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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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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스위터넘

이 시리즈의 이전 기사에서 우리는 마르키온의 이단이 어떻게 성경을 잘라내고,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멸시하도록 내버려 두게 하려고 시도했는지를 보았다. 그 공격은 격퇴되었지만 사탄은 대단히 다루기 쉬운 적이 아니다. 마르키온의 공격은 공격 방향이 극적으로 바뀌기 전에 거의 격퇴되지 않았다. 교회들을 괴롭힌 것은 이제 성경에서 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발언이 하나님의 말씀과 동등한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예언자들에 의해 덧붙여진 것이었다.

신약에서 예언은 교회 시대의 첫 수십 년 동안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 분명하다. 성경의 정경이 완성되기 전에 예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신자들과 소통하도록 하나님에 의해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 은사들은 시기가 제한되어 있었다. 신약의 가장 초기 책에서도 우리는 그 예언이 하나님의 완전한 말씀인 “완전한 것”(고전 13:8-10)이 오면 불필요하게 된 예언이  “그칠 것”이라고 들었다.

교회 역사는 이것을 확인시켜준다. 예언의 은사는 사도 시대보다 거의 오래 가지 못한 것 같다. 따라서 2세기 말에 자신의 발언을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제시한 자칭 예언자의 출현은 광범위한 관심과 비난으로 부딪혔다.

문제의 예언자는 몬타누스라 불린 프리지아인이었다. 이교도에서 개종한 직후,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은 예언자라고 주장하면서 소아시아의 교회들 사이를 오갔다. 이 예언은 위로자의 영감을 통해 나왔다고 그는 주장했다. 이 제목은 요한복음 14:16절에 있는 성령에 관한 그리스도의 약속을 따랐다. “내가 아버지께 구할 터인즉 그분께서 다른 위로자를 너희에게 주사.” 그러나 몬타니스트들은 결국 위로자를 성령님으로부터 분리된 실체로 여겼던 것 같다. 그의 예언의 방식은 장관이었다. - 첫째, 그는 무아지경에 빠진 후 황홀한 광란의 도가니로 나아갔고 거기서 그는 하나님으로 말했다. 그는 이러한 발언들이 성경의 내용과 가르침을 대체했다고 주장했다. 기록된 그의 예언에 대한 기록들은 몬타누스 자신이 금욕적인 삶의 방식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하긴 했지만 교리적인 혁신에 특별히 관심이 있지 않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몬타누스는 성경이 추가 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는 곧 하나님의 계시로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다른 사람들을 추종했다. 이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여성은 몬타누스와 함께 여행한 두 명의 여성 프리실라와 막시밀라였다. 그의 가르침이 퍼지면서 몬타니즘이 성경뿐만 아니라 개별 교회 지도자들의 권위에 대한 공격이라는 것이 곧 분명해졌다. 이 도전의 심각성이 분명해지자 몬타누스와 그의 지도자들이 이단자로 파문당했다. 현대 보고서에 따르면 몬타누스와 막시밀라는 궁극적으로 목을 맸다. 그들의 죽음 이후, 그들이 시작한 이단은 계속해서 성장했고, 점점 더 많은 예언자들이 훨씬 더 사치스러운 예언을 하고 성경적 가르침은 줄어 들었다. 예를 들어 한 저명한 추종자는 “위로자가 몬타누스를 통해 출판 된 책은 그리스도가 복음에서 계시한 것보다 더 많을 뿐만 아니라 더 좋고 더 큰 것”이라고 주장했다. 몬타니즘은 궁극적으로 틈새 이단 이상의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초대 교회에서 저명한 정통 신학자였던 터툴리안 일원들 사이에서도 포함되었다. 그것은 6세기까지 교회를 계속 괴롭혔는데 유스티니안 황제가 이단 가르침의 사당이 된 몬타누스, 막시밀라, 프리실라의 무덤을 파괴하도록 명령했다.

의심할 여지없이 몬타니즘은 심각한 이단이었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것은 예언의 내용이 아니라 그것이 예언에 주어진 장소에 대한 것이었다. 몬타누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성경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계시가 필수적이라고 명시적으로 말했다. 이러한 계시는 성경에 추가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내용과 전달 면에서 모두 명백히 모순되었다.

따라서 몬타니즘의 출현은 2세기의 신자들에게 큰 도전이 되었다. 추가적인 계시의 문이 열렸다면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증거는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몬타누스와 그의 가르침에 대한 단호하고 통일된 거부는 그들을 전파한 저명한 교사들에도 불구하고 교회 역사에서 매우 중요했다.

슬프게도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사탄은 악착같고 탄력이 있는 반대자다. 19세기와 20세기에 몬타누스의 그것과 비슷한 것 이상의 잘못된 가르침이 출현하고 놀라운 확산을 보였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예언적 계시를 받겠다고 주장하고 황홀한 광란의 고통 속에서 이러한 계시를 전달하는 사람들을 찾기 위해 너무 열심히 또는 너무 오래 탐색할 필요가 없다.

만약 이 개인들과의 대화에서 우리가 그들의 경험과 실천의 비성경적 본질을 지적한다면,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을 제한한다고 비난할 것이다. 그들은 그분의 주권적 능력은 그분이 선택한대로 행동하고, 그분이 뜻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그들의 교리의 최종 결과는 성령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성령님은 그분이 영감을 주신 성경이 제쳐지고 무시되거나 추가되는 곳에서는 영화롭게 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충분하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진리다. 성경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한 충분한 지침서라는 것은 그것이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분의 말씀에 영감을 주셨다. 사도 베드로의 말은 여기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리를 부르사 영광과 덕에 이르게 하신 분을 아는 것을 통해 그분의 신성한 권능이 생명과 하나님의 성품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도다. 그것들로 말미암아 지극히 크고 보배로운 약속들이 우리에게 주어졌나니 이것은 너희가 이 약속들을 힘입어 정욕으로 인해 세상에 있게 된 썩을 것을 피하여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벧후 1:3-4).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생명과 하나님의 성품에 속한” 모든 것을 주셨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의 “지극히 크고 보배로운 약속들”은 그 위대한 제공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도한 이단인 몬타누스의 가르침을 인식한 2세기 신자들의 모범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굳건히 옹호한 것에 감사해야 한다. 우리 시대에도 우리가 더 적게 할 여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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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