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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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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 시리즈의 기본 전제 중 하나인 진리의 주제가 목회 서신의 중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의문의 여지가 조금도 없으며 진리의 표현은 이 서신의 페이지를 가득 채운다. 그러나 진리가 이 서신의 유일한 초점만은 아니다. 그것들은 또한 교회 생활과 질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 페이지들은 장로, 집사 및 교사를 위한 지침으로 가득 차 있다. 실제로 우리의 성경에 목회 서신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현재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보다 더 제한된 교회 질서에 대한 그림을 갖게 될 것이다.

이 두 가지 가르침의 영역이 합쳐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진리와 증거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상호 의존적이다. 진리가 없다면 증거 할 것이 결코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증거 없이는 진리를 알 수 없다.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이 서신들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놀라운 진리에 반향을 불러 일으키고, 그것들은 지역모임인 하나님의 교회에 긴급한 주의사항으로 메아리치고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선택하신 진리가 어두운 세상에서 보존되고 전파되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도 목회 서신 어디에도 이 관계가 디모데전서 3:15에서처럼 분명하게 언급되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서 지역 교회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에 대한 훌륭한 진술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그러나 내가 오랫동안 지체하면 네가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네가 알게 하려 하노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구절의 마지막 조항은 지역교회를 진리와 밀접하게 연결시킨다. 그것의 주요 목적은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되는 것이다진리를 지켜 보고 있는 세상에서 보존하고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엄청나고 필수적인 사실이다. 만일 우리가 모임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도록 계획하신 것인지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교회 진리의 성경적 패턴에서 벗어나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이해하더라도 필연적으로 이 기둥에 놓여있는 진리가 무엇인지 묻게 된다. 바울은 모든 진리의 개요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성경 전체를 취하게 될 진리의 위대한 본질적 윤곽을 우리에게 제공하면서 그 질문을 예상하고 대답한다 그리스도의 인성과 죽음에 명시된 근본적인 진리는 그리스도인들의 마음뿐만 아니라 공적 신앙고백, 끊임없는 찬양, 매일의 실행을 위한 모임에 있다”(윌리엄 켈리). 16절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여러 가지 중요한 원칙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구절은 논쟁없이긍정의 어조로 시작한다. 여기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으며 사도는 논의될 명제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 신성한 진리의 계시는 만장일치의 동의를 요구한다. 우리 세상에서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는 후기 기독교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의 최신유행의 사회는 선택적인 상대주의에 찬성하여 객관적인 진리의 개념을 포기했다. 따라서 종교는 선택과 혼합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부분들, 편안하고 위안이 되는 개념들과 삶을 더 쉽게 만들어주는 의식들을 취한다. 우리 자신의 선호도와 성향을 가르는 더 어려운 진리들 나는 그런 식으로 보지 않는다와 같은 문구로 하나님의 말씀의 평범한 가르침을 무시한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진리에 접근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동의와 복종을 요구한다. 경건의 신비는 고백함으로 위대하다”(다비).

우리의 수락을 요청하는 진리는 계시된 진리이다. 그것은 경건의 신비이다. 하나님의 목적에 감추어져 있었지만 인간의 추론이나 과학적 실험으로 접근할 수 없었던 것이 이제는 알려졌다. 이성이 아닌 계시가 진리의 근원이다. 우리는 이것을 뒤집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소중히 여기는 경향이 있다. 신자들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성경의 진실성을 증명하기 위해 과학, 역사 또는 고고학을 찾는 죄를 지을 수 있다. 물론 어떤 영역에서든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양립할 수 있으며 모순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자연계의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

진리는 경건과 관련이 있다. 이것은 경건한 삶을 강조하면서 시작된 앞의 구절에 대한 또 다른 연결을 제공한다. “네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네가 알게 하려 하노니 … ” 이것은 성경 전체에서 다시 발생하는 강조점이지만 목회 서신 특히 디도서에서경건을 따르는 진리”(1:1,KJV)는 전체 서신의 요지다. 성경에 비추어 볼 때 진리는 실체와 분리될 수도 없고 분리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진리는 경건한 행동을 만들어내고 결과적으로 오류는 필연적으로 도덕적인 악에서 나타난다. 그래서 그것이 여기에 있다. 이 신비는 경건함을 보여준다. 그것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그 모본과 전형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또한 경건을 낳는다. 왜냐하면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경건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분은 사실상 하나님께 받아 들여질 수 있는 것의 근원이고, 능력이며, 모본이다"(켈리).

더욱이 진리는 인격적이다. 그것은 육체 안에 나타난주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다. “진리는 철학자들에 의해 논의되어야 할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모든 진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기원을 발견하고 모든 진리는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다시 향하게 한다. 따라서 우리가 그 기둥의 꼭대기를 살펴보면 지역모임이 붙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때, 일련의 규칙과 교리가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여섯 가지 숭고한 표현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시고 성령 안에서 의롭게 되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이방인들에게 선포되시고 세상에서 믿기시고 영광 속으로 올려져서 영접을 받으셨느니라.”

이러한 표현들을 어떤 형태로든 적절한 방식으로 검토하는 것은 이 기사의 범위 내에서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가 그것들을 읽으면서, 진리의 또 다른 측면이 반복적으로 강조된다: 진리는 이미 밝혀졌으며 선언될 것이다. “명백하고”,“의롭게 됨”(또는 입증 됨) 전파됨은 모두 공표와 선언에 대한 공통적인 강조점을 공유하며, 이러한 강조점은 진리의 기둥…”을 보여주는 모임의 기능과 밀접하게 일치한다. 인간은 영지주의를 좋아한다 - 입문한 사람들만 접근할 수 있는 특별하고 비밀스런 지식의 개념.

하나님은 진리에 경계를 두지 않는다. 길고 크고 광대하고 넓게, 온 세상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까지 이스라엘 민족을 넘어 이방인에 이르기까지 민족적 또는 국가적 경계에 의해 무제한으로 울려 퍼져야 한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수수께끼로 들리지 않는다. 이것은 때때로 성경의 명확함으로 알려져 있다. 성경은 그것이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해독할 코드가 아니다. 성경은 다른 어떤 책과도 같지 않지만, 우리는 다른 어떤 책과 마찬가지로 읽어야 하는데 하나님은 인간의 말로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고 우리가 깨닫고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분의 진리를 밝히신다. 바울이 경건의 신비가 고백적으로 위대하다고 말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http://truthandtidings.com/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