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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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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

사도행전 17장은 그 책에서 가장 생생하게 극적인 대면이 될 수 있는 것을 기록하는데, 그것은 그 많은 관심을 끄는 만남들을 가지고 있다. 바울은 아테네의 거리에서의 전도에서 벗어나 세계에서 가장 자의식이 강한 지적인 사회 중 하나인 아레오바고에 서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문화를 형성하고 계속해서 형성해 온 수많은 사상들의 원천이었다. 그것은 아테네 철학의 강력한 결사대에 대항하는 아주 작은 규모의 순회하는 설교자로서 동등하지 않은 경쟁으로 보였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만남이 펼쳐질 때 지배한 사람은 사도였다. 아테네인들은 새로움을 추구하는 어리석은 구도자로서 불명확한 신들을 숭배하는 무지한 자로 자리잡았고, 그들의 종교는 세심했지만 그들이 그렇게도 헛되이 더듬은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지식은 전혀 없었다.

의심의 여지없이 아테네인들은 그들의 열정적인 지성주의를 뒷받침하는 무지에 대한 바울의 솔직한 묘사에 모욕당했다. 세상이 여전히 아테네에서 그렇게 두드러졌던 동일한 특징들로 표시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우리 시대의 지적 안일에 대한 모욕이다. 새로운 것에 대한 열렬한 추종, “새로운 어떤 것을 말하고 듣는 것”( 17:21, KJV )은 여전히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특징이다. 그리스인들처럼 인류는 여전히 하나님을 더듬어 찾고 있으며 무지한 자신의 모습으로 그분을 만들고 있다. 우리의 모든 지적 노력과 업적은 다음과 같은 위대한 사실에 의해 겸손해진다. “세상이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으므로”(고전 1:21,KJV). 자연적 계시로 하나님에 대해 알려진 것조차 이해하지 못하며( 1:20-21), 인류의 노력은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결코 하나님이 누구인지에 대한 어떤 구체적인 진실도 파악할 수 없다. 신성한 계시가 없이 우리는 경쟁하는 생각과 상충되는 철학의 안개 속에서 방황한다. 이 혼란 속에는 아레오바고 주변에 그토록 강렬하게 반향했던 것에 동일한 진리가 들어온다 -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리스 신전의 비루하고 심술궂은 신들과는 대조적으로, 바울은 그의 청중들에게 범위가 보편적이고 주권이 논쟁의 여지가 없는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그들에게 창조하시는 하나님과 부활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두 가지 근본적인 진리 사이에는 그에 못지 않은 주목할만한 놀라움의 세 단계가 놓여 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명령하시는 하나님이시며 그 말씀이 인류의 귀에 이르렀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어야 했던 것은 우리로 하여금 경이로움과 예배를 드리게 하는 진리다. 그것은 신성한 계시의 경이로움에 공감하는 목회 서신을 지배하는 진리다. 이 강조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서신을 표시하지만, 우리는 세 가지 경우를 고려할 것이다: 디모데전서 3:16, 디모데후서 1:8-12 및 디도서 1:1-3에서 바울이 fanerovw(파네로오)(“나타나시고로 번역됨). 이어지는 기사에서 주님의 뜻으로 이 구절을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지만 그렇게 하기 전에 몇 가지 일반적인 주제를 고려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우리는 각 구절에 시간 요소가 있음을 인식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디모데후서와 디도서에서 이것은 명백하다. 이들 둘 모두 신성한 계시의 기원을 세상이 시작되기 전”(문자 그대로 영원한 때 이전”, NET), 또한 둘 다 현재 경륜 시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디모데후서의 지금과 디도서의 정하신 때는 둘 다 하나님의 계시의 과정이 제 시간에 전개되고 있음을 상기시켜준다. 시간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덜 분명하지만 디모데전서에도 역시 존재한다. 그곳에서 바울은 경건의 신비에 대해 이야기한다. 신약에서신비라는 단어는 항상 초기 경륜 시대에 숨겨져 있었지만 지금은 드러나게 된 진리를 가리킨다. 이 각각의 구절들은 진리가 영원하고 변하지 않음을 상기시켜준다. 하나님은 그분이 나아가면서 그것을 이루는것이 아니다. 신성한 계시의 내용은 영원히 결정되고 있다. 그것들은 또한 우리에게 과거 경륜 시대에 부분적이고 진보적인 신성한 진리의 계시가 최종성과 충만함에 도달했을 때 현재 경륜 시대의 독특함을 상기시킨다. 바울은 신성한 의사 소통의 극적인 변화를 나타내는 지금에 대해 아테네 사람들에게 말했다. 디모데와 디도에게 쓴 글에서 그는 같은 것을 강조했다.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의 빛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는 얼마나 감사해야 할 것인가.

