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Recent Post

theWord Bible Software

Category

마크 스위터넘

요한복음 18:38에서진리가 무엇이냐?”라는 본디오 빌라도의 답이 없는 질문은 수세기에 걸쳐 도덕적 공황의 외침으로 메아리치고, 집요하고 끊임없는 딜레마의 고비에서 벗어나려는 필사적인 시도다. 유대 지방의 로마 관리는 나사렛 예수님에 대한 심판의 자리에 앉았다. 빌라도의 숙련된 법의학적인 시선에서, 그분에 대한 사건은 분명히 결함이 있었다. 그의 고소인들의 끊임없는 변화는 이것이 사법적 암살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그의 아내의 말이었으며, 빌라도의 귀에 여전히 울려 퍼지는 것은 그 의로운 사람”( 27:19, KJV)에게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그에게 경고하는 것이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그의 앞에 서서 비난에 직면하면서도 침묵하며 카이사르를 능가하는 권위를 주장하는 사람의 존엄성이었다.

빌라도는 그의 아내의 지시에 따라 죄수를 석방하고 지금까지 그의 재판기록에 나타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을 기각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국의 임무의 가혹한 현실정책과 같이 무시할 수 없는 다른 고려사항이 있었으며 카이사르의 총애의 상실로 인해 전도 유망한 경력이 파멸되거나 될 수 있는 것, 또는 설상가상으로 진리와 정의가 값비싼 사치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빌라도가 정치적 편의를 통해 유죄 판결을 요구한 것은 처음이 아니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으며 이 죄수는 달랐기 때문이다. 그 결정은 그냥 물러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오래된 숙적 헤롯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시도조차도 실패했다. 그래서 빌라도는 역사의 중심에 서서 선택하기로 했다.

그는 그 일을 하기 전에 진리의 본질에 대해 토론하기 위한 피난처를 찾았다. 수세기 동안, 동일한 피난처가 수많은 사람들이 부인하거나 회피할 수 없는 사실에 직면하며 찾아왔다. 특히 지난 50년 동안 빌라도의 질문은 서구 세계의 슬로건 중 하나가 되었다.

서구 사회가 진리의 개념을 보았던 방식은 수세기에 걸쳐 극적으로 변했다. 중세 초기부터 진리는 밝혀진 것으로 이해되었다. 사람들은 언제나 계시에 대한 올바른 장소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너무나 자주 그들은 교황과 종교회의들의 명령에서 그것을 찾았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성경의 계시는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는 하나님이나 현명하고 유력한 사람들의 권위에서 나온 것이라는 일반적인 동의가 있었다.

16세기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도래하면서 지식에 대한 새로운 사고 방식이 생겨났다. 여러 면에서 이것은 건강한 것이었으며 교회의 권위가 도전 받기 시작했고, 지혜를 심문하는 것이 받아들여지고, 성경이 새롭게 연구되었다. 그러나 이 충동은 건강했지만 궁극적으로 진리를 계시의 결과가 아니라 추론의 열매로 본 합리주의로 발전했다.

