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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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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모두 안녕하십니까?

다시 이곳을 방문하여 또 낯익은 얼굴을 뵙게 돼서 기쁨으로 생각합니다. 또한 새로 보이는 얼굴들도 기쁘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여기에 방문한 지 벌써 5년이 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제가 2020년에 이곳에 방문할 예정이었으나 그러지 못했습니다. 근데 우리가 다 알다시피 이제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병 때문에 그 모든 계획이 또 이렇게 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 펜데믹이 다 끝나고, 이렇게 다시 한 번 우리가 함께 모일 수 있어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 세 번의 집회에서 저는 데살로니가전서를 다루고자 합니다.

우리는 한 구절 한 구절씩 그것을 다뤄가지는 않을 것이지만, 제가 보고자 하는 것은 이 서신서에 자주 세 가지가 언급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을 그룹으로 묶어서 교제를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먼저 데살로니가전서 1장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2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5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9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우리가 교제를 함에 있어서 또 다른 구절과 다른 부분들의 말씀을 물론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이 세 가지 것을 자주 그룹을 지어서 이해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실 이 성경 전체가 세 개가 연속적으로 나오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신약성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역사 책을 보게 되면 거기에 17개의 역사서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시가서가 있는데 그것은 5개의 시가서입니다. 그리고 예언서가 다시 한 번 17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세 개의 부분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역사서, 시가서 그리고 예언서.

 

또한 신약성경에서도 비슷하게 반복이 됩니다. 우리는 신약성경이 다시 한 번 역사를 다루고 있는 복음서로부터 시작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4개의 복음서와 그리고 사도행전 모두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리고 서신서가 있습니다. 이것은 27개의 서신서가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잘 알다시피 신약성경은 놀라운 예언서인 요한계시록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구약성경에서는 17권의 예언서가 있었는데 신약에서는 단지 하나의 예언서만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마땅히 질문하게 될 것입니다. 왜 구약에서는 그렇게 많은 예언서가 있었는데 신약에서는 단지 하나의 예언서만 있는가? 사실 그것에 대한 답변은 굉장히 간단합니다.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은 이제 앞을 전망하면서 그 사실을 예언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많은 예언들이 신약에 와서 다 성취가 된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특권은 우리가 그 약속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약속이 성취된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에서는 단지 하나의 예언서만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다른 것들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구약의 단 하나의 서신서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21개의 서신서가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우리는 그 구약과 신약의 차이에 대해서 질문하게 됩니다. 이것은 매우 개인적이고 사적인 감정이 서신에 담겨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신약의 시대에 구약의 성도들이 알지 못했던 그런 친밀한 교제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 계시를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사도들이 이 편지를 형제들에게 씁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취의 시대에 살고 있는가 하면 또한 가까운 교제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성경은 세 개가 반복되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그 세 개의 구조를 삼위일체의 하나님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읽었던 1장에서 사도가 먼저 다루고 있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1장 1절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언급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3절에서 하나님 아버지가 또한 나옵니다. 그리고 10절에서 그분의 아들이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6절에 성령님이 나오십니다. 우리가 인도된 교제는 그 위대한 삼위의 하나님의 교제 가운데로 인도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여러 주제가 삼중으로 3이라는 것과 관련돼서 제시된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데살로니가전서에 나오는 그 삼중의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제가 먼저 말씀드리고자 하는 첫 번째 3은 마게도니아의 3이라고 제가 이름을 특별히 붙여보겠습니다.

이제 여기 지도를 하나 보여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지중해 중심부를 보여주고 있는 지도입니다. 그리고 이 지역에서 사도 바울은 여러 전도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지역에서부터 그 전도 여행을 시작하였고 로마에서 마무리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마도 그는 스페인으로까지 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그 사도의 주된 영역은 바로 바다 부분이었습니다. 그 에게해라고 불리는 바다를 둘러싸고 있는 지역에서 사도는 주로 여행을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염소의 바다라는 아주 특이한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알렉산더 대왕이 이 이름을 명명하였습니다. 그는 아주 빠르게 이 제국을 점령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다니엘서 8장에 나와 있습니다. 그 알렉산더 대왕이 그 염소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건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는 이 지역에서 약 7년간에 걸쳐서 전도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가 이러한 전도 여행을 한 것에 대해서 사도행전을 통해서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바다를 둘러싼 주요한 세 지역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마케도니아 지역이 있고 아가야 지역, 그리고 아시아 지역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6장과 17장에서 사도가 마게도니아 지역을 여행한 것을 보게 됩니다. 17장과 18장에서는 아가야 지역을 여행한 것을 봅니다. 그리고 19장과 20장에서 아시아 지역을 여행한 것을 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것입니다.

