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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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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0. 21. 06:35 짐 플레니건/구주의 옷들

짐 플레니건

사람들이 갈보리에서 도박을 했던 겉옷은 “이음새가 없는 것”이었다. 군인들은 이 이음새가 없는 옷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인식하고 “우리가 그것을 찢지 말자”라고 말했다(요 19:24). 손상되지 않아야 하는 일체성이었으며, 우리는 이 상징에서 주 예수님의 위격 안에서 인성과 신성의 설명할 수 없는 불가분의 일치를 볼 수 있다. 이 진리는 특별한 방식으로 구주를 너무나도 친밀하고 개인적으로 알고 사랑했던 사도 요한의 글의 주제라는 점이 종종 지적되었다. 요한은 영감으로 그의 복음서와 세 서신서, 계시록을 우리에게 물려주었다. 그는 그의 복음서에서 갈릴리 사람이 하나님이었음을 보여준다. 그의 서신서에서는 사람이 되신 분이 참으로 하나님이었음을 보여준다. 계시록에서 그는 하나님이자 사람이신 그분의 궁극적인 승리를 입증한다.

 

한 영광스러운 위격 안에서 하나님 되심과 사람되심의 놀라운 결합에 대해 우리는 “우리가 그것을 찢지 말자”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감히 주님의 위격의 이 두 가지 측면을 냉정하게 분석하거나 분리할 수 없다. 그처럼 불경스럽고 학문적으로 그러한 거룩함을 엿보는 것은 언약궤의 뚜껑을 여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이것은 아주 오래 전 벳세메스 사람들에게 엄한 심판을 가져온 행위이다(삼상 6:19). 우리의 구주는 하나님이다. 우리의 구주는 사람이다.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거룩한 신비이다. 이음새 없는 겉옷을 가지려는 사람들처럼 우리는 다시 말한다 “우리가 그것을 찢지 말자”라고!

 

그렇다면 복음서는 얼마나 조심스럽게 이 일체성을 보존하는가? 우리가 주님의 인성을 엿볼 수 있는 곳마다 언제나 그분의 신성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이미 제시된 바와 같이, 특히 요한복음에서 그렇다. 이 복된 사람은 결코 하나님이신 것을 그만 두지 않았다.

 

가나의 결혼식에 초대를 받은 우리 주 예수님은 얼마나 인간적이셨는가. 그분의 어머니와 제자들과 함께 그분은 거기에 손님으로 기꺼이 응해 주셨다. 그러나 그분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첫 번째 기적에서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시기로 선택하신 것은 이러한 검소한 상황에서였다. 요한복음에 기록된 그분의 마지막 기적은 비슷한 의미를 담고 있다. 베다니의 자매들은 슬픔에 빠졌다. 그들의 형제 나사로가 죽었다. 구주께서는 사람되심의 현실에서 그들이 우는 것을 보셨고 그들과 함께 우셨다. “사람의 눈에 하나님의 눈물!” 그분의 거룩한 성품이 실재했다는 얼마나 큰 증거인가! 예수님은 우셨다! 그러나 이 우는 사람은 하나님이시며, 잠시 후 무덤에서 죽은 자를 불러 내시고 죽음은 그에게 순종해야 한다. 인성과 신성! 복된 진리; ”우리가 그것을 찢지 말자”!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그분이 여정에 지치고 수가의 우물에서 쉬고 있는 것을 보는 이것이 진정한 사람되심의 그림이 아닌가? 그분은 또한 배가 고프고 목이 말라서, 마실 것을 달라고 하셨고, 제자들이 마을에서 음식을 가져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유대인”으로만 인정되었을 때 이 인성은 얼마나 실제적이었는가? 그러나 대화가 계속되면서 그녀는 이 낯선 사람이 평범한 유대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신성한 통찰력과 모든 지식으로 그분은 그녀의 마음을 드러내신다. 그분은 그녀의 과거와 현재를 알고 계셨다. 그분은 그녀에 대해 모두 알고 있었다. 배고프고 목 마르고 피곤한 이 사람은 하나님이다. 그분은 그녀의 필요를 완전히 충족시킬 수 있으시다. 그분은 그리스도이시며 세상의 구주이시며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시다. 그것은 영광스러운 진리이다. “우리가 그것을 찢지 말자”!

