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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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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0. 22. 17:47 짐 플레니건/구주의 옷들

짐 플레니건

3년 이상 우리 주님은 제자들에게 참된 위대함의 비밀을 가르치셨다. 세상에 있는 것처럼 그들이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세상의 사람들은 권력을 위해 분투하고 공모할 것이며, 공정하든 반칙이든 거의 모든 수단을 통해 가장 위대해 지려는 목표를 달성하려고 할 것이다. 왕국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영적 영역에서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이 되려면 작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큰 자가 되려면 작은 자가 되어야 한다.

 

마지막 날 저녁에 그들과 함께한 바로 그분의 십자가의 그늘에서 그들은 그들 중 누가 가장 큰 자인지에 대해 다툼이 있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눅 22:24). 그들이 배우는 데 얼마나 디뎠거나 아마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다락방의 슬픔 속에서 구주께서는 이제 그들에게 실제적인 방법으로 누가 진정으로 가장 큰 자인지 보이실 것이다.

 

그 작은 일행은 감람산에서 시온산까지 먼지투성이 기드론 계곡을 가로질러 걸었고 그곳에는 모든 거주지가 있는 곳에 위치를 정했다. 한낮의 무더위 속에서 걷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만약 그곳에서 관습처럼 발 씻는 것을 도울 누군가가 거기에 있었다면 얼마나 환영받았을까? 만약 그들이 다른 사람의 집에 손님이었다면 하인을 즉시 불렀을 것이고 즉시 신선한 물대야를 가져와 필요한 예의를 베풀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손님이 아니었다. 그들은 저녁 동안 방을 빌렸던 동료들의 작은 일행이었다. 하인은 시중이 없었다. 그렇다면 누가 다른 사람들의 발을 씻기 위해 몸을 굽힐 것인가?

 

대야와 물 주전자가 거기에 있었다. 그 수건은 노예의 앞치마였는데 아마도 벽의 못에 걸려 있었을 것이다. 대야, 물, 수건이 준비되어 있을 때 필요한 것은 앞치마를 입고 무릎을 꿇고 동료와 친구들의 발을 씻을 만큼 충분히 낮아진 사람이 필요했다. 그러나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의심할 여지없이 각 사람은 기다리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실제로 하찮은 일이었다. 베드로는 “내가 맏이지만 그건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어”라고 생각했는가? 다른 사람들은 “우리는 베드로보다 먼저 주님을 알고 그를 그분께 데려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위대하다”라고 생각했는가? 그들의 개인적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아무도 테이블에서 일어나지 않았으며 아무도 없었다. 구주께서는 그들을 기다리셨다. 그들이 깨달았다면 그는 그들에게 위대해질 기회를 주셨지만 그들은 그것을 놓쳤다.

 

그런 다음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그분의 손에 맡기신 아들, 곧 그분의 위대함을 완전하고 의식적으로 알고 계셔서, 그리고 그분의 과거, 현재, 미래의 영광에 대해 아는 일에 동등한 그분이 자리를 비우고 수건을 향해 걸어가셨다. 그분은 자신의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으로 허리띠를 졸라매고 그분을 감싸셨다. 그분은 대야에 물을 붓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 시작하셨다.

 

영광의 주님이 섬기시려 띠를 띠고,
그분의 손에 있는 대야와 수건;
종처럼 물을 붓고 그러고 나서는
그분은 더러워진 사람들의 발을 씻으려고 몸을 굽히신다.

(저자 불명)

 

그것은 얼마나 놀라운 광경인가, 영광의 주님이 무릎을 꿇고 그분의 제자들의 발을 온유함으로 씻으셨다. 배반한 가룟 유다의 발까지도 다락방에서 그리스도의 부드러운 손에 의해 부드럽게 씻겨졌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종의 앞치마인 수건은 겸손의 옷이 되었지만 그날 저녁 그분은 그것을 화려하게 두르시고 그들 가운데 누가 정말로 위대한지 그들에게 보여주셨다.

 

그들과 함께 머무르는 동안 구주께서는 그들에게 겸손을 가르치셨고 그것을 설명하셨다. 그들의 질문에 “누가 가장 큰 자인가?” 그분은 한때 어린 아이를 데리고 그 가운데 세웠고, 그들이 진정으로 위대해지려면 어린아이들처럼 되라고 권고하셨다(마 18:1-4). 다른 사람들은 “자발적인 겸손의 위대함이 공적인 위대함보다 더 크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육적인 사람이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반복해서 제자들에게 왕국의 이 원리를 가르치셨다. 진정한 위대함은 겸손이고 겸손은 참 위대함이다.

 

겸손은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까지 멸시받는 말이었을 것이다. 이집트의 파라오, 바빌론의 왕들, 페르시아의 군주들, 로마의 황제들은 겸손할 시간이 없었다. 그들에게 위대함은 힘이었고 힘은 위대함이었다. 겸손은 복종과 동일시되었다. 온유함은 약함이었다. 그때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말할 수 있는 분이 오셨고 그분은 가장 위대한 분이셨다!

 

물론 예수님 탄생 때 입은 옷들은 처음에 겸손한 옷이었고, 나사렛에서 온 목수의 겸허한 옷은 사람들 사이에서 은혜로운 사역을 행하셨다. 그분이 자신을 낮추시고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을 때 그것은 참으로 겸손함이었으며 헤아릴 수 없는 겸손의 낮아짐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다락방에서 그분의 마지막 때에 겸손의 최고의 예였다. 종의 앞치마를 두른 선생님! 만유의 주님이 종의 수건을 두르셨다!

 

아마도 베드로가 이의를 제기해야 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을 것이다.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그는 놀라서 물었다. “절대로 주께서 내 발을 씻지 못하시리이다”고 그는 항의한다. 그 대명사들은 “주께서!” ”내 발!” 불쌍한 베드로! 우리 중 많은 사람들처럼 그는 얼마나 자주 잘못된 말을 했다. 구주께서는 설명하신 후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고 내가 너희에게 본보기를 주었느니라”라고 덧붙이셨다. “본보기”라는 단어는 다른 곳에서 “모형”으로 번역된다(히 9:23).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그분의 제자로서 본이 되어야 할 모본을 주셨다. 종은 그의 주님보다 크지 않다. 그들은 그분의 겸손의 모본을 따를 경우 참으로 복될 것이다. 이것이 그들이 열망한 바로 그 위대함이었기 때문이다.

 

원칙은 변하지 않았다. 바울은 구주의 겸손에 관한 위대한 논증에서 “너희 안에 이 생각을 품을지니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도 있던 생각이라”고 권고한다. “겸손한 생각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며”(빌 2:5,3).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부드러움을 힘입어 직접 너희에게 간청하노라”(고후 10:1). 가장 낮은 곳을 위한 유일한 투쟁이 있는 교제는 가장 행복한 교제이다! 그곳에서 형제들은 가장 위대한 분의 모본을 통해 올라가는 방법은 실제로 내려가는 것임을 배웠다!

 

당신은 우두머리가 될 것인가?
그렇다면 낮은 자리에서 섬기라.
높아지려는가? 내려가라.
그러나 당신이 원하는 만큼 낮게 가라.
최고는 여전히 낮았다.

(저자 불명)

 

오, 종의 앞치마, 겸손의 옷을 자발적으로 입으신 그분의 모본을 따르는 은혜를 위해!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