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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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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 4장 13절부터 18절까지 읽도록 하겠습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지인데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고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쫓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우리가 이후에 다시 5장을 읽겠습니다마는 일단 4장 말씀을 먼저 읽어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우리가 그동안 살펴왔던 데살로니가전서에 나타나 있는 삼중의 것에 대해서 이제 마무리를 짓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함께 살펴봄에 있어서 이 서신서에 대해서 여러분들께서 새로운 관점으로 이 서신서를 보게 되었기를 바라게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게 될 때에 이 세 가지 것이 나오는 것을 함께 살펴보면 아주 흥미로운 점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면에서 세 개씩 묶어가지고 생각하도록 그렇게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맨 처음에 있는 그 세 가지의 삼중의 것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창조에 대해서 생각해 볼 때도 다시 한 번 3에 대해서 여러 번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시간과 공간과 물질 이 세 가지가 있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또한 세 가지 것으로 또 나눠집니다. 우리가 시간에 대해서 생각해 볼 때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나눠집니다. 그리고 공간에 대해서 생각해 볼 때도 높이와 그리고 거리와 또 폭이 나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질에 대해서 생각하게 될 때도 고체가 있고 액체가 있고 또한 기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창조물 가운데에 계속해서 3이라는 그 도장을 찍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심지어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볼 때에도 우리의 이 인류, 즉 사람에 대해서 생각해볼 때도 여기에 3이라는 것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사람을 이루는 중요한 것으로 세 가지 것을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실제로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에 영과 혼과 몸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종에 대해서 생각해 볼 때도 여기에 또 3이라는 숫자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노아의 세 아들의 후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느 사람들이든지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이들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3이라는 숫자는 어디에나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한 우리의 언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언어에서 이제 성을 가지고 있는 단어들을 남성, 여성, 또한 중성형 단어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영어에서는 이제 그 또는 그녀 그리고 이들 이렇게 대명사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인생을 살펴보게 될 때에 또한 그 가운데서 많은 3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다소 성의 사울을 세 번 부르신 것을 보게 됩니다. 9장과 22장과 그리고 26장에서 그의 회심 사건이 세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구원받은 후에 3일 동안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리비아에서 3년간을 지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첫째 날에 그가 데살로니가에 있는 회당에 들어갔을 때에 세 안식일에 가르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에베소 성에서는 그가 회당에서 석 달을 가르친 것을 보게 됩니다. 또한 그가 기록하기를 에베소에 3년간 거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서신서에서 또한 자신이 세 번 매를 맞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11장에서 그는 세 번 파선을 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다른 부분에서는 그가 셋째 하늘에 올라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육체의 가시에 대해서 세 번 간구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또한 그는 세 가지 덕목을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을 말하고 있고,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의 그 인생을 돌아보게 될 때에 우리는 이 의미가 있는 3이라는 숫자를 계속해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기록한 이 서신서를 보게 될 때에 이제 여러 곳에서 3이라는 도장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서는 아주 주의 깊게 구조적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냥 여러 가지 생각을 무작위로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데살로니가전서를 볼 때에 그 구조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 서신서의 면면에 흐르고 있는 분명한 구조적인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우리가 이 서신서에 어느 장에 어느 한 구절을 취해서 그것만을 생각하고, 또 다른 장에 어떤 한 구절만 취해가지고 그것만을 생각한다면, 이 장이 전체적으로 말하고 있는 그 그림을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데살로니가전서에서 흐르고 있는 그 주요 흐름을 우리는 잘 좇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 서신서의 1장에서 그는 데살로니가에 어떻게 들어왔는지에 대해서 먼저 말하겠습니다.

그리고 1장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그가 그 성에 들어온 결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몇몇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2장 초반부에서는 그가 데살로니가 성에 있었을 때 어떻게 행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장 후반부에서는 그가 갑작스럽게 거기를 떠나야만 했던 이유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3장 초반부에서는 그가 그렇게 떠난 후에 이제 다시 그 회심자들을 어떻게 돕고 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처럼 이메일을 보낼 수도 없었고 문자를 보낼 수도 없어서 디모데를 대신 보낸 것입니다. 그리고 3장 후반부에서는 디모데가 돌아왔을 때 어땠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장, 2장, 3장은 시간적으로 아주 주의 깊게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처음부터 그들과 어떠한 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그리고 지금 현재 어떻게 되었는지까지 기록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4장과 5장에서는 상당한 변화가 나타납니다. 이제 여기서부터는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미래와 관련돼서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간증을 보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내용이 오늘 밤 여러분과 함께 교제하고자 하는 첫 번째 삼중의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4장과 5장 초반부에 걸쳐서 사도는 세 가지 주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주제가 삼중으로 먼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은 각각의 단어로 분명하게 내용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9절에서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13절에서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5장 1절에서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도는 이 세 가지 영역에 대해 특정해서 말해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 가지 주제가 서로 굉장히 다른 주제라는 것을 먼저 보게 됩니다.

