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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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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시드

1996년 휴머니스트 수상소감에서 리차드 도킨스는 믿음을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천연두 바이러스와 비슷하지만 근절하기가 더 어려운 세계의 큰 악 중 하나이다.[1] 이와는 대조적으로 존 칼빈은 믿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성령님의 거룩함을 동시에 받지 않고는 아무도 그분을 올바로 알지 못할 것이 확실하다.[2] 히브리서 11장의 영웅들의 믿음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믿음의 주제를 전반적으로 고려해보아야 한다. 믿음이란 무엇인가그리고 그것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

믿음은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하는 수단이다. 그렇다고 이 신뢰를 채용할 만한 타당한 이유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이러한 “가치 있는” 것들이 참되다고 받아들이고 고백하고 설득된 것처럼 개개인의 신자는 하나님의 증거를 받을 때 “하나님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하는 믿음을 행사한다( 3:33 NKJV). 이것은 확률의 수학에 대한 믿음을 모호한 단어로 줄이는 것이 아니다[3] 비록 그 이상도 아니지만 말이다. 이들 구약성경의 신자들의 믿음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에 따라 그들의 삶을 인도하는 것으로 구성되었다. [4] 우리의 믿음도 동일하다.

그러나 이 확신은 오직 “듣는 것”으로 오는 것인가, 아니면 성령님이 우리 마음에 그것을 일으켜야만 하는 것인가?[5] 존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교황절대주의”와 그들의 “스콜라 철학교리”뿐만 아니라 “준 교황주의자들”과 그들의 “유해한 철학”에 대한 많은 교정과 지나친 수정을 제시한다. 그는 그들에게 “복음 역사에 대한 어떤 공통적인 동의”라고 묘사하는 이른바 “공통적인 믿음”이라고 말한다. 그의 반박은 “잠시동안만 희미해지는 믿음으로 감명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으며 그가 같은 부분에서 말하는 것은 “일시적인 믿음”과 “성령의 열등한 움직임”이며, 그리고 더욱 날카롭게 “홀로 택한 믿음의 산 뿌리를 심어 끝까지 인내할 수 있다.” 칼빈이 믿는 것은 바로 이 살아있는 또는 “영원한” 믿음이 성령님에 의해 시작되었고 점차 그분에 의해 증가된 것이라고 믿었다. 요약하면, 칼빈과 그의 추종자들 중 많은 사람들은 서로 다른 유형의 신앙이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를 타락함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믿음을 추구하고 있다. 그의 정의에 따르면, “성령님에 의해 우리 마음에 드러나고 우리 마음에 봉인되는” 것이 바로 이 특별한 종류의 믿음이다.[6] 믿지 않는 사람도 행할 수 있는 믿음이 있지만 성령님이 주시는 믿음과는 다르다. 그러나 성경이 믿음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 이것인가?

 

성경은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것이라고 말한다

믿음과 관련된 소유대명사와 형용사에 주목하라. “일을 하지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느니라”( 4:5).[7] 우리는 신약 전반에 걸쳐 이러한 구별을 볼 수 있다.[8] 그리고 아마도 공관복음서보다 더 명확하지 않을 것이다. 복음서에서 우리는 “작은 믿음”과 “큰 믿음”을 읽는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이 없다고 말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주님께 “우리의 믿음을 더해 달라”고 간구했다. 누가복음에서 주님은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셨다. 로마서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믿음이 강했다”고 읽는다. 바울은 골로새 사람들에게 그들의 믿음의 “확고함”을 상기시키고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그들의 믿음이 “매우 커졌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이들 중 누구도 “비난자들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분”하는 믿음을 묻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돌려 말하거나 완곡한 표현이 아니다.

 

히브리서에서 믿음

히브리서 11장은 강하거나 약한 믿음에 그다지 관심이 없으며 배타적인 영적 믿음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주제는 가지각색의 믿음이 아니라 원칙으로서의 믿음이다. 이 장에서는 믿음 외에 형용사가 없고 전치사만 있다. 기자의 의도는 이들 남녀들의 예외적인 믿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의 사실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들이 살고 죽은 것은 믿음에 의해서였다.

우리는 히브리서 3장에서 시작되는 믿음의 주제 또는 오히려 그것의 결핍을 본다. 이집트에서 나온 일부 사람들은 “불신앙 때문에 (19안식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리고 다시 4장에서: “선포된 그 말씀이 그것을 들은 자들 속에서 믿음과 섞이지 아니하였으므로 그들에게 유익을 끼치지 못하였다”(2).

