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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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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모두 안녕하십니까?

북 아일랜드에서 이와 같이 점심식사 후에 오후에 말씀 집회를 할 때 그것을 특별하게 부르는 명칭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무덤의 집회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번 오후 시간에 여기에 아무도 그렇게 조는 분이 없기를 바라게 됩니다. 예 우리가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오전 시간에 아직 마치지 못한 그런 몇 가지 주제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호칭에 대해서 이중적으로 나온 것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충만함에 대해서 또한 이중적으로 나온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서 또 이중적으로 나온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던 것은 그리스도의 머리 되심에 대해서 이중적으로 나온 것을 그때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앞에 살펴본 것과 같이 1장에서 머리 되심이 한 번 나오고 2장에서 또 한 번 나옵니다. 이것에 대해서 간단히 먼저 말씀드리고 나서 그리고 이번 오후 시간에 주제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주제입니다.

우선 1장 18절에 “그는 몸인 교회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지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2장에서는 2개의 구절이 있습니다. 9절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10절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 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이 두 개의 부분에서 주님께서는 두 개의 다른 그룹의 머리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1장에서는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고 했으며, 2장에서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정사와 권세라는 것은 그 천사들의 그룹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두 개의 부분에서 머리라는 것은 또한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1장에서는 어떠한 조직체의 유기적인 조직체의 머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에 대해서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좀 다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2장에서는 사역에 있어서의 머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을 할 때 머리라는 것을 다른 의미로 이렇게 사용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육체에 머리가 있습니다. 이것처럼 이것이 이제 유기적인 머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머리와 몸은 유기적으로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가 이제 학교의 교장을 이렇게 말할 때 그때 학교의 머리라고 말합니다. 또한 회사의 사장을 머리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이 두 가지는 서로 다른 성격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몸의 머리를 말할 때에 머리와 몸은 같은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학교의 머리를 말할 때 그 교장 선생님이 그 모든 학교에 속한 사람들하고 같은 생명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앞에 머리는 유기적인 머리를 말하는 것이고, 두 번째 머리는 어떤 행정에 있어서의 머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천사들을 통치하는 데 있어서의 머리, 하지만 그 천사들과 유기적인 관계에 있어서 머리라는 것은 아닙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을 천사들은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은 바로 우리들이 누리게 됩니다. 교회의 머리로서의 그분은 이제 그 교회의 지체들이 그분의 생명을 함께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것은 역동적인 머리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지시하는 머리의 역할을 또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머리의 생명이 우리의 신체의 각 일부에서 발견되고 사용이 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머리에 지시 사항이 저의 왼손과 오른손에까지 미치게 됩니다. 이러한 관계를 통해서 머리의 지시 사항이 우리 몸의 모든 지체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영적인 곳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 영적인 곳에서는 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그런 것처럼 영적인 몸과 머리의 관계인 주님과 우리의 관계에서도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그런 명령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 머리는 의존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의 지체는 머리에 의존해서 그 지시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마찬가지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우리의 이 땅의 삶에 있어서 모든 명령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라가셨고 모든 정사와 권세가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머리 됨에 있어서 우리는 그분의 탁월한 위치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의 머리는 우리의 몸의 모든 지체보다 위에 있습니다.

우리의 육체에 있어서도 머리는 모든 지체보다 가장 높은 자리에 있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 주님께서도 가장 높은 위치의 탁월한 자리를 차지하고 계십니다. 모든 영적인 존재들이 주님께 복종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에 찾아온 거짓 교사들은 그들이 천사를 숭배해야 된다고 잘못 가르쳤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기 전에 다른 영적인 존재에 있어서 그런 영향을 받은 것을 경험해가지고, 그런 영적인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기 전에 미신적인 그 영적인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는 더 이상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라고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주께서 이제 모든 영적인 존재들보다 가장 높은 위치에 계시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오늘 이 시간 우리가 참으로 감사드리는 것은 여러분과 저의 구주가 이제 온 하늘에 가장 높은 그 자리에 앉아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분보다 더 위에 있는 다른 힘이나 다른 대적이 없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원한 안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일단은 이렇게 우리 주님의 머리 되심에 대해서 두 가지를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제 골로새에 나온 다른 두 가지 쌍으로 나온 것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어제 시간에 두 개로 나온 영적인 특권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또한 영적인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두 가지 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인의 실행과 관련된 두 가지 것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제 3장에 나와 있습니다. 사실 이 3장에 있어서는 세 개의 쌍으로 된 것들이 두 번 반복해서 나오게 됩니다. 1절부터 17절까지에 세 개의 두 쌍이 나옵니다.

