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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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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0. 28. 16:13 짐 플레니건/구주의 옷들

짐 플레니건

우리 주님이 지상에 머무르시는 날은 이제 끝났다. 요한계시록의 첫 장에서 요한은 전에 본 적이 없는 그분을 본다. 지금은 강보나 종의 앞치마나 자주색 겉옷이 아니라 발까지 내려오는 옷, 특정한 위엄과 영광의 겉옷이다. 그분은 겸손하고 인자하신, 그리고 끔찍한 조롱을 받는 인간의 옷을 입었지만 이제 모든 것이 바뀌고 다르게 옷을 입으신 영광 안에 있는 사람이다.

 

계시록은 영광 중에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으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 적절하다. “발까지 내려온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두르고 계시더라”(계 1:13, JND). 사람의 아들이 일곱 개의 금 등잔대 사이에서 걷는 모습이 보이고 그 묘사는 품위 있는 인간성과 주권이 어우러진 제사장의 아름다움이다. 그분은 교회들의 주이시고, 모임들의 주인이며, 그분에게만 책임이 있으며, 그분만이 다양한 필요와 조건을 적절하게 다룰 권리와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등잔대는 금색이다. 그것들은 어둡고 암울한 세상에서 그분을 위해 빛을 비추는 그분에게 소중하다. 그분은 각 사람의 문제를 알고 계신다. 왜냐하면 아버지에 대한 증거로 같은 세상에 살았기 때문이다. 사랑받는 흠정역에서와 같이 “촛대”는 의미를 충분하게 전달하지 못했다. W.E. 바인은 인용하기를, “촛불에 관한 언급이 없다. 그 자체의 물질을 태워서 빛을 제공하는 모습은 완전히 부적절할 것이다. 등불은 기름으로 공급되며, 그 상징은 성령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그분에 대한 증거의 무거운 책임은 영광 가운데 부활하신 사람의 사역과 지상에서 성령의 은혜로운 사역에 달려 있다.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믿는 이들은 모두 세상에서 빛을 품는 자가 되어야 한다(마 5:14; 빌 2:15). 주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나는 세상의 빛이로다”라고 말씀하셨다(요 9:5). 그러나 이제 그분은 더 이상 세상에 계시지 않으며 그분의 백성은 그분이 없을 때 빛을 비춰야 한다. 그분이 걸어가시는 중에 등불은 지역교회들이나 모임들을 상징하며, 성도들의 모임이 다양한 지역에서 그분을 위해 빛을 발산한다.

 

길게 끌리는 겉옷은 의심할 여지없이 제사장의 옷이다. 그러나 금띠는 관례적인 방식으로 섬기기 위해 허리에 두르는 것이 아니라 주권자들과 통치자의 유행을 따라 차분하고 위엄 있는 움직임을 유지하면서 가슴에 띠를 띠고 있다. 여기에서 옷과 띠 안에는 은혜로우면서도 권위있게 교회들 가운데 행하시는 분의 제사장직의 상징이 있다. 그리스도는 제사장이시며 왕이시다. 세이스는 “과거와 오늘날까지 세계의 일부 지역에서 긴 옷이 존엄과 명예의 표시다”라고 말한다. 그분은 사람의 아들로서 “우리가 가장 깊은 경외심을 가지고 절할 수 있는 개인적인 성품, 공적인 존엄, 천상의 위엄을 묘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출애굽기 28장에 나오는 아론의 옷과 유사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의 옷은 영광과 아름다움을 위한 것이었으며 실제로도 그렇다. 그러나 아론의 띠는 금으로만 엮었을 뿐이고 우리 주님의 띠는 모두 금으로 되어있다. 이것은 성직복의 권위가 아니다. 그것은 그분에게만 속한 개인적이고 본질적인 주권의 권위이다. 등잔대가 그분을 둘러싸고 그분은 그 가운데를 걸으신다. 그분은 전지전능하심으로 모든 것을 보고 아시며, 모든 상황에 대한 그분의 완전한 지식에 따라 각 집단을 적절히 다스리신다.