 

얼마 후 유대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우리가 아는데?”라고 말했다(요 6:42). 그리고 다시 “이 사람은 결코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요 7:15). 나사렛에서 30년 동안 단순히 그들과 함께 살았던 그분을 엿볼 수 있다. 그들에게는 그분은 목수의 아들이었다. 그분은 서기관이나 율법사처럼 학식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참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가르치시는 그분의 능력에 놀랐다. 요셉의 아들이신 그분은 그들 중 5천 명에게 빵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로 먹이셨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다(요 7:12). 물론 그분은 그랬지만 왜 그들은 그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을까? 그분의 사람되심과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는 우리는 참으로 위대한 진리를 배운다. “우리가 그것을 찢지 말자”!

 

그분의 아버지와의 관계에 관한 긴 담론 후에 그들은 그분에게 “너는 사마리아 사람이요 마귀 들린 자라”고 말했다. 그들이 얼마나 사람 되신 그분을 경멸했는지. 큰 은혜로 그분은 단순히 “나는 마귀 들리지 아니하였노라”고 대답했다(요 8:48-49). 왜 그분은 사마리아인이라는 혐의에 대답하지 않았을까? 그분이 화를 내지 않게 할 사마리아인들이 그 말이 들리는데 있었는가? 그런 다음 그분은 그들에게 자신의 위대함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아브라함은 나의 날 보기를 기뻐하다가…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내가 있느니라”고 말했다. 그들은 그 사람과 논쟁을 벌였지만 이 사람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갈릴리 사람은 사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다! 얼마나 진리인지! 아마도 신비이지만 “우리가 그것을 찢지 말자”!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지만 기적적으로 시력이 회복된 사람이 있었다. 그는 구주를 “예수라 하는 사람”(요 9:11)이라고 말했다. 그 당시 그가 아는 ​전부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느냐?” 예수님은 나중에 그에게 물으셨다. 순진하고 정직하게 그는 “주여, 그분이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그분을 믿고자 하나이다?”라고 대답했다. 예수님은 자신을 알리셨고 불쌍한 사람은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며 인정하고 그분을 경배했다. 예수님이라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참으로 나사렛 사람은 하나님이었다. 보배로운 진리; “우리가 그것을 찢지 말자”!

 

그분은 베다니에 있는 가정의 환대를 누릴 수 있었던 그분의 진정한 사람되심의 예가 아니었는가? 그들은 그분을 환영했고 그분은 그것을 높이 평가하셨다. 그분은 그들의 식탁에 앉아 그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었고, 마리아는 그분이 계신 모든 것을 진정으로 인정하면서 그분에게 그녀의 나드향을 부었다. 대제사장들은 어떻게 그분과 나사로를 죽일 수 있는지 함께 상의했다. 이튿날 그분은 당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다. 왜 그들은 이것이 사람이 탄 적이 없는 멍에 매지 않은 나귀 새끼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침착하게 성 안으로 데려갔는가? 말 못하는 나귀 새끼도 그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었다! 창조의 주님이 그 위에 앉으셨다. 왜 그들은 이것이 옛 예언 스가랴 9:9의 성취임을 알 수 없었을까? 나귀 새끼 위에 탄 사람은 그들이 기다렸던 하나님이었지만 그들은 알아보지 못했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이 될 수 있겠는가? 그분의 백성은 그것을 믿는다 심지어 그들이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이 사람을 보라”고 빌라도가 말했다. “너희 하나님을 보라”며 선지자는 말했다(사 40:9). 그러나 로마 총독과 이스라엘의 선지자는 같은 위격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었다. “우리가 그것을 찢지 말자”, 이 신성한 신비, 그러나 우리는 노래하자:

 

주님 안에서 가장 완전하게 표현된
아버지의 영광이 빛나고
소유한 완전한 신성 중에
영원한 신성.

 

무한의 진정한 그림,
누구의 본질이 숨겨져 있는지;
창조되지 않은 빛의 밝기,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내셨다.

 

그러나 그분의 이름의 숭고한 신비
천사의 통제를 초월하셨고.
아버지만의 (영광스러운 권리!)
아들은 이해할 수 있다.

(조시아 콘더)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