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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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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저녁의 기울어진 햇살 아래 두 군인이 예루살렘의 안토니아 요새를 떠나 도시 밖으로 나갔다. 의도적으로 이동하면서 그들은 갈보리라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은 무수한 범죄자들의 피로 물들었는데 산비탈 위의 십자가에 매달린 세 사람의 그림자에 가려진 끔찍한 장소였다. 병사들에게는 익숙한 장면이었고 뒤틀리고 괴로워하는 시체의 모습도 고통스럽게 헐떡이는 숨소리도 이들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았다.

 

그들은 첫 번째 십자가 아래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들의 일은 순식간에 끝났다. 망치의 쿵쾅거리는 소리, 뼈의 와삭거리는 소리, 죽어가는 사람의 고통의 투덜거림. 그들은 두 번째 십자가로 옮겼고 똑같은 잔혹한 행동을 반복했다. 그런 다음 그들은 가운데 십자가에 왔다. 정말로 그들의 관심이 처음으로 사로잡혔다. 십자가에서 모두가 침묵했다. 여기에는 숨을 헐떡일 필요도 숨을 쉬기 위한 노력도 없었다. 병사들은 놀라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가 벌써 죽었을까? 선임 병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확인하는 것이 최선이다”라고 말하고 창을 들고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의 옆구리를 찔렀다. “즉시로 거기서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 19:34).

 

임시 총독관저로 돌아온 빌라도는 그날이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느꼈다. 그것은 일찍 시작되었고 빌라도는 점점 더 잘 진행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수라고 불리는 사람의 재판에서 그는 유대인들이 그를 희롱하도록 했고 카이사르와 맞서는 것에 대한 자신의 불안정한 영향력을 사용하도록 허용했다. 그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말았어야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십자가에 못박는 작은 앙심을 품은 행동도 그의 감정을 완화시키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사람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유대인 지도자들의 불만을 일축하는 데는 어느 정도 만족이 있었다. 그들이 다시 돌아왔을 때 그 일은 거의 처리되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들이 걱정했던 안식일이었다. 그들은 시체가 십자가에 남아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빌라도가 이 문제에 해결해 줄 수 있을까? 빌라도는 그 일을 보고 두 명의 병사를 보내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숨을 쉴 수 있는 힘을 강탈하고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앞당겼다.

 

그리고 이제 다른 누군가가 만남을 요청했다. 적어도 이번에는 그들 중 한 명뿐이었고 아리마대의 요셉은 평범한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가 부자인 것이 도움이 되었지만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지명도가 있는 사람이었으며 명예로운 사람, 가볍게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빌라도는 그가 이전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음을 알아차렸고, 이 사적인 만남을 요청한 계기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는 요셉의 태도와 요구에 당황했다. 그는 “담대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님의 몸을 간절히 구하니라”(막 15:43). 그는 요셉과 같은 위엄있는 사람이 나사렛 예수님의 장례를 치르는 것에 대해 놀랐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놀라움은 더 깊어졌다. “빌라도는 그분께서 벌써 죽으셨을까”(막 15:44). 십자가에 못박힌 지 불과 6시간이 조금 넘었다. 십자가 처형은 희생자들의 고통을 극대화하기 위해 가능한 한 오랫동안 – 종종 며칠동안 신중하게 조정되었다. 이렇게 짧은 시간은 결코 없었다. 빌라도의 마음에 의심이 일어났다 - 이것이 구조 임무가 될 수 있을까? 십자가에 못 박힌 희생자들이 살아있는 동안 쓰러졌다면 그들의 시련에서 살아남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 아니다. 분명히 그것은 비참한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빌라도는 “백부장을 불러 그분께서 죽은 지 오래되었느냐고 그에게 묻고”(막 15:44). 백부장은 그것을 확인했고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십자가 처형을 수행한 백부장은 훈련된 전문가였다. 죽음에 대한 의식 상실로 착각할 위험이 없었다. 빌라도는 요셉에게 거의 무심코 허락을 했지만, 그렇게 빨리 끝날 수 있다는 사실에 여전히 놀랐다.

 

빌라도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진정한 경이의 일부만을 파악했다. 진짜 놀라운 일은 주 예수님이 이미 죽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가 죽은 이유였다. 빌라도가 전혀 알지 못하는 계획표가 있었다. 그것은 시간이 존재하기 전에 제정된 계획표였고, 그 존재에 대한 완전한 무지로 유대인 통치자들, 빌라도, 백부장 모두 그에 따라 움직였다. 가운데 십자가에 있는 사람은 “세상의 창건 이전에 미리 정하여졌으되”(벧전 1:20) 흠없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었고 그분의 희생은 영원 전부터 신성한 계획이었다.

 

빌라도는 신성한 계획표의 경이로움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는 완성된 사역의 경이에 대해서도 똑같이 무지했다. 십자가에 매달린 다른 두 사람은 자신이 저항할 힘이 없는 것을 견뎌야 하는 희생자였다. 그들에게 십자가는 끔찍한 형벌이자 고통스러운 죽음의 잔인한 도구였다. 그러나 구주께서는 십자가를 완료해야 할 일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7:4). 그분이 십자가에 매달리면서 지나가는 순간에 그는 수동적인 고통을 겪지 않았다. 그분은 아버지께서 주셨던 포괄적이고 영원한 일을 적극적으로 수행하고 완벽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분은 그것을 끝냈다. 가운데 십자가는 시대를 따라 울려 퍼지고 영원토록 울려 퍼질 큰 외침을 울렸다. “다 이루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단 6시간 만에 무한하고 영원한 일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이다. 완전하고 개선할 수 없는 완전함으로. 이것은 어떠한 제물이는지. 그분은 어떠한 고통을 견뎌내셨는지. 그분이 지불한 대가. 제물을 바치고 대가를 치르고 일이 끝났으며 고통받을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았으므로 구주께서 돌아가셨다.

 

빌라도는 완전한 종의 순종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빌립보서 2:8절은 주 예수님이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음이라” 라고 말한다. 그것은 구주에게는 우리에게 의미할 수 있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을 의미했다. 그들의 순종이 그들을 죽음으로 이끌었다는 의미에서 죽음에 순종했던 하나님의 종들이 있었다. 우리는 모두 죽음에 순종한다. 휴거를 제외하고 우리 모두는 셰익스피어가 “쓰러진 병사”라고 불렀던 구속(拘束)에 굴복해야 한다. 그러나 오직 구주만이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우리에게 죽음은 비자발적이기 때문에 우리의 순종은 항상 죽음 직전에 멈춰야 한다. 그러나 구주는 달랐다. 그분은 “내게는 그것을 버릴 권능도 있고 그것을 다시 취할 권능도”(요 10:18) 있었다. 빌라도가 궁금해했을 때 그는 생리학의 우연이 아니라 이 세상이 지금까지 볼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순종 행위에 대해 궁금해했다. 그가 놀란 것은 나약함이 아니라 비할 데 없는 힘이었다.

 

빌라도는 그분이 이미 죽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지만 우리는 그분이 어쨌던 죽었다는 것에 놀라한다. 그 죽음의 위대한 사실과 그 엄청난 중요성은 우리를 영원토록 놀라게 하며 경배하게 만들 것이다.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