이 마게도니아 지역은 세 성이 있습니다. 빌립보 데살로니가 그리고 베레아입니다. 그리고 아가야에는 두 성이 있습니다. 고린도와 아테네입니다. 아시아에서는 에베소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전도를 아주 구조적으로 진행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데살로니가를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빌립보와는 꽤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빌립보는 로마 성격이 강한 도시입니다. 우리는 빌립보의 감옥에 갇히고, 로마의 감옥에 갇힌 사도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빌립보에는 적은 수의 유대인만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강가에서 단지 소수의 여인들이 기도처에 있는 것만 보았습니다.

하지만 데살로니가에서는 전혀 다른 성격을 보게 됩니다. 꽤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유대인들의 그런 사회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여기서 회당에 들어가서 그의 전도를 시작하게 됩니다.

빌립보에서는 그 회당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베레아에 와서 회당에 들어갑니다. 마케도니아의 이 세 가지 도시를 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전도 여행에서의 세 가지 3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1절에서 나와 있습니다. 여기 이제 친숙한 이름 세 이름이 나와 있습니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입니다. 이것은 아주 흥미로운 3의 것입니다. 물론 사도는 아주 유명한 그런 인물입니다. 그는 또한 바나바를 대신해서 실루아노를 데리고 이 여행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세 번째 사람으로 젊은 신자인 디모데를 데리고 오게 됩니다. 이 세 사람이 데살로니가 성에 이 복음을 들고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귀한 그 교제의 한 그림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사도 바울은 아주 경험이 많은 사람입니다. 또한 실루아노 역시 그도 예루살렘에서 인도하는 사람들 중에 하나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젊은 디모데는 그 두 명의 나이 든 성도들을 섬기면서 그는 하나님의 원리를 배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게도니아의 3을 보았고, 전도팀의 3을 보았고, 이제는 이제 메시지에 관한 3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5절에 있습니다. 5절에 나와 있듯이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첫 번째로 능력과 두 번째로 성령과 세 번째로 큰 확신으로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로만 너희에게 이르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것은 물론 말이 전달된 것이지만 하지만 그 말 이상의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이 복음이 말로 전달되는 것에 대해서 큰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때때로 이 현대사회에서 복음이 어떤 연극으로 전달되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어떤 오락의 일종처럼 만들어져서 제시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에서는 항상 이 복음이 이 말로서 전달되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 이상의 것이 필요한 것을 보게 됩니다. 이 3명의 전도팀이 가지고 온 복음에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도시에 성령님의 큰 역사를 가져오게 됩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17장을 보게 될 때에 우리는 그 사실을 보게 됩니다. 그 사람들이 전도팀이 가지고 온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 세상이 요동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이 복음이 그 고대의 한 성에 도착했을 때에 일어난 그 놀라운 역사입니다. 우리는 과연 이러한 능력이 어디서 온 것인지 질문해 봐야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삼중에 있어서 두 번째 인물에서부터 이것이 왔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여기서 단지 능력만 아니라 성령으로 되었다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능력은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이 셋 중에서 세 번째 것은 큰 확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이 세 번째 삼 중의 것을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이 확신이 누구의 확신인가? 전하는 사람인가? 받는 사람인가?

이 복음을 듣는 사람이 가졌던 확신인가? 아니면 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가졌던 확신인가? 저는 이것을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전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확신 가운데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그 메시지가 다른 사람에게 큰 확신으로 전달될 수 있습니다. 이 전도팀은 단지 어떤 제안을 하고 ‘이렇게 한번 해보라’고 말할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100% 확신 가운데 이 메시지를 전한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성은 사실 큰 우상을 섬기고 있었던 그런 성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거짓 신 가운데서 그들을 섬기면서 그 가운데 안주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세 명의 전도팀이 왔을 때 그는 무엇이 참된 것인지 실제를 그들에게 제시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2023년에 이 복음을 전할 때에 우리도 동일한 확신을 가지고 전하게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도 계속적으로 거짓된 실체가 아닌 그런 것에 완전히 젖어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불확실한 가운데 살고 있는 사회를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무언가 붙잡을 수 있는 견고한 것, 그런 것이 어디 없나 찾아다니는 그러한 시대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시대에서 우리가 절대적으로 확신 가운데 견고한 사실을 전한다는 것은 놀라운 특권입니다.

