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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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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랄만한” “놀라운” “대단한” “믿을 수 없는” – 이러한 최상급의 말과 그것들과 유사한 다른 말들이 일상적인 말투의 일부가 되었다. 헤드라인 기자들, 광고주, 해설가들에게 애용되고 그들은 모든 관점에서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관심을 끌려고 시도하면서 모든 각도에서 소리를 지르며 종종 우리에게 범상하고 진부한 세속적인 일들에 대해 말한다. 그 결과는 유감스럽게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남용과 오용으로 인해 이 단어들은 힘을 잃고 우리가 정말 놀랍거나 믿을 수 없는 것을 시도할 때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그리고 우리의 이해력도 떨어지고 표현도 줄어들었다. 우리는 뉴턴의 “놀라운 은혜”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 형용사가 그에게 가지는 힘과 놀라움과 경이로움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는 하나님이 그와 같은 비참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행하셨던 것을 심사숙고하며 그의 혼에 넘쳐흘렀다.

 

“놀라운”과 “놀라운 일”은 더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일부 최상급 표현과 유사한 운명을 겪은 단어들이다. 비록 지금은 그것들이 약간 구식으로 들리지만 그것들은 “놀라운 일을 해냈군요”라는 찬사 또는 즐거운 놀라움을 우리에게 전달한다. “놀라움이나 경이로움으로 가득차기 위해서”라는 단어의 원래 영향력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그것은 정확하게 우리가 해야 할 그러한 노력이다. 우리가 놀라워하는 사람들에 대해 읽을 때 우리는 달콤하거나 일시적인 관심으로 상상해서는 안 된다. 이 경이로움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궁극적으로 무시할 수 있는 정도의 가벼운 느낌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것보다 훨씬 더 깊이 들어갔다. 그것은 경이로움이었고 사람들이 그들의 관심을 요구하고 그들의 혼들을 경이로움으로 이끌 정도로 평범하지 않은 무언가를 대면했을 때 거의 육체적인 감각이었다. 실제로 영어 단어 “놀라운 일”(때로는 “경탄할만한”으로 번역되거나 최근 번역에서는 “놀란”, “놀라게 하다” 또는 “깜짝 놀람”으로 번역됨)은 초자연적 현상에 걸맞은 반응의 개념을 뿌리에 두고 있는 헬라어 단어 qaumavzw(다우마조)를 번역한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에서 나오는 47개의 단어 중 거의 모두가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한 남녀의 반응을 묘사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짐승의 치명적인 상처를 사탄적으로 치유하는 것에 대한 세상의 반응을 설명하는 요한계시록 13:3을 제외하고는 남녀를 ​경탄하게 만드는 것은 신성한 행동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들을 경탄하게 하시는 분은 그리스도다. 사람들 사이에서의 그분의 움직임, 그분의 행동, 그분의 말, 그리고 그분의 자제력조차도 정상적인 기대의 끈을 끊어버렸고 다른 세상에서 온 권위를 보여주고 사람들로 하여금 평범한 능력과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했다. 그들의 정상적인 기대와 평소의 설명은 놀라운 구주에 의해 산산조각이 났다.

 

이 기사들의 연재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대로 사람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 경이로움으로 응답한 복음서에 기록된 몇 가지 경우를 고려할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그분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방법으로 그렇게 하셨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질병(마 9:8), 자연(마 8:27, 21:20, 막 6:51, 눅 8:25), 그리고 악마(마 8:33, 막 5:20; 눅 9:43; 11:14)에 대한 그분의 능력에 놀랐다. 반복해서 그들은 그분의 말씀의 지혜와 권위에 놀랐다(마 22:22; 막 12:17; 눅 4:22; 20:26). 제자들은 멸시받는 사마리아인과 대화하시는 그분을 발견했을 때 그분의 은혜에 놀랐다. 빌라도는 고발하는 자들 앞에서 침묵을 지키며 그분의 자제력에 놀랐다(마 27:14; 막 15:5). 나중에 그분의 죽음에 대한 소식이 빌라도에게 전해지자 그는 다시 한번 놀랐으며(막 15:44), 갈보리의 시간표를 통제한 것은 죽음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리고 경이로운 순간에 제자들은 빈 무덤(눅 24:12)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출현(눅 24:41)에 놀랐다. 그리스도께서 만들어낸 경이는 하나의 사건, 심지어 하나의 사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것은 다면적이고 다양했다. 모든 상황에서 그분은 기대를 뛰어넘으셨고, 사람들은 “아버지의 독생자”(요 1:14)를 경이롭게 바라보며 서있었다.

 

우리는 또한 구주로 인해 놀랐던 다양한 사람들을 주목해야 한다. 많은 경우에 군중들이 놀랐다(마 9:8,33; 15:31; 막 5:20; 눅 4:22; 9:43; 요 7:15). 일반적으로 이들은 구주로 인해 깊은 인상을 받기 쉬운 열성적인 군중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공정하고 최악의 적대적일지라도 그들은 구주를 보고 귀를 기울이는 동안 경탄해 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경우는 그분의 원수들이 놀라워했다(마 22:22; 막 12:17; 눅 20:26). 비록 그들이 구주의 흠을 잡으려 했지만 그분의 말씀은 그들에게 냉소와 비판을 버리고 자신들의 악의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지혜를 놀라워하도록 설득되었다. 경험 많은 행정관이자 수많은 심문과 처형의 베테랑인 빌라도조차도 구주의 침묵의 고통(마 27:14; 막 15:5)과 예상치 못한 그분의 죽음의 일정(막 5:44)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그분의 제자들이 놀라워했다. 우리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가장 덜 놀랄 뿐 아니라 감명을 받을 가능성이 적다는 것은 자명하다. 세간의 이목을 끄는 영웅은 없다라는 오래된 격언은 그 세부 사항에 관해서는 시대에 뒤떨어졌지만 여전히 사실이다. 따라서 제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한 시간의 시작부터 지상에서 그분의 시간이 끝날 때까지 그들의 주님으로 놀라워했다(마 8:27; 21:20; 막 6:51; 눅 8:25; 24:12,41; 요 4:27). 친밀감의 척도와 어느 정도의 친숙함만으로는 주 예수님을 평범하게 만들기에 충분하지 않다. 실제로, 그 반대였고 사실이다. 제자들처럼 우리는 그분에 대해 더 많이 배우고 그분을 알게 될수록 더 많은 놀라움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놀라워해야 한다. 아무것도 우리에게 큰 충격을 주는 것은 없고, 오히려 덜 놀랍다. 최상급의 평판이 나빠지는 것은 무미건조하고 평범해 보이는 시대의 원인이라기보다는 증상이다. 우리의 구원받지 않은 친구들과 그들을 타깃으로 하는 마케팅 담당자들에게 해결책은 오락적인 것과 전문용어에 대해 열렬히 추구하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지구가 모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하고 웅장한 더 큰 무언가로 우리의 혼을 새롭게 하고 마음을 확장시킬 수 있다. 결코 그리스도에게 익숙해 있거나 그분의 위대하심을 이해하고 있다고 느끼지 말자. 오히려 우리가 그분이 행하시고 말씀하시며 보여주셨던 경이로운 일들을 생각하면서 그 때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경이로워할 수 있기를.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