세 구절은 또 다른 공통의 강조점을 공유하고 있다. 그것들은 모두 진리가 믿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디모데전서에서 우리가 고백하는 위대한”(JND) “경건의 신비를 제시한다. “고백하다또는 논쟁의 여지 없이로 번역된 단어는 같은 말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진리는 만장일치로 증명되었다. 다른 구절에서도 비슷한 표현을 발견한다. 디모데후서에서 바울은 자신을 이방인의 교사라고 묘사한다. 그는 디도에게 편지를 쓰면서, 신성한 계시의 선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그의 사도직은 하나님의 선택하신 믿음”(1:1, KJV) 에 따른 것임을 강조한다. 이 구절에서 믿음의 의미는 논쟁의 주제이다.

앞으로 살펴 보겠지만, 진리에 대한 주관적인 반응이라기보다는 계시된 내용인 믿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데 강한 근거가 있다. 어쨌든 우리가 믿음을 주관적으로 이해하든 객관적으로 이해하든, 하나님의 계시의 진리를 믿는 하나님의 택하신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것의 의미는 분명하다. 목회서신의 진리는 절대적이지만 결코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바울이 진리에 대해 글을 쓸 때 그는 하나님이 계시하시고 사람이 받아들이고 믿은 메시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진리는 믿기 때문에 진리가 아니다. 기독교인들이 모여서 그들의 진리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진리이기 때문에 믿게 된다. 그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인격을 선포하고, 상상을 초월하는 값을 치르고 타락한 사람들을 구원하려는 그분의 위대한 계획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서 공유되는 세 번째 기능이 있다. 각각에서 신성한 계시는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선포된다. 우리의 주의를 집중시키는 각 구절은 성육신에 대한 디모데전서 3장까지 설명을 나타낸다. 이것은 전체적으로 신약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가르침은 이 경륜 시대에 신성한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수단이다. 이것은 많은 시사점을 가지고 있는데,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진리가 말로 전달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대언자들은 주의 말씀”(구약에서 250번 이상 나오는 구절)을 받아 선포하였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말씀이시다( 1:​​1, KJV).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말씀에 있다. 이 경륜 시대의 지금에서 하나님께서 신성한 진리를 전달하신다는 것은 전파된 말씀에 있다. 우리는 위험을 무릅쓰고 이것을 무시한다. 심리학자와 학자들은 비언어적이거나 시각적인 의사소통의 효율성에 대해 우리에게 조언을 제공할 수 있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 뇌의 복잡한 회로를 연결하신 하나님과 우리의 지성을 형성하고 구체화 하신 하나님이 그분의 신성한 지혜, 전도를 선택하셨다 공적 말로 나타낸 그분의 진리를 선포하는 수단으로서의 선택된 전도로.

물론 이 구절들 사이에는 차이점뿐만 아니라 유사점이 있다, 그리고 다음 몇 개의 기사(DV)에서 더 자세히 각 서신에서 계시가 제시되는 방식, 디모데전서에서 인성의 계시, 디도서의 약속, 디모데후서의 목적을 살펴볼 것이다.

http://truthandtidings.com/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