 앞에서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모두 하나님을 떠나 범죄하고 있다고 한다. 각각 죄를 범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악행을 저지른다( 3:11,12,23).

그렇지만 인류가 범한 절도(竊盜), 거짓말, 사기보다 더욱 큰 범죄가 있다.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더 무서운 범죄가 있다. 인류가 지금까지 범한 가장 큰 범행은 무엇일까? 이는 곧 하나님의 아들을 거절하고, 죽인 것이다. 주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선한 일을 두루 행하셨다. 사람들을 축복하시고 병을 고치셨다. 그는 하나님에 관해서, 그리고 어떻게 하늘나라에 가는지에 대해서 가르치셨다. 많은 기적과 이적들을 행하심으로 친히 하나님의 아들임을 드러내셨다. 모든 이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셨다. 그러나 인생은 그를 거절했다. 그를 죽였고 십자가에 못 박았다( 2:23). , 이는 얼마나 끔찍한 범죄인가!

 

사랑은 그렇게도 강한가.

범죄는 그렇게도 악한가.

예수께서 오랫동안 고통 당하실 때

갈보리에서.

 

4. 빚진 자

네번째로 오네시모에 대해 주목할 점은 그가 빚진 자였다는 것이다. 바울은 18절에서 네게 진 것이 있거든이라고 언급한다. “있거든이라는 단어는 의심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얼마를 빚졌다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오네시모는 작업 시간을 사기하였고 나아가 돈도 훔쳤다. 그래서 오네시모는 빚진 자이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선 죄인들의 또 다른 측면이다. 죄는 마치 빚과 같다. 우리가 죄를 범할수록 하나님께 대한 빚은 더욱 더 늘어난다. 매일 죄를 짓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날 동안 더욱 더 자라난다. 슬프게도 우리는 이 빚을 갚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사실에 대해 몇 가지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그것들은 빚을 그릴뿐만 아니라 파산한죄인들을 그리고 있다. 파산자는 빚이 많아서 빚을 갚을 돈이 없는 사람이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18 23,24절에서 주 예수께서는 왕에게 일만 달란트를 빚진 한 사람에 대해 말씀하신다. 한 달란트의 가치는 매우 크다. 그것은 6페니’, 또는 6천 개의 작은 은화에 해당한다. 이 작은 은전 하나가 그 당시 하루 품삯이었다( 20:10).

오늘날 우리 돈으로 환산한다면 가치가 너무 커져서 비교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하루 품삯으로서의 작은 동전을 생각해 보자. 그래서 6천 일()간의 품삯을 빚졌다고 생각하자. 그러나 이 사람은 일만 배나 더 많은 빚을 졌다! 6천만 일()의 품삯을 빚진 것이다. 그렇게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는 하루도 쉬지 않고 공휴일도 없이 16 4천년을 더 일해야 한다. 그렇게 하고도 단지 원금에 해당하는 것밖에 갚을 수 없다. 이는 어떤 이자도 포함치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빚을 탕감하기 위해 오래 일하면 할수록 빚은 더욱 더 늘어날 것이다!

물론 비유 가운데 있는 그 사람은 그 많은 돈을 결코 지불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이라도 그 큰 죄의 빚을 하나님께 지불할 수 없다. 로마서 6 23절에 보면, 한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은 죽음이다. 사람이 그의 일생 동안 한 번의 죄를 범했을지라도, 형벌은 죽음이다. 우리 모두는 죄를 수없이 짓는다. 일백 번의 죄는 일백 번 죽음을 요구한다. 하나님께 대한 빚을 누가 갚을 수 있을까? 우리 중의 아무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사단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라고 말하기에 바쁘다. 그러면 그들은 괜찮다는 것이다. “잘못된 행위들을 뒤집기 위해 선한 일들을 많이 하라고 말한다. 그분은 우리가 하나님을 큰 천칭 저울을 사용하시는 분으로 생각하게 한다. 그는 우리의 선을 한 쪽에 악을 다른 쪽에 놓는다. 선이 악보다 무게가 더 나가면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실 것이라고 현혹한다. 그러나 다니엘서 5 27절을 보라. 당신은 이미 저울에 달려서 너무 가볍다고 판정되지 않았는가! 많은 사람들은 교회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많이 내면 죄값을 지불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혹은 자주 교회 예배에 참석하거나 선한 생활, 청결한 생활로써 지불할 수 있으리라고 여긴다. 그러나 이사야 64 6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주목하라. “우리의 가장 선한 행위는 오래되어 낡아 떨어진 더러운 옷 같다.”

