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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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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의롭게 됨

로마서는 복음의 고동치는 심장이다. 성경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이 가장 영광스러운 메시지의 교리는 포괄적으로 조망된다. 성령님은 우리를 인간의 타락의 구렁텅이로 끌어내리고 다시금 하나님의 목적을 알게 되는 엄청난 봉우리까지 우리를 데려가며 그 타락한 민족의 구성원들이 궁극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그분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롬 8:29)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놀라운 편지의 중심에는 단순하지만 세상을 뒤흔들 정도로 심오한 진리가 있다. -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롬 1:17).

로마서에는 복음이 “하나님의 의”(1:17)에 대한 계시라고 묘사되어 있다. 하나님과 그분의 성품에 대해 결코 짐작할 수 없었던 것들이 이 위대한 메시지에서 우리에게 독특하게 알려졌다. 믿음에 의한 칭의의 위대한 원리는 성경적 진리 중 하나이다 - 또는 오직 은혜에 의해서만 더 포괄적이고 정확하게, 오직 믿음을 통해서,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 그분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제외하고는 우리가 접근할 수 없었을 것이 성경의 진리 중 하나이다. 그 사람이 타락한 것을 분명히 볼 수 있다. 하나님이 위대하고 선하신다는 것은 그분의 인격의 일반적인 계시와 자연적인 창조에 대한 그분의 능력으로부터 추론될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이 죄인을 의롭게 하는 이 방법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은 우리의 본능이나 지성의 이해를 훨씬 뛰어 넘는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인간, 그가 고안하고 설계한 모든 종교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착한다. 바울은 구원을 강조하면서 이 집착의 뿌리를 확실하게 지적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엡 2:9). 우리는 자랑하는 것을 좋아하며,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우리의 혼의 구원을 위해 그분과 협력할 수 있는 방법도 없다는 생각은 법적으로 반대된다.

그러한 태도는 자연스럽다. 구원받지 못한 남녀에 대한 생각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그리고 다른 자연적 결함과 마찬가지로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충분함을 의지하는 것에서 유혹을 당할 위험에 처한 갈라디아 신자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놀랄만한 열정으로 글을 썼다. 두 번째 장에서 그는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상기시킨다.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되는 줄 알므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나니 이것은 우리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자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는 어떤 육체도 의롭게 될 수 없느니라”(2:16). 조금 후에 그는 요점을 더 정확히 짚었다. “너희가 그렇게 어리석으냐? 너희가 성령 안에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완전해지고자 하느냐?”(3:3).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그처럼 긴박하게 다루었던 잘못된 교리는 그의 말로 인해 약화되었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죽지 않았다. 교회 증거의 1세기부터 구원을 부분적으로나마 전파한 사람들이 있었다, 전적으로는 아니더라도 개인의 의로운 행위에 근거하거나 지속되었다. 그들의 복음은 - 같은 종류가 아니라 또 다른 종류로(갈 1:6-7) 일하는 것과 자랑하려는 인간의 욕망에 호소력을 가졌고, 수세기가 지나면서 그 인기는 높아졌고 교회는 복음의 빛에 관한 한 참으로 어두웠던 시대로 향했다.

그 어둠은 깊었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받은 신자들이 여전히 있었고 그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친 사람들도 여전히 있었다. 그러한 사람 중 한 사람은 요한 폰 슈타우피츠라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사였다. 슈타우피츠는 자신의 죄악을 깊이 의식하고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해방을 찾으려는 말썽 많은 젊은 수도사 마틴 루터를 만났을 때, 그는 선한 일의 중요성이나 교회의 공로나 성사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가리켰다. 루터는 나중에 “슈타우피츠가 나를 위해 복음의 불꽃을 밝혔다. … 슈타우피츠가 없었다면 저는 천국보다는 지옥에 있을 것이다.

루터와 그가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했던 종교개혁은 오직 믿음, 오직 은혜의 근본적인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유명할 것이다 –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에 의한 칭의. 그러나 개혁자들은 지난 수세기 동안 이해되어 왔던 믿음에 의한 칭의의 진리를 전파하는 것 이상을 하고 있었다. 루터와 그의 뛰어난 친구인 필립 멜랑크톤은 헬라어 성경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최근의 진보에 비추어 성경을 주의 깊게 연구했다. 그렇게 하면서 그들은 종종 간과되어왔던 중요한 구별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것이 칭의와 성화의 차이였다. 카톨릭의 가르침에서 칭의는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과정이었다. 멜랑크톤이 성경, 특히 로마서를 면밀히 조사하면서 그는 칭의가 죄인을 의롭게 만드는 개선 과정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차라리, 그것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다 고 선언하신 사법 행위였다. 그 칭의 뒤에는 성화 과정이 뒤따랐지만, 이것은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위치에서 일하는 것이었다.

이 성경적 진리의 회복은 엄청난 의미가 있었다. 그것은 혼들이 영적인 능력을 쌓기 위해 더 이상 의로운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에 기독교 자유의 진정한 의미를 회복시켰다. 오히려 경건한 삶은 의롭게 된 혼의 특권, 해방된 마음의 기쁜 반응,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얻은 올바른 신분에서 실제적인 일이 되었다. 갈보리에서 구주께서 이루신 일의 목적 중 일부는 “죽음을 두려워하여 평생토록 속박에 얽매인 자들을 건져내려 하심이라”는 것이었다(히 2:15). 이제 복음의 진리가 재발견됨에 따라 그 자유는 수많은 혼들의 경험 속에서 결실을 맺게 되었다.

칭의의 교리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모든 분야에서 종교 개혁의 핵심이 되었다. 그것은 개혁자들의 유일한 관심사가 아니었고 그들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믿음을 통해 오직 은혜로 구원에 대한 헌신으로 연합되었다: 오직 믿음, 오직 은혜. 그리고 그것을 위해 우리는 매우 기뻐해야 한다. 우리는 이 사람들을 지도자나 설립자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의 가르침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모든 세부 사항에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를 사고 팔지 않은(잠 23:23)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지만 엄청난 반대에 부딪혀서도 굳게 맞선 사람들에게도 감사해야 한다.

우리는 또한 성경의 진리가 회복된 방법에 주목해야 한다. 멜랑크톤의 진리를 회복한 것은 우연한 독서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는 매일 읽는 책에서도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고 문맥과 동떨어진 한 구절에서 발견된 “도전적인 생각”도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중하고 정성스럽게 연구함으로써 진리를 발견했다. 그 연구에 그는 모든 타고난 재능을 동원했다. 그는 그가 받은 뛰어난 교육을 적용했다. 그 노력의 결실은 기독교를 변화 시켰고 우리를 영원히 그의 빚에 머물게 했다.

그의 본보기는 우리에게 중요하다. 이 세대는 이전 세대보다 항상 더 나은 것은 아니지만 더 많은 교육을 받았다. 우리는 복잡하고 도전적인 주제에 부지런함과 규율로 우리의 마음을 적용한 경험이 있다. 우리는 비판적 사고와 분석적 사고를 훈련하는 이점이 있다. 매일 우리는 우리의 일들에 이러한 익숙함을 사용하여 세속의 고용주에게 맡기고 있다. 하지만 너무나 자주 우리는 그것들을 벽장 문에 버리고 아무렇게나 무질서한 방식으로 성경에 접근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은 더 나은 가치가 있으며 종교개혁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바울의 권면의 가치와 중요성을 크게 알게 되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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