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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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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프랑스 문학 평론가인 롤랑 바르트작가의 죽음 이라는 에세이를 출간했다. 이 에세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기본적 본문 중 하나가 되었다. 바르트는 일단 본문이 쓰여지면 작가의 통제를 벗어나고 작가의 말의 의미를 묻는 것으로 텍스트의 의미를 고치려고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다. 사실, 어떤 본문이 단 하나의정확한해석을 한다는 생각 자체는 틀린 것이라고 바르트는 주장했다. 각 독자는 자신의 방식대로 텍스트를 이해하며 어떤 이해도 타인의 이해보다 더 큰 타당성을 주장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자신의 에세이에서 바르트는 문학 비평에 대한 이 견해를 함축하여 집중한다. 그것은 오직 가면이 벗겨지는 마지막에 접근해야만 바르트의 진짜 표적을 발견한다; “따라서 문학은 ... 본문에 지정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 우리가 반 신학적이고 적절하게 개혁적이라 부를 수 있는 활동을 해방시켜 구속(拘束)의 의미하는 것에 거부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느 정도 바르트의 나머지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의 논리는 여기서 반박할 수 없다. 진리와 같은 것이 없다면, 신성한 저자는 없다 - 하나님은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이것에 대한 결과로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떤 객관적인 진리가 있을 수 없다. 이 후자의 요점은 강조할 가치가 있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이지만 여전히 도덕적 기준의 존재, 옳고 그름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직면하는 어려움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도덕적 질서의 고정된 특징인 하나님을 저버린다면 더 이상 옳고 그름을 정의할 수 있는 일관된 수단이 없다. 당신은 상대주의 또는 하나님 모두를 가질 수 없다. 하나님의 존재와 진리의 존재는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들은 동전의 양면이다.

하나님과 진리 사이의 이 관계는 디모데전서 2:1-6절에 매우 분명하게 설명되어 있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권고한다. “이것은 하나님 곧 우리 구원자의 눈앞에서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한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한 중재자가 계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라. 그분께서 정하신 때에 증언을 받기 위해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자신을 주셨느니라”(KJV). 우리는 마땅히 모든 사람들이 구원 받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범위와 규모에 대한 분명한 언급에 대해 이 구절들을 좋아한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 생활의 종종 제한된 한계에 도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에 대해 논증하는 바울의 영향력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이 구절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또한 그분의 뜻은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아는데 이르러야하는 것이다. 진리 또는 진리들에 관해 또는 심지어 진리에 관한 지식에도 불구하고 진리에 관해 명확하고 객관적이며 독특한 것이다.

진리는 하나님과 함께 시작되었기 때문에 진리이다. 인류에게는 무한한 다양성이 있지만 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데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기 때문이며 한 사람도 그분의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은 한 분이기 때문에 진리의 유일한 원천이고 오직 하나의 진리가 있다. 더욱이 중재자도 한 분뿐이다. 사도의 생각과는 달리 하나님에 대한 여러 방향의 개념이 있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그분 자신을 포장해주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여기에 없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계시며, 그분은 오직 한 중재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님만을 통해서만 알려져 있다. 그리고 오직 한 하나님과 오직 한 중재자가 있기 때문에 오직 하나의 진리만이 있다. 이것은 바울이 이 서신에서 언급하고 있는 여러마귀들의 교리들”(4:1)과 대조적이다. 참된 교리는 항상 단수로 언급된다: 많은 마귀들, 많은 교리들, 한 분 하나님, 한 중재자, 한 진리.

우리는 이것에 대해 명확히 할 수 있다. 종교적 관용에 대한 변증론자들은 종종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표현에서 그들의 호소를 근거로 삼는다. 특히 기독교인과 무슬림이 같은 신을 숭배한다고 종종 주장된다. 이것은 거짓이며 사악한 거짓말이다. 성경의 하나님은 이슬람, 힌두교 또는 불교의 신이 아니며, 그분은 만유, 우주 또는 무엇이든 자신들의 죄로 인해 눈을 멀게 된 사람들이 신들로 찬양하고 숭배하는 다른 개념들이 아니다. 그분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 17:3, KJV)이며, 그리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아들의 위격 안에서 그분을 잘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진리의 근원이며 그리스도는 진리를 드러내신 분이다.

바르트는 옳았다. 진리의 존재는 하나님의 존재에 달려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성품에 달려있다. 따라서 디도서 1장에서 그분은 거짓말 할 수 없는 하나님으로서 우리에게 제시된다. “거짓말 할 수 없다라는 말로 번역된 단어는 흥미롭다. 그것은 오직 신약 성경 여기에서만 나타나며 영어로 포착하기 힘든 형용사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거짓말 하지 않는 것처럼이 아니다, 그러나 거짓말 할 수 없는하나님을 나타낸다. 이것에서 그분은 크레테 사회의 도덕적 규범에 대해 대조를 이루며 크레테인들에 대해 바울은 항상 거짓말쟁이”(12, KJV) 임을 우리에게 기억나게 한다. 더욱이, 그는 특히 크레테인들에 의해 숭배받았던 제우스(적어도 크레테에 묻혀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와는 대조적으로 그의 부적절한 전설에는 엄청난 사기와 부정직한 행위가 포함되었다. 바울은 계시의 역사에 대한 네 구절, 한 문장의 개요를 우리에게 제시하면서 디도에게 이것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도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오히려 바울의 사도직(믿음과 진리)에 근거한 계시와 그것이 부여한 계시는 거짓말 할 수 없는하나님의 기원을 가졌으며 그분의 영원한 약속은 지금 전도에서 나타난 우리의 구원자 하나님에 의해 사도로 위임되었다.

바르트와 그의 동료 이론가들은 그들의 견해들이 해방을 가져와 독재적인 신()의 생각으로부터 세상을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이러한 견해들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것은 그것들이 우리를 속박으로 인도했기 때문이다. 모든 주관적 지식이 없는 의견은 현재 우리의 주의를 필요로 하고 있으며 권위 있는 사실의 지위를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현대 사회의 혼란스러운 불협화음에 참여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상대성이론의 수렁에서 진리 없는 세상의 암울하고 불분명함을 몰아내기 위한 밝은 빛의 등대가 있기 때문이다. “거짓말 할 수 없는하나님은 그분의 아들 안에서 말씀하셨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구원 받아 진리를 알게 되는 것은 여전히 ​​그분의 뜻이다. 바르트는 죽었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 계신다그분의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분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72:19, KJ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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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