예를 하나 들어보면 이해가 잘 될 것이다. 우리가 일만 달란트 빚졌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오늘 그 빚이 청산되어야 한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가 은행 담당자에게 가서 오늘 빚을 갚으러 왔다고 말하면 그는 얼마나 우리를 반길까! 우리는 들고 간 커다란 가방을 담당자의 책상 위에서 연다. 내용물은 이렇다. 잡다한 쓰레기, 누더기 옷가지들, 더럽고 악취 나는 찌든 누더기 옷들! 아무도 원치 않는 썩고 다 떨어진 옷들! 담당자는 기뻐할까? 물론 아니다. 그는 대단한 모욕감을 느낄 것이다.

, 올바른 마음을 가진 자는 누구도 은행 담당자에게 그러한 일을 할 생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소위 그들의 선행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감히 생각하고 있다. 아니, 안 된다! 우리는 이 귀중한 가르침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파산한 죄인들이요, 그에게 진 빚을 결코 갚을 수 없다. 그럼 우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성경의 가르침에 귀 기울여 보라. 어떤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빚을 갚아 주셨다. 우리의 찬양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때 그가 우리의 무서운 빚을 충분히 갚으셨다. 우리는 그의 보배로운 피를 믿음으로 자신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노래할 수 있다.

예수는 모두 갚으셨네.

그에게 진 모든 빚을,

죄는 새빨간 얼룩을 남겼지만

그가 눈같이 희게 씻었네.”

(Elvina M. Hall)

 

5. 무익한

도망친 종 오네시모는 주인에게 잘못을 행하였다. 갚을 수 없는 큰 빚을 진 것이다. 이러한 환경 가운데서 그는 그의 이름에 걸맞게 살 수가 없었다. 그의 이름 오네시모는 유용한또는 유익한을 뜻한다. 바울은 11절에서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무익하고 무가치하게 되었다고 쓴다. 그는 해야 할 일들을 하지 않았다. 여기서 하나님 보시기에 죄인들로서의 우리의 또 다른 모습(그림)을 보게 된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우리 주변의 세계를 왜 만드셨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왜 하나님께서 당신을 지으셨을까? 성경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에 따라 그분의 즐거움을 위하여 만물을 지으셨다고 한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고 심히 좋았다고 하셨다. 분명 하나님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듣고 즐거워하시며, 그 우아한 날개짓을 기뻐하신다. 만드신 모든 아름다운 꽃들로 기뻐하신다.

나는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높은 산꼭대기에 오른 적이 있었다. 여름철에 온 들과 산기슭의 목초지, 수백만의 꽃들이 활짝 피어 있는 것을 보았다. 인간의 눈으로서는 본 적이 없는 많고 많은 것들이 있었다. 그것들은 왜 거기 있을까? 낭비에 불과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아름다움과 향기로움을 즐기시려고 만물을 두셨다. 만물은 하나님께 기쁨을 준다.

그분은 아름다움을 즐기시므로 사방에 온갖 빛깔을 주셨다. 수많은 색으로 혼합된 찬란한 석양을 생각해 보라. 화려한 무지개를 기억해 보라. 창세기 9 1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친히 만물의 모든 것을 보신다고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어떤 다른 존재를 기뻐하셨다. 잠언 8 31, 창세기 2장과 3장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와 함께 동산을 거니시곤 하는 것을 본다. 그분은 그들과 동행하길 기뻐하셨다. 아마도 매일 그들을 만나 함께 기분 좋은 산책을 하셨으리라. 하루의 일과를 마친 서늘한 저녁 때 쯤, 함께 걷고 이야기하셨을 것이다. , 달콤한 친교는 얼마나 행복했을지! 교제는 어떠했을지! 그렇다. 순전한 에덴 동산의 아름다움 속에서 창조자는 그분의 피조물들을 기뻐하셨다. 그들을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그러나 어느 비참한 날 모든 것이 변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께 범죄한 것을 본다. 그들은 거룩한 말씀에 불순종한 것이다. 창세기 2 15,16절과 3 6,7절에 보면 금지된 과실을 먹었던 것이다. 그들은 눈이 열려서 벌거벗은 것을 알았다. 그래서 무화과 나뭇잎으로 만든 앞치마로 자신들을 가리려 했다. 얼마 있지 않아 여호와 하나님께서 언제나 하는 산책을 위해 동산에 오셨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도망쳐 숨었다. ? 바로 죄의 가책 때문이었다. 이제 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을 알았다. 불순종으로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님께 무익한 자들이 되었다. 그분과 대면하여 기뻐할 수도 없었고, 그분의 마음에 기쁨을 드릴 수도 없었다. 그 대신에 그들은 그분께 커다란 슬픔을 가져다 주었다. 창세기 3 23절에 보면,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사랑스런 동산에서 내어 보낼 때 참으로 고통스러워 하셨다.