예수님 시대에 유대인들이 믿지 않는 이유는 유대인 의식과 의식적 행사의 매력 때문이었다. 믿음의 “보이지 않는” 측면은 그들의 종교적 본능에 어긋나고 당연히 그렇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이 아는 전부였기 때문이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자신들이 존경했던 선조들의 삶을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 11:1)로 묘사함으로써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솔로몬의 성전이 세워진 바로 그 땅은 “나타나 보이는 것들로 만들어지지 아니”하였다( 11:3). 방주를 준비하고, 포도원을 심고, 제단을 쌓는 촉각적인 활동으로 특징지어지는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한 일들에 대해 하나님으로부터 경고를 받고 두려움으로 움직여 방주를 예비함으로”( 11:7). 그들의 가장 위대한 조상은 처음의 “신실한 아브라함”( 3:9)이었고 “아버지 아브라함”( 8:56)이 되기 이전에 그는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 채” 그 땅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11:8). “모세의 자리”에 앉은 사람들과 “모세의 제자들”( 9:28)은 그의 삶을 지배하는 원리를 간과했으며 –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분을 보는 것같이 하면서 견디어 냈느니라”( 11:27). “우리는 믿음으로 걷고 보는 것으로 걷지 아니하노라”(고후 5:7). 창세기부터 기드온, 골고다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항상 믿음으로 이루어졌다.

 

첫 번째 가족에 대한 믿음

창세기 4장에서 첫 형제의 선물은 그의 불신의 마음과 일치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물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악마적 방식으로 하나님께 다가가고자 했던 것이다. 그의 지혜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저 사악한 자”(요일 3:12)였다. 둘째 형제는 이 원리를 이해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하나니”( 11:6).

아벨은 그의 선물로 구별된다. 그는 “가인보다 더욱 뛰어난 희생물”(4)을 제공했다. 그 우수성은 식물보다 단백질에 대한 하나님의 선호 때문이 아니라 늘 그렇듯이 차이를 만든 것은 “아벨이 제공한 믿음으로”(4)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아벨의 순종이었다. 하나님의 바램은 땅의 열매가 아니라 양떼의 첫 새끼와 그 기름에 대한 것이었다. 이것이 그가 “자기가 의롭다는 증거를 얻었으니”(4)의 원칙이다. 첫 번째 새끼를 키우고, 죽이고, 제시하는 노력과 일이 아니라 그의 행동을 자극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다. 그것이 아벨이 하나님과 함께 옳게 만든 것이다. 우리는 “주께서 아벨과 그의 헌물에는 관심을 가지셨”기 때문에 이것을 안다( 4:4). 또는 히브리서 기자가 말했듯이, 하나님은 “그의 예물들”(11:4)을 증거하셨다. 하나님은 특별한 제물, 정확한 선물을 원하셨고, 아벨은 믿음으로 그분이 찾고 있는 것을 정확히 드렸다. 우리는 이 명령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두 형제 모두 그들의 부모의 무력함을 위해 희생된 동물을 알고 있었다고 가정하는 것은 매우 타당하며 그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죽음을 받아들이라는 요구의 어떤 것을 이해했다.

아벨이 죽었지만 그의 믿음은 여전히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이것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었고, 단순히 지적 동의나 애정이 아니었고, 기부금도 아니었고, 오히려 우리의 신뢰할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나 신뢰였다.

 

[1]  Richard Dawkins, “과학은 종교인가? 인본주의자 , 57 , 1 .

[2]  존 칼빈, 기독교 강요 , 3, 8.

[3] 브리안 브라이스, 믿음의 척도: Probability in Religious Thought (자체 출판, 2019), 102 .

[4]  FF 블루스, 히브리서(Grand Rapids, MI:Eerdmans, 1964), 277.

[5]   11:18;  12:3;  6:23;  1:29; 고전 12:9; 딤후 2:24-25. 이것들은 이 견해에 대한 일반적인 증거 텍스트이며, 각각은 외부적인 믿음의 “선물”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직접 접해 있는 문맥(그리고 성경 전체)에 대한 적절한 설명을 받을 자격이 있다.

[6]  이 단락의 인용문은 존 칼빈, 기독교 강요, Book 3, Nos.1-38에서 인용한 것이다.

[7]  이 기사의 나머지 성경 인용문은 KJV에서 인용한 것이다.

[8]   2:4;  9:2,22,29; 15:28; 2:5; 5:34; 10:52; 7:50; 8:25,48; 17:5,19; 18:42; 22:32; 1:8; 고전 2:5; 15:14,17; 2고후 10:15; 1:15; 2:17; 1:4; 2:5; 살전 1:8; 3:5,6,10; 살후 1:3; 5-6; 1:3; 2:17; 벧전 1:7,9,21; 벧후 1:5; 요일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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