계몽주의가 시작되면서 이성의 힘에 대한 사람들의 확신이 커졌다. 이성은 모든 선한 자연 세계의 비밀을 해독할 수 있다. 그러나 합리주의는 또한 종교 영역에서 자리잡았고, 성경의 가르침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 내고 어떻게 하면 그분을 기쁘게 할 수 있는지를 추론할 수 있는 인간 마음의 능력에 대한 과도한 확신에 의해 손상되었다. 계몽주의의 합리주의적 유산은 20세기에 이어 계속된다 - 때로는 증대하고 때로는 약해지지만 진리에 대한 인간의 탐구를 근본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20세기 중반에 바뀌었으며 진지한 문화적 변화가 서양에서 일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계몽주의는 과학적 발견과 사회적 진보와 함께 근대에 이성을 적용하고 진리를 확인하고 특정한 세계에 관한 결론을 형성하는 과학적 방법을 적용하는 인류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남겼다. 이러한 결론은 종종 틀렸고, 이 시기에 나타난 진리는 종종 사실이 아니었다. 사탄의 선택하는 전술은 사람들에게 거짓 확신을 주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몇 년 동안, 그의 전술은 바뀌었다. 확실성은 더 이상 인기가 없었으며, 절대적으로 매력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진리는 더 이상 어떤 것도 드러난 것이 아니었다. 또한 어떤 것도 추론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진리는 구식이었고 시대에 뒤졌으며 그것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더더구나 발견되기는커녕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알려진 이 개념은 프랑스 대학의 문화 이론가들 사이에서 나왔다. 그들의 영향력은 서양의 교육과 사회에 급속히 퍼져 나갔고, 데리다, 보드리야드 또는 거대 담론에 대한 회의론에 대해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사람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근본적인 모순에 시달리지 않고 어떤 절대적인 진리도 없다는 절대 진리에 흡수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문학, 예술, 건축 그리고 사실상 모든 삶의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 - 읽을 수 없는 책, 이해할 수 없는 그림, 빛나는 건물 등의 결과는 특히 유해하지는 않지만 사회에 미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은 일반적으로 훨씬 더 부식성이 있다. 성경이 이해되는 방식에 대한 그것의 의미는 독성과 다름없다. 포스트모던 세상에서는 성경의 객관적인 의미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포기해야 한다. 그 주관적인 영향, 즉 내게 의미하는 것만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 주관성은 그것의 동일함에 대한 성경 해석을 넘어서게 된다. 성경은 객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한다: 특정한 장소와 시간에 내게 말하는 그 부분은 나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당신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은 아주 다른 것일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20세기의 모더니즘에 대항하여 1970년대에 일어난 예술 운동으로 고전적·역사적 양식이나 수법을 받아들이고자 함-네이버 사전

성경에 대한 이러한 태도의 영향은 파괴적이며, 우리는 그것에 대해 받아들이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이러한 개념은 더 넓은 세상에서 순환하거나 복음전도에 나타나는 혼란과 같은 종류의 것들처럼 들릴 수 있다. 자기 만족을 위한 여지는 없다. 포스트모던적 사고의 만연함은 그것의 영향이 우리의 모임들이나 우리 자신의 혼에서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확실성에 좀먹는 이 도전에 직면하여 우리는 성경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도움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 할지도 모른다. 신약 성경의 기록은 21세기의 문화적 딜레마와 관련하여 무언가를 가질 수 있는가? 그 대답은 물론 그렇다이다.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많은 성경이 있지만, 이 주제들은 목회 서신들에서 보다 더 나타나 있다.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에서 사도 바울은 새로운 세대에게 증거의 빛을 전한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반복적으로 우리의 관심을 성경에 끌어당긴다. 70여 차례에 걸쳐 그는 "전도, 증거, 신비, 건전한 말씀의 형식, 선한 것에 전념했던 말씀, 교리, 믿음, 진리, 복음과 또 내게 들은 것들(KJV) 같은 용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말한다. 이 모든 표현들은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것이지만, 목회 서신의 짧은 한계에서 반복되는 표현은 놀랍다. 진리는 분명히 이 서신들의 주요 관심사이다. 사용된 용어의 종류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객관적인 것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진리, 믿음, 복음. 그것들은 맡겨진 것들을 묘사한다: 맡김, 모본, 선한 것. 그리고 그것들은 전달되는 것을 설명한다: 교리(가르침), 전도, 증거.

진리가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조차 조롱받는 세상에서 목회서신의 가르침은 모든 신자의 영적 안녕을 위해 필수적이다. 다음 기사들(DV)에서 우리는 이들 소중한 서신들이 진리의 하나님과 하나님의 진리에 관해 말하는 방식을 살펴볼 것이다.

http://truthandtidings.com/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