이것에 대해서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18절부터 마지막까지 다른 세 가지 종류의 두 개의 쌍이 나옵니다. 18절과 19절에 그 첫 번째 쌍이 아내와 남편에 대해서 말씀하는 겁니다. 그리고 두 번째 그 쌍이 20절과 21절에 자녀들과 아비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22절부터 4장 1절까지 종들과 상전들에 대해서 세 번째 쌍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3장 마지막 부분에 와서 우리는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에 대해서 매일매일 일상적으로 하는 책임을 말씀을 통해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결혼에 대해서 배웠고 가정 생활에 대해서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직장 생활에 대해서도 여기서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이 앞서 배운 그 놀라운 위대한 교리들이 우리의 매일매일 삶에서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질문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이 관련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성경의 교리에 대해서 오해한 것입니다. 내가 믿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매일의 삶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내가 행동하는 것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위대한 성경의 진리를 배우는 것이 우리의 매일의 삶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영향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3장 후반부에 나온 이 두 번째 세 개의 두 개씩 쌍은 더 이상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제가 남은 시간에 3장 앞부분에 나온 세 가지 쌍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선 전체적으로 한번 말씀을 드리고 그 후에 자세하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절부터 5절까지 두 개의 한 쌍을 보게 됩니다. 하나는 위의 것이고 하나는 아래 것입니다. 하나는 하늘에 속한 것이고 하나는 땅에 속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은 이 두 개의 레벨 가운데서 지내게 됩니다. 이것은 세상에 그냥 속한 사람들과는 매우 다른 것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그 한 개가 겨우 땅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냥 보이는 것, 그들이 만질 수 있는 것, 그들의 물질들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의 전부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의 전부는 시간과 그들의 감각에 속한 것이 전부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이제 더 높은 수준의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첫 번째 쌍은 두 개의 다른 나라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늘에 속한 그리고 땅에 속한 나라입니다. 그리고 6절부터 11절까지는 두 개의 성격, 두 개의 인격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9절에서는 옛사람을 말했습니다. 10절에서는 새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대조적인 두 개의 쌍을 말하고 있습니다. 옛 사람과 새 사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두 개의 대조적인 옷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좀 자세히 살펴보면서 벗어버려야 되는 다섯 개의 옷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입어야 되는 다섯 개의 옷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잘 차려 입은 그리스도인을 보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옷장을 하늘에 있는 하늘에서 만든 세련되고 멋진 옷으로 채워야 됩니다.

그래서 첫 번째로 두 개의 나라입니다. 하늘에 속한 것과 땅에 속한 것입니다. 그리고 두 사람입니다. 옛 사람과 새 사람, 그리고 두 옷입니다. 우리가 벗어야 되는 옷과 입어야 되는 옷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자세히 살펴본다면 이것이 얼마나 우리의 매일매일의 삶에 큰 중요한 영향을 주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적용되는 중력이 완전히 반대로 바뀐 상황 가운데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미치고 있는 중력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입니다. 1절에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우리의 집중이 이제 그리스도에게 향하고 우리의 애정이 그리스도에게 향할 때 우리의 초점은 온전히 그분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의 목표입니다.

 

유명한 그리스도인 작가가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때때로 하늘을 쳐다보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사실 하늘에서 계속 살아가고 있으면서 때때로 땅을 잠깐 쳐다보는 사람들이다.”

옛 작가는 때때로 이렇게 마무리를 짓고 하였습니다. “때때로 그런 분들이 예전에 서로 간에 편지를 보낼 때에 계속해서 하늘을 보고 살아갑시다.” 이렇게 하면서 편지를 마쳤습니다.