 

이 일곱 모임들은 참으로 다양했다! 전능자 만이 볼 수 있고 전능자 만이 충족시킬 수 있는 얼마나 위대한 욕구인가! 에베소의 문제는 서머나의 문제가 아니었다. 버가모의 상태는 두아디라의 상태와 같지 않았다. 사데, 빌라델피아, 라오디게아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제사장으로서 영광을 받은 인자만이 각 교회의 필요를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고, 그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섬길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조건과 환경의 차이와 함께 주님의 다양한 사역을 요구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편지마다 한 메시지가 나타난다는 점이 흥미롭다. 실제로, 교회에 그분 자신을 적절하게 소개한 후 각 서신의 시작 문구는 이것이다. 모든 모임에 그분은 단순하게 “아노니!”라고 말씀하신다. 이 메시지는 각 개별 집단에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어필하며 때로는 위로와 때로는 격려, 때로는 엄숙한 책망을 가져다줄 것이다. 그분이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히 그분의 백성의 감정과 행동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

 

에베소의 마음은 그분에게서 멀어졌다. 한때 더 나은 사랑이 있었지만 그들의 애정은 줄어들었다. 겉으로는 괜찮아 보였다. 사람들은 그들의 행위와 수고, 인내와 인내심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악한 일이나 악한 사람을 용납할 수 없었고 묵인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교리와 실행에 있어 모두 보수적이었다. 하지만 주님은 “아노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분은 마음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첫사랑에서 멀어졌고 그분의 메시지는 바울이 이전 편지인 에베소서 5:25-32에서 그들에게 쓴 그 신부의 애정을 새롭게 하기 위해 그들을 자신에게 다시 불러들이신다.

 

서머나의 요구는 달랐다. 여기에 그분을 위해 박해와 순교를 당하는 작은 무리가 있었다. 물질적 가난과 고난이 많았고 장차 올 것이 더 많았고 또한 그들에게도 에베소처럼 “내가 알며”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지식은 학문적이지 않았다. 그분은 경험적으로 그들이 무엇을 겪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분은 거기에 있었다. 이것이 그들에게 어떤 위로를 가져다줄 것인가, 그분이 알고 있다, 그분은 “죽었다가 살아 있는 이”시다(계 2:8, JND).

 

버가모는 다시 달랐지만 여전히 그분은 “아노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분은 버가모에서 증거에 어려움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사탄의 왕좌가 거기에 있었다. 그들도 서머나처럼 순교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 가운데 거짓 선생들이 있었고 이들과 그들의 해로운 교리에 관대했다. 근본적으로 그들은 그분의 이름을 굳게 잡고 그분에 관한 믿음을 부정하지 않고 그 자체로 건전했지만 그릇된 교사들은 용납하지 않아야 했다. 악한 교리는 악한 행위를 용인하게 만들 것이다. 교리적 악은 도덕적 악을 낳을 것이다. 그들은 이 사람들을 판단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주님께서 직접 그렇게 하실 것이다.

 

두아디라는 출발의 깊이를 꿰뚫어 놓은 것처럼 보이며 다시 한 번 “아노니”라고 말한다. 물론 그분은 그들의 행위와 사랑, 믿음과 봉사, 인내가 그 가운데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분은 거기에 악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성도들을 유혹하여 끔찍한 부도덕에 빠지게 한 사람이 있었다. 그런 판단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신실한 남은 자의 위로를 위해 그분은 그들도 알고 계셨고 굳게 붙들도록 격려하셨다.

 

그렇게 증거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사데는 두아디라에서의 특정한 회복을 밝힌다. 빌라델피아는 사데로부터의 추가적인 회복을 나타내는 반면 라오디게아에서는 메스꺼움을 느끼는 미지근함이 있다. 내가 아노니! 내가 알고! 내가 알아! 메시지는 모두에게 동일하다. 오늘날에도 부활하신 주님은 그 가운데 걸으신다. 존엄의 옷을 입은 영광스러운 사람은 여전히 ​​그분의 백성들 사이의 모든 상태를 보고 있으며 여전히 “내가 아노니”라고 말씀하신다!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