모든 아담과 하와의 자녀들은 낙원인 동산의 밖에서 태어났다. 이는 우리 모두가 죄인으로 났으며,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떠나 그분께 무익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로마서 5장은 죄가 아담으로부터 세상에 왔고 이 죄가 사망을 가져왔다고 말한다. 그 결과 우리 모두는 죄를 지었으므로, 우리를 포함하여 온 인류에게 사망이 이르렀다.

그러므로 무익한 자, 오네시모는 우리 모두의 그림이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즐거움을 위하여 지어졌다.

하지만 우리는 자기 즐거움을 위해 산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들이었도다.

하지만 우리는 자기에게 영광을 돌린다.

우리는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자기 중심으로 살고 있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우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10:27).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잊고 하나님 아닌 다른 것으로 마음과 뜻을 채운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을 기쁘게 한다.

우리는 유익한 자여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전혀 무익하게 되었다( 3:12).

 

6. 심판 아래서

오네시모에 관한 이 공부를 다 마치기 전에, 한 가지 더 주목할 것이 있다. 그의 범죄로 인해 그가 심판 아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그가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1장에서 오네시모가 범죄 때문에 중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을 보았다. 그는 빌레몬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죽음까지도 당해야 할 것이다. 그 당시에는 종(노예)에게는 권리가 없었다는 것을 기억하라. 역사가들은 오네시모가 지은 죄보다 작은 범죄로 노예들이 고문당하거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기록한다. 이 사실은 우리가 구원받아야만 하는 절실한 필요성을 다시 한 번 보여준다.

죄의 확실한 결과는 사망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3:23).

죄의 형벌은 분명 사망이다( 6:23). 이는 낮이 온 다음에 밤이 오는 것과 같이 확실하다. 사람의 머리가 잘리면 그는 반드시 죽는다.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 하나님께 죄를 지었으므로 반드시 죽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더욱 좋지 않은 일이 있으니 어찌하랴! 죄를 따라 죽음이 반드시 오듯이 심판이 죄를 따라 반드시 올 것이다( 9:27). 하나님은 거룩하시므로 죄를 반드시 심판하신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20 11-15절에 보면 무서운 심판에 대해 읽을 수 있다. 거기서 그들의 구주로서의 그리스도 밖에서 죽은 모든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고 가르친다. 큰 자나 작은 자, 노소, 빈부를 막론하고 모두가 자기들의 행한 대로 심판을 받을 것이다. 모든 불신자들은 불못에 던져질 것이다. 아무도 도망할 수 없다. 후회하기에는 너무 늦다. 얼마나 끔찍한가!

친애하는 독자여, 이것이 당신의 미래에 대한 그림은 아닌가? 당신의 죄가 하나님에 의해 용서받은 적이 없다면 지금 당장 구원을 주시는 그리스도께로 돌이키라! 다른 날로 미루지 말라. 죄의 형벌은 분명히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다( 6:23). 믿음으로 당신은 지금 당장 이 은혜의 선물을 받을 수 있다. 하나님께 당신의 죄 많음을 고백하라. 당신을 위해 돌아가신 그분의 아들을 믿으라. 당신의 마음 가운데 그분을 당신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 10:9).

 

그림의 어두운 면이 우리 앞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구원하심이 얼마나 우리에게 필요한지를 강조하고자 하신다. 우리는 잃어진존재라는 것을 깨닫기 전에는 구원받을 수 없다. 주 예수께서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9:12). 오네시모는 죄인들로서의 우리의 처지를 그리고 있다. 우리가 이것을 인정하면 우리는 밝은 면을 맞을 준비가 된 것이다. 하나님께 감사하라. 밝은 측면이 있으니까! 그러면 기쁘게 다음 장으로 넘어가자. <다음 호에 계속> 

 

(1999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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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