그런데 이 오래된 작가는 다른 방식으로 그것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밑에를 바라보자. 왜냐하면 우리의 이미 위치가 부활하신 하나님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영광의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 사도 바울의 생애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으며 그의 시야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의 가치 평가 시스템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구원받은 순간 이 세상의 장난감들, 그냥 세상에 보화라고 하는 것들이 전혀 가치가 없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는 구약의 그 동일한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족장은 갈대아에 그 화려한 것을 버렸습니다. 우리가 박물관에 가게 될 때에 우리는 메소포타미아가 얼마나 놀라운 화려한 문명을 자랑하고 있었는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바로 섬세하고 아주 화려한 것을 자랑하는 문화 가운데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것에 등을 돌리고 떠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순례자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가 순례자가 될 수 있었습니까? 그냥 이 세상에 있는 것들 저런 건 그냥 잘못된 거야라고 하고 떠날 수 있겠습니까? 그런 것들이 우리를 순례자로 만들어주지 못합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영광이 그에게 보였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갈대아에 금은 보화를 저건 별거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으로 그를 순례자로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놀라운 영광을 보여주심으로 그를 순례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동일한 그 영광을 보는 것이 사도바울의 생애를 완전히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지금 오늘 우리에게도 “위에 것을 찾으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말씀을 교제하고 찬송을 부르고 이런 것들이 실제 세상과는 별 관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가르치고 전도하는 것이 별로 세상 사람들하고 관련이 없는 거라고 말합니다. 세상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가 이러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참 세상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는데 그 참 세상이 어디 있습니까? 그냥 이 땅에 있는 것이 정말 참 세상입니까? 아니면 하늘에 있는 세상이 정말 참된 세상입니까? 이 두 개의 세상 가운데 어떤 세상이 영원히 있는 세상입니까? 우리가 보고 있는 이 땅에 있는 세상은 그냥 잠깐 지나가는 세상이 아닙니까?

사탄은 이 세상 가운데 그리스도인을 위한 자리는 만들어 놓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이 전혀 존중받지 못하는 그 세상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분의 영광이 이 땅 가운데서는 존중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이 읽혀지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이 세상의 실체입니다.

하지만 저 위에 세상, 그리스도의 영광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세상을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서는 그리스도의 이름이 찬양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세상에서는 그리스도의 권위가 인정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바로 그 세상이 우리가 속한 세상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세상에 우리의 모든 초점이 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가 어제 말씀드린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인류의 지평을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여신 분입니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그 삶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다음에서는 그 하늘에 속한 인생의 비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3절에서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었음이니라.”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밀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을 보고 놀라게 됩니다.

사실상 그리스도인들은 그 자체로 이 세상에 있는 사람에게 참으로 모욕이 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만족과 평안 가운데 살고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은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삶에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지 못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생명의 그 안전이 어디서부터 오는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참으로 우리가 우리의 생명이 어느 누구도 손댈 수 없는 바로 그곳에 그 하늘에 있다는 것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속에 감췄기 때문에 사탄이 그것을 손댈 수 없습니다. 어떤 병에 의해서 그 생명이 손상될 수 없습니다. 암에 걸리는 그런 생명이 아닙니다. 알츠하이머 치매에 걸리는 생명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생명과 저의 생명은 이중적으로 보호되고 있습니다. 이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하나님 속에 감춰져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그 보호로 이중적으로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 소망으로 가득 찬 삶의 빛나는 것을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아직 최고가 오지 않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4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신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의 생명은 더욱 영광으로 빛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에 우리는 그분과 온전히 연합되어 있을 것입니다.

우선 첫 번째로 우리는 하늘에 앉아 있는 그 생명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하늘에 감추어져 있어서 우리의 생명이 안전함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세 번째로 우리의 생명이 놀라운 영광을 소망하고 있는 그 빛나는 것임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로 우리는 이 생명이 거룩함을 유지하는 생명이라는 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갑자기 5절에서 사도는 땅에 있는 문제를 다루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이미 하늘에 있는 것을 다 즐기면서 이제 땅에 있는 것을 처리하는 것입니다. 우선 위에 있는 삶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고, 그리고 이제 땅에서 우리가 하늘에 속한 삶을 살기 때문에 땅에서 이런 것들에 속하지 말아야 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5절에 나와 있는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 이런 것들에 우리가 관련될 수 없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죽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여호수아서에 있는 그 이야기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여호수아 10장에서 다섯 왕이 연합해서 여호수아와 싸우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날 태양은 하늘에서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그 싸움 후에 왕들은 패하여 동굴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하기를 그 숨은 왕들을 끌어내라. 그 왕들을 이제 무릎을 꿇리고 그들을 죽이라고 말합니다. 그 동굴에 숨은 왕들이 이제 기어 나올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안에 있는 죄가 때때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왕들이 동굴로 숨어 있지만 기회를 타서 다시 한 번 나와서 활동하기를 꾸미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악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냥 단순히 그냥 조작하는 것, 그들을 제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죽여야 됩니다. 우리가 더 높은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땅에 속한 그 왕들을 죽일 수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셔서 우리가 참으로 이 땅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을 계속 우리가 기억하도록 하시길 원합니다. 이 땅은 우리가 잠시 걸어가고 있는 여정이며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바로 우리가 속한 하늘인 것입니다. 나그네와 외국인으로서 우리의 본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위험에 둘러싸여 있어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 완전히 깨어 있어야 됩니다.