 

우리는 그 메시지에 대한 삼중의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한 번 사도행전 17장에서 그 메시지와 관련된 3의 것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거기서 몇 구절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어떻게 이 사람들은 그 큰 확신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 비결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7장 2절에 “바울이 자기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분명히 이 사도는 세 주간보다는 더 많은 기간을 그 도시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하지만 다른 지역으로 가기 전에 그는 항상 그가 하던 규례대로 먼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세 번 3주에 걸쳐서 안식일에 회당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그 복음을 거절하였고 사도는 이방인들에게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2절과 3절에서 사도가 그 세 안식일에 회당에서 전했던 세 개의 것을 찾아보게 됩니다.

첫 번째로 그는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였습니다. 그리고 3절에서는 “뜻을 풀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3절에서는 세 번째 동사가 “증명하고”로 되어 있습니다. 그가 증명한 것은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그리고 다시 부활하신 것, 그리고 바로 그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그분의 신성을 전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가 전한 그 메시지는 성경을 근거로 한 것을 첫 번째로 보게 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 메시지의 중심은 항상 그리스도였던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데살로니가전서 1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성령님께서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힘주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한 메시지가 참으로 그 성의 놀라운 변화를 힘 있게 전달된 것을 생각할 때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복음을 전할 때도 이 세 가지 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항상 성경을 근거로 복음을 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복음이 그리스도로 가득 차기를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복음을 전할 때에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전하는 것을 우리는 의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3절에서 그가 성경의 뜻을 풀었고 또 증명하였다라는 흥미로운 그 동사를 보게 됩니다. 특별히 여기서 이제 “증명하고”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드물게 사용된 헬라어 단어입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여기에 헬라어 단어를 쓰겠습니다.

parativqhmi(파라티데미)라고 읽습니다. 이 헬라어는 두 단어가 결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 파라(para)는 ‘곁에 두다’라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후반부에 있는 티데미(tivqhmi)는 ‘놓다, 두다’라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이 의미를 살펴보게 될 때에 이 문맥과 굉장히 흥미로운 것을 살펴보게 됩니다. 그는 성경을 열었고 이제 어떤 것을 옆에 두었습니다. 유대인의 회당에서 그렇게 하였습니다. 제가 그 유대인의 회당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볼 때 이렇습니다. 그 유대인들의 성경을 열어서 옆에 두는 것입니다. 한쪽에는 구약성경을 두게 됩니다. 그리고 그 구약성경 바로 옆에 이것을 옆에 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어떤 일을 성취하셨습니까? 구약성경에 있는 내용이 그대로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된 것을 보게 될 때에 참으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2023년도에 동일하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열고 그 성경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하나하나 보여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다른 삼중의 것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사역에 있어서 3입니다. 다시 데살로니가전서 2장 말씀을 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사도 바울은 그가 어떻게 전했는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자신이 그리고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설명합니다. 2장 10절에 아주 흥미로운 구절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한 것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가져야 되는 아주 높은 수준의 기준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에 무게를 실어주는 것입니다. 여기에 이 복음과 그리고 그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들의 행동에 있어서 일관성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시대에서도 그랬고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돼야 되는 원리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과 그리고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세 가지 것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거기에 거룩함이 있어야 됩니다. 옳음이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흠 없이 행하는 것이 있어야 됩니다. 이것은 아주 소중한 그런 삶의 삼중의 것입니다. 만약에 어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그 복음의 내용과는 전혀 상반된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그건 복음의 엄청난 해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것은 또한 이러한 방식으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특별히 사도가 거룩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거룩함을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옳음에 대해서 생각하고 말하였을 때, 그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의로움을 언급한 것입니다. 그리고 흠없이라는 말에서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런 상태를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2장에서는 사도 바울은 아주 구체적인 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성에 이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심한 핍박이 있었습니다. 그런 심한 핍박으로 인해서 사도 바울과 그의 전도팀은 갑자기 그 성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사도 바울에 대해서 핍박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그 복음의 대적들은 단지 그 메시지만 공격할 뿐만 아니라 그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을, 사도 바울 자신을 공격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2장 이 부분에서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거짓 송사에 대해서 그는 변호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동일하게 오늘날에도 일어나게 됩니다. 이 복음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어떤 문제점을 찾아내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가 행동을 조심스럽게 행해서 이제 그런 비방들이 참으로 그에게 거짓된 것임을 증명할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그의 삶의 태도에 있어서 그는 어떠한 거짓 송사를 받을 수 없는 그런 행동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2장에서 사도는 자신의 동기에 대해서도 설명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의 동기에 대해서 또한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사도가 데살로니가를 급히 떠난 것을 그는 겁을 먹고 그렇게 떠나게 되었다고 거짓말로 고소했습니다. 그 사도는 거짓말쟁이, 사기꾼이고, 단지 그 거짓말에 속았다고 그들은 말하고 다녔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가 정말로 원했던 것은 너희들의 돈이다라고 그렇게 거짓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거짓말에 대해서 사도는 2장 초반부에 다루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삼중의 것은 분명하게 나타나지는 않아서 우리가 조심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하고자 하는 삼중의 것은 특별히 어떤 단어를 통해서 제시됩니다. 이 원어에서 보면 3번에 걸쳐서 not과 그리고 but이라는 것이 연결돼서 사용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제가 이것을 말씀드리는데요. 이 구절들에 대해서 주의 깊게 보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 것에 1절과 2절을 주의 깊게 보십시오.