 

이제 두 인물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제 하늘과 땅에 속한 나라에 대해서가 아니라 이것은 옛사람과 새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9절에서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그리고 10절에서 “새 사람을 입었으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이 두 인물에 대한 이중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 이 옛 사람을 벗어버렸습니까? 우리가 언제 이 새 사람을 입었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회심할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옛 사람은 무엇입니까? 새 사람은 또한 무엇입니까?

이것은 성경을 배우는 사람에게 여러 가지 의문이 들게 하는 표현입니다. 제가 이 오후 시간에 너무 기술적으로 말씀드리진 않겠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옛 사람과 옛 성품은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옛 성품을 벗어버릴 수는 없습니다. 이 죄라는 것은 여전히 우리 가운데 있으며 그것에 대해서 성경은 육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오시기까지 그 옛 성품을 가지고 있을 것이지만 우리는 옛 사람을 벗어버린 것입니다.

이 옛 사람이라는 것은 내가 구원받기 전에 있었던 바로 나 자신이었습니다. 내가 아담에 속해 있기 때문에 나는 바로 그 옛 사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구원받을 때에 나는 더 이상 이 옛 사람과의 관계는 끝났다, 나는 더 이상 그 옛 사람을 원하지 않는다라고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로마서 6장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이 옛 사람은 이제 완전히 끝났다라고 이  x표 친 것이랑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아담 안에 가지고 있었던 나의 사람은 더 이상 미래가 없는 것으로 종결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우리는 새 사람을 받았습니다. 새 사람은 또한 무엇입니까? 이 새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새롭게 가지게 된 나 자신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새로운 정체성을 받은 것입니다.

이 새 사람에 대해서 10절에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쫓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새 사람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고 있습니다. 마치 옛 사람이 아담을 본받고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구원받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나 자신은 아담을 본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회심 후에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나 자신이 된 것입니다.

 

요즘 세상에는 어떤 이미지가 전부라고 말합니다. 아마도 사진기 회사인 캐논에서 광고 문구로 그렇게 사용했던 것입니다. 저도 그 이미지가 전부라는 광고 문구에 동의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잘 나타내 보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괜찮은 옷을 입고 다니는 것입니다. 멋진 가방을 또 들고 다닙니다. 그리고 멋진 차를 운전하고 다니길 원합니다. 나타내 보이는 이미지가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멋진 이미지를 보여주고 싶어합니다. 아주 좋아 보이는 이미지를 보여주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도 이미지가 전부라고 생각하십니다.

아담을 만드실 때 하나님은 자기의 이미지로 자기의 형상대로 아담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그 만드신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형상이 아담을 통해서 그 창조물 가운데 나타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에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가능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그 특권을 놓쳐버린 것입니다.

오직 아담만이 그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낼 수 있었는데 악어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그 이미지가 침팬지를 통해서 나타내 보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미지가 나무에서 나타내 보일 수 없습니다. 오직 아담만이 하나님의 이미지를 온전히 나타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죄로 말미암아 그 형상이 손상되고 망가져 버린 것입니다. 아주 슬프게도 다 희석돼 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이 완전히 그런 이미지가 다 없어져 버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 타락해 버린 사람이 그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에게서 희미하게나마 하나님의 이미지에 그 모서리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을 때 그 아들에 대해서 성경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제가 말씀드린 것을 잘 따라오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형상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사람하고 다른 것이 그 형상을 따라 만들어지신 분이 아닙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하나님의 형상 자체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은 그 이미지를 아담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 죄로 말미암아 타락해 있는 사람을 구원하셔서 이제 하나님이 처음에 의도하셨던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나타내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지금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들을 통해서 사람들 가운데 아들의 형상이 나타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 삶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우리의 매일의 삶에 있어서 이런 질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에 대해서 한번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간단한 질문입니다. 내가 하려고 하는 이 행동, 내가 하고자 하는 이 말이 이것은 아담을 나타내는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인가? 내가 하려고 하는 이 방식이 옛 사람을 나타내는 것인가? 아니면 세 사람을 나타내는 것인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옛 사람의 그 행동과 말과 방식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분명한 목적은 그 옛사람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로 하여금 오직 그리스도만이 나타내 보여주기를 바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가 삶에서 여러 가지 경험들을 하도록 허락하시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시험과 여러 가지 어려움과 고난들을 통과하게 하십니다. 그러한 이유는 그런 것 외에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닮은 모습을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떤 한 유명한 조각가에 대한 이야기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어느 한 날은 어떤 것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아주 큰 대리석 조각을 놓고 이제 조각을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러 찾아온 사람은 ‘당신은 무엇을 만들려고 하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 대리석으로 말을 만들어 달라는 의뢰를 받았습니다. 그것을 보러 찾아온 사람은 완전히 놀라게 되었습니다.

그냥 커다란 대리석 덩어리인 것을 가지고 어떻게 여기서 말을 조각할 수 있습니까? 이건 전혀 말 같아 보이지 않는 그냥 대리석 조각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 조각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간단합니다. 저는 저의 망치를 들고 저의 이 끌을 가지고 말 같지 않은 것은 단지 떼어낼 뿐입니다. 말이 아닌 것을 떼어내다 보면 결국에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똑같이 이렇게 하나님께 질문하게 됩니다. 어떻게 완전히 아담처럼 보이는 이 진흙 덩어리를 가지고 어떻게 그리스도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망치와 끌을 들고 그리스도가 아닌 것들을 떼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작업이 끝났을 때에 우리는 완전히 그리스도를 닮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저에게 있어서 굉장히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그분의 아들을 기뻐하십니다. 수억 년 전에도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참으로 이 아들 너를 기뻐한다. 나는 이 온 하늘을 너와 닮은 자들로 꽉 채우겠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세월 동안 이 인류 가운데 모든 나라 가운데서 그리스도와 닮은 자를 찾아보셨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이 땅 가운데서 유일하게 하나님께 기뻐하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제 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수많은 그리스도를 닮은 이들을 만드시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마지막 이렇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사람으로서 이제 새로운 나라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나라에 입장하기 위해서 잘 차려입어야 됩니다. 새로운 사람으로서 새로운 나라에 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옷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래된 옷장에 있는 낡은 옷들은 다 갖다 버리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옛 사람에 속한 그 다른 세상에 속한 그 낡은 누더기들은 다 갖다 버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아주 아름다운 옷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것은 새로운 나라에 속하는 옷입니다. 새로운 사람에게 합당한 옷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옷을 입으라라고 하시는 거기에 아주 유명한 디자이너의 서명이 적혀 있는 것입니다. 참고로 하늘의 공장에서 만들어진 옷입니다.

거기에 버려야 되는 다섯 개의 누더기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입어야 되는 다섯 개의 옷이 8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8절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해방과 너희 입에 부끄러운 말이라.”

그리고 12절에 아름다운 옷에 대해서 다섯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시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그리고 여러분은 이 구절을 읽으면서 이제 명백하게 이것이 우리의 성격, 우리의 태도를 말하고 있다는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어떤 태도들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합당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태도들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합당한 것이 있습니다.

8절에 나온 다섯 가지 누더기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분과 악의와 이것이 급한 성격의 그런 태도들입니다. 그리고 해방과 너 입에 부끄러운 말이라 이것은 입으로 하는 그런 죄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급한 성격이 합당하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이 분(憤)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 계속 부글부글 속에서 끓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분은 진노로 끓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악의는 다른 사람에 대한 악의로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는 이렇게 나타내어지는 성격에 대해서 주의해야 됩니다.

 