우리 말 성경에는 2절 초반부에 “그러나”라는 단어가 없지만 원어에는 but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1절에 “우리가 너희에게 들어감이 헛되지 않았고”가 있고 2절에서 “그러나 너희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

우리는 이 첫 번째에서 그는 겁장이라는 송사를 당하게 됩니다. 바로 이 겁을 먹고 그가 도망가 버렸다고 사람들이 고소했던 것입니다. 자신은 두려움에 그렇게 도망간 사람이 아니라고 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데살로니가 오기 전에 바로 빌립보성에서 우리는 매를 맞고 그런 것을 감내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빌립보에서 어떤 일을 당했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데살로니가에 도착했을 때 여전히 사도의 등에는 빌립보에서 맞았던 그 매의 상처를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빌립보에서도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고 그리고 데살로니가에서도 담대하게 그 복음을 전하였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 삼중에 두 번째 것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3절에 “우리의 권면은 간사에서나 부정에서 난 것도 아니고 궤계에 있는 것도 아니라”가 나옵니다.

그리고 4절에 여기서도 “그러나”가 원어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두 번째로 사도는 “간사하다”라는 송사를 받게 됩니다. 사람들을 어떻게 교묘하게 조작해서 그들을 속게 만들었다라고 사람들이 거짓말로 고소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그것이 완전히 틀린 고소라는 것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삼중의 것을 보겠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그 사도의 동기에 대해서 이렇게 공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5절에 그는 아첨의 말을 쓰지 않았고, 탐심의 탈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6절에 사람에게 영광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7절에 다시 한 번 “그러나”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세 번째로 그가 탐심을 가지고 그렇게 했다는 고소를 이렇게 변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사도가 가졌던 그 동기에 있어서 결백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사람들을 조작해서 자기 편으로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돈을 받으려고 그렇게 가르쳤던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명성을 얻으려고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의 은전에 대해서 그는 전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람들의 영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것이 이 현 시대에서도 복음 전하는 데 있어서 그것을 갉아먹는 그런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전도자는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기 위해서 아주 세상의 이야기들을 이용해서 말을 하게 됩니다. 또한 슬프게도 사람들은 돈을 얻기 위하여 이런 복음을 전하는 것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참으로 이러한 요소들이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큰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강력한 복음전도를 위해서 사도가 가졌던 그 세 가지 고결함에 대해서 동일하게 가질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 또 다른 하나의 삼중의 것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사도 바울의 행동 삼중의 것을 말씀드렸고, 사도 바울의 동기의 삼중의 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번에는 사도 바울이 사용하는 세 가지 비유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세 가지 상징이 사도 바울의 사역을 묘사해 주고 있는 그림입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그림이 하나하나가 이 사도가 어떠한 마음으로 그 복음을 전하였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가 4절에 나와 있습니다.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사도는 이 복음을 맡은 청지기로 자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 복음을 부탁받은 청지기의 특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복음은 물론 그에게 그의 것은 아닙니다. 그가 복음을 만들어낸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복음의 어떤 것을 바꿀 권한이 없습니다. 청지기로서 다른 사람에 속한 것을 자신이 맡아서 관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청지기로서 복음을 맡은 자임을 명심해야 될 것입니다. 이 청지기라는 것은 나중에 그것을 어떻게 했는지를 보고해야 되는 책임을 가지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청지기로서 믿을 만한 것을 강조하게 됩니다.