제가 한국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마는 제가 있는 고향인 북아일랜드에서는 이런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 문제인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상처를 입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쉽게 다른 사람에 대해서 불평을 가지게 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불만을 수년 동안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매년 그 다음의 생일을 맞는 것처럼 그것을 몇 년 동안 계속 간직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 대한 분노는 10년간 묵은 분노가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분노가 자기 자신에게 도구로서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이제 그것이 결국은 못 참고 터져 나올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서 그 사람과의 관계가 결국은 끝나고, 이런 것들은 옛 나라에 속한 것이고 옛 사람에게 속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과 달리 이제 아름다운 다섯 가지 옷을 우리에게 입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긍휼과 자비가 있습니다. 참으로 이 자비라는 것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 돌보는 그런 친절을 말하고 있습니다. 겸손과 온유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려 깊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온유라는 것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 주의 깊게 행동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래 참음은 내 자신을 통제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셔서 우리의 성격에서 우리의 입술에서 우리가 합당하게 그리스도를 닮은 자로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번 시간에 말한 것을 요약해서 이렇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닮은 성격을 입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이번 말씀 집회에서 참으로 그리스도께서 전부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실상 저는 3장 11절에 이 말씀을 말한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우리는 이 구절 앞부분에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헬례당이나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다”는 말씀을 봅니다. 이것은 옛 세상에서는 중요한 차이입니다. 헬라인과 유대인은 인종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종이나 자유자는 사회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할례당이나 무할례당이나 종교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은 외부의 그 옛 세상에서는 이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말하기를 이 새로운 세상 가운데서는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을 만날 때 그가 유대인인지 헬라인지 물어보지 않습니다. 그가 노예인지 자유인인지 물어보지 않습니다. 그가 할레당인지 무할례당인지도 물어보지 않습니다. 그 옛 세상에 속한 모든 것들은 이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 새로운 세상에서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전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의 전부이시고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 안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리스도인을 만날 때 그래서 우리는 당신이 어느 집에서 살고 있는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가 어떤 차를 운전하고 있는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밖의 세상에서는 중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그리스도께서 나타내 보여주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친애하는 성도님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소유한 자입니다. 그리스도를 넘는 다른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 뒤에 다른 어떤 것이 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보다 더 나은 것이 있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 옆에도 다른 어떤 것이 있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것입니다.

골로새 성도들은 거짓 교사들에게 나는 어떤 것이 더 필요하다라고 속임과 미혹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의 지혜가 필요하다라고 속삭임을 당했습니다. 유대인들의 행위가 필요하다라고 거짓으로 가르쳤습니다. 천사 숭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사도는 그 모든 것이 다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고 그리스도께서 만유시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도 사람들은 때때로 무엇이 내가 아주 놀라운 그리스도인이 되게 할까 이렇게 자꾸 찾아다닙니다.

그들은 이 그리스도교를 아주 새로운 엔진을 달고 날아가는 것을 꿈꿉니다. 뭔가 다른 것을 통해서 더 높은 인생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른 어떤 곳으로 그 이상의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고 그것보다 더 높은 위치는 없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것에다 더해야 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충분하십니다. 우리가 매일매일 더욱 이 그리스도를 온전히 누리게 하시기를 하나님께서 바라십니다.

 

제가 이제 마치기 전에 한 가지 말씀을 더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윌리암 랜돌프 허스라는 유명한 미국인이 있습니다. 그는 아주 부유한 신문 편집장이었습니다. 그는 아주 수많은 재산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유명한 미술 작품들, 유명한 조각품들을 모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세상을 여행하고 다니면서 아주 진귀한 미술 작품들을 많이 모으게 되었습니다. 또 그 미술품과 조각품들을 캘리포니아에 있는 창고에 저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사람은 어떤 한 책을 보면서 아주 진귀한 작품이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는 그것을 알고 나서는 내가 이 조각품을 얻기 전까지는 참을 수 없다. 이것이 내 조각품을 리스트를 완성할 것이다. 그는 이제 다른 사람들을 초청해서 그것을 구하기 위해서 일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에게 이 조각품을 말해주고, 이제 거기 가서 그것을 찾아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얼마가 들든지 간에 값을 지불할 테니 꼭 그것을 찾아가지고 오라고 합니다. 내 소장품들은 그 작품이 오기 전까지는 완성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을 보내서 6개월 동안 그것을 찾게 합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캘리포니아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찾으러 보낸 사람이 돌아오기 전에 윌리엄 허스라는 사람에게 이렇게 리포트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제가 당신의 그 소장품 창고를 한번 찾아보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창고에 와서 세 개의 큰 박스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아직 열어본 적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어보았을 때, 첫 번째는 아무것도 없었으며 두 번째도 아니었습니다. 세 번째 박스를 열어보았을 때, 그가 계속적으로 찾고 있었던 그 작품이 거기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허스씨는 이미 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찾고 있었지만, 그게 이미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친애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뭔가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서 다른 세상을 찾아다니면서 둘러볼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북 아일랜드에 올 필요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고, 그리스도께서 전부인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