두 번째 상징은 7절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나니”

유모, 아이를 기르는 어머니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유모라는 것은 다른 사람의 아이를 대신 돌봐주는 그런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녀를 돌보고 있는 어머니의 모성애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어머니 유모에 대해서 말할 때 그의 유순함에 대해서 강조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도를 거짓 고소하는 사람들은 사도가 사람들을 학대했다고 말합니다. 그 사람들을 이용해 먹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들을 조작해서 자기의 편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전혀 반대로 사도는 그 복음을 듣는 사람들을 유모와 같이 대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11절에 세 번째 상징이 나옵니다. 여기서는 아비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구절에서 다른 하나의 또 삼중의 것이 나옵니다. 여러분이 11절에서 보듯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비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였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는 권면하였습니다. 위로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감정을 살펴준 것입니다. 그리고 경계하였습니다. 그것은 그의 권위를 가지고 그들을 경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새로 구원받은 사람을 마치 가정의 일원처럼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돌봄이 필요하고 그래서 그는 유모처럼 행했습니다. 그들은 상담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아비와 같이 그들을 대했습니다.

그래서 이 세 번째 아비의 상징은 그의 사려 깊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복음을 전한 사람의 아주 분명한 그 특징을 우리는 이곳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제 그 복음을 전한 사람을 살펴보았는데요. 이제 그 복음을 받는 사람들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을 또한 삼중의 것으로 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9절에서 아주 놀라운 변화를 살펴보게 됩니다. 이것이 새로운 신자가 갖게 되는 세 가지 중요한 특징입니다. 1장 9절에 그들은 우상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는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복음을 받은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놀랍게 변화되었습니까? 그들이 구원받지 않았을 때 그들의 대부분은 우상을 섬기며 살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완전히 변화된 것입니다.

사도는 이 삼중의 것에서 세 가지 방향으로 그들의 변화를 살펴보게 됩니다. 그는 과거를 보았고 그들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현재를 살펴보게 될 때에 그들은 지금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미래를 보게 될 때에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는 아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일한 것이 바로 이 순간 이 서울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의 우상을 섬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러한 사람들이 완전히 변화되어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단 한 번 그리고 영원한 변화였습니다.

그 인생 가운데 분명하게 변화된 그 시점이 있는 것입니다. 각각 그리스도인들이 언제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그 시간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인생 가운데서 결코 잊을 수 없는 그 어느 한 순간이 과거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의 변화가 이제 그들의 인생의 영원한 순간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 현재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으로 이 삼중의 것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은 미래에 대해서 또한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분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데살로니가의 이제 하나의 새로운 가정이 탄생하였습니다. 그 가정 안에 또한 새로운 교제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가정에 새로운 교제만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아버지가 계십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에 대해서 이 장에서는 강조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1장을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단지 참 하나님을 알았다고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께서 그들의 아버지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과 관련돼서 이 장의 초반부에 있는 구절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장 1절에 그 데살로니가인의 교회가 하나님 아버지 안에 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한국 성경과는 약간 다른데요. “은혜와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너에게 있을지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1장 3절에서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 가지 하나님의 아버지가 나온 앞에 세 가지의 전치사를 살펴보게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은 그 그리스도인들의 위치, 즉 신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원토록 안전한 우리의 신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와 연관되고 이제 그 관계는 결코 영원토록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영원토록 안전할 뿐만 아니라 그 관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부요한 자원이 주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가 “은혜와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너에게 있을지어다”라고 말한 이유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영원토록 견고한 관계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분으로부터 계속되는 자원을 공급받게 됩니다. 그분은 부유하신 아버지로서 그분의 자녀들이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사도는 또한 하나님 앞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모든 인생의 순간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다른 또 다른 삼중의 것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것을 저는 기억의 삼중의 것이라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장 2절과 3절을 보겠습니다.

그래서 1장 2절에서 그는 이것을 기도할 때에 그것을 기억하면서 말을 하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3절에 기억하리니

그래서 3절에서는 이 세 가지 삼중의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가 믿음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사랑의 수고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소망의 인내입니다. 이것은 아주 흥미로운 세계의 것입니다.

사도가 이것을 세 가지 것을 기억하게 될 때에 그것은 그의 마음속에 큰 기쁨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우리는 이 세 가지 것을 각각 살펴보겠습니다.

 

믿음 사랑 소망입니다.

이 믿음이라는 것은 과거를 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밖을 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망은 위를 바라보는 것이고 앞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라는 것은 역사로 특징되어집니다. 그리고 사랑을 행하는 자에게 있어서 수고가 특징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소망을 가지고 있는 자는 인내가 그의 특징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 세 가지 것을 또한 살펴보겠습니다. 왜냐하면 그 역사는 수고를 만들어냅니다. 역사라는 것은 여러 가지 활동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근데 수고라는 것은 여러 가지 힘을 다해 힘이 빠지는 힘을 쓰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단지 섬김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섬김을 위한 희생과 땀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는 이 역사와 수고가 계속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인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참고 견디는 것을 말합니다. 때때로 우리가 어떤 역사를 하게 될 때에 그것은 우리에게 많은 피로를 가져오고 결국 우리는 포기하게 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원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일을 하게 될 때에 그것이 비록 수고스러운 것이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인내 가운데서 참고 견디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요소들이 바로 뒤에 나와 있는 세 가지 덕목으로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일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계속 수고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계속 참고 견디기 위해서는 움직이지 않는 소망이 필요한 것입니다.

 

제가 이제 마치기 전에 이 한 가지 질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참으로 가치가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이 회심하도록 수고하는 것이 가치가 있는 일입니까? 우리가 계속적으로 인내하면서 참고 견디는 것은 어떠한 가치가 있습니까? 이 시간에 어떤 성도님들은 지금 이제 그것을 다 그만두고 싶은 그런 순간에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너무 어려운 것이고 내게 너무 많은 요구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포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제 21세기에는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 너무너무 어려운 일이다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마땅히 기억해야 되는 것은 1세기에도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은 계속해서 그 일을 행해 나갔습니다.

 

다시 한 번 여러분에게 물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참으로 이것을 이렇게 할 가치가 있습니까? 우리가 마치기 전에 잠깐 이제 미래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2장에 나와 있는 다른 하나의 삼중의 것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삼중의 것은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과 그 새로 회심한 자들이 겪게 된 그 어려움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5절에 첫 번째로 유대인들은 주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두 번째로 그들은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사도와 새로 회심한 자들을 쫓아내고 죽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반대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반대는 구약의 선지자들을 죽이는 데서 동일하게 보게 됩니다. 그리고 구주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도 주님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사도를 또한 쫓아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순서를 15절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이 행한 가장 나쁜 것이 첫 번째 언급되어 있습니다. 주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수 세기에 걸쳐서 핍박받는 하나님의 종들의 그 순서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사도는 이제 이 모든 것이 우리 앞에 있는 영광을 향해 가고 있는 것임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2장을 마치기 전에 그는 그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염두에 두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모든 것이 다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행한 모든 희생들이 그때는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19절을 보겠습니다.

이제 우리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에 우리 주 예수 앞에서 이 세 가지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 기쁨, 자랑의 면류관,

참으로 이때는 우리의 모든 고난이 자리를 비켜주고 영원한 영광이 그 자리를 채우게 될 것입니다. 현재의 모든 압박이 이제 그때는 영원한 기쁨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이 새로운 회심자들이 누렸던 그 세 가지 것들이 이제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격려와 또한 소망이 되기를 바라게 됩니다. 이제 주님의 뜻이면 내일 이 시간에는 이 서신서의 뒷부분을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내일 이 시간에 그리스도인의 행동의 세 가지 것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