4장 9절에 나온 첫 번째 주제인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다”라고 사도는 말합니다. 5장 1절의 세 번째 주제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다.”

이 두 가지 주제에 대해서는 사도는 그들이 데살로니가인들이 이미 잘 알고 있다라고 말하며 시작합니다. 하지만 두 번째 주제에 대해서는 다른 접근을 하고 있습니다.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주제에 대해서는 데살로니가인들이 잘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첫 번째와 세 번째와 관련해서는 그들에게 다시 한 번 상기시키는 정도로 말했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주제에 대해서는 그들이 전해 듣지 못한 그 계시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말씀 집회에서 우리가 이미 배웠던 것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상기될 필요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때는 말씀 집회에서 또 새로운 것에 대해서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을 배울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나온 삼중의 것은 사도가 다루고자 하는 그 주제와 관련된 삼중의 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4장과 5장에서 두 번째 나오는 삼중의 것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사도는 여기서 아직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 특별한 용어를 사용해서 그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4장 5절에 그 용어에 대해 첫 번째가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 그들은 무지함과 어둠 가운데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12절에 외인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13절에 소망 없는 일, 소망 없는 다른 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세 가지 표현을 합쳐서 생각해보게 될 때에 세상에 있는 아직 구원받지 않은 자들의 특징을 우리에게 보여주게 됩니다.

첫 번째로 그들이 어둠 가운데 있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개인적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들이 멀리 떠나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외인이라 밖에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그들이 절망 가운데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미래에 대해서 어떠한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생각해 보게 될 때에 우리 자신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셨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이 세 가지 표현은 우리가 과거에 어떠한 존재였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애 가운데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많은 지식을 자랑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참으로 인터넷에 정보의 홍수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런 많은 지식들이 오히려 사람들을 압박하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시대에 살고 있는 이 서울에 수많은 사람들이 아직 하나님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단지 그냥 하나님이 계시다 이 정도의 지식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안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을 그 지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서신서에서 앞에 언급한 대로 하나님에 대해서 자주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 서신서에서 14번에 걸쳐서 그리스도인들을 형제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분의 가정 안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참으로 하나님과 그와 같은 관계로 부르신 은혜를 우리는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도 또한 예전에는 외인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서로 잘 모르는 그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도가 말하고 있는 대로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가깝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날 밤 우리가 그 영적인 특권 안에 있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표현도 우리가 예전에 그랬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전에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고, 그리고 어떠한 소망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항상 그들이 애굽에서 종사하던 때를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그들이 어땠는지를 살펴볼 때에 그들은 지금 누리고 있는 그 특권에 대해서 감사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세 번째 삼중의 것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세 번째 삼중의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는 자들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게 됩니다. 4장에서 세 번에 걸쳐서 그 죽은 자들에 대해서 잔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3절에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그리고 두 번째로 14절에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그리고 세 번째로 15절에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세 번에 걸쳐서 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이 부분을 읽을 때 기억해야 되는 것이 이 죽음이라는 것이 그 성도들에게 슬픔을 가져다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 서신서는 사도가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한 후에 이제 몇 개월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기록된 서신서입니다. 하지만 그 몇 달이라는 그 짧은 시간 안에 어떤 성도가 죽는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그들은 말하자면 적절한 시간에 복음을 들은 것이 아닙니까? 만약에 사도가 1년 뒤에 그 성을 방문했다면 그 죽은 성도들은 이제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을 운명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이제 구주를 믿고 구원받았을 때 얼마나 다른 운명이 되었습니까?

그래서 신약 성경에서는 “잔다”하고 죽음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이것은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16절에는 죽음이라는 것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분명히 잔다라는 것은 죽음이라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몸이 자고 있을 때에 그 일상의 피곤함에서 쉬고 있는 것처럼, 이제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렇게 자고 있는 것입니다.

잔다는 것은 육체적인 행동입니다. 몸이 자는 거고 영원히 자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죽었을 때 그들의 영혼은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본향에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이단들은 그 영혼이 잔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바가 아닙니다.

스데반이 이제 맨 처음으로 죽었을 때에, 스데반이 그를 핍박하는 자들로부터 돌에 맞아 죽게 되었을 때, 성경은 그가 자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스데반이 그렇게 잔다라고 기록되기 전에, 그는 그 직전에 주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몸은 비록 그 돌로 덮여서 자고 있지만 그의 영혼은 이제 주님께로 날아간 것입니다. 스데반의 몸은 고난 가운데 눕게 되었지만 그의 영혼은 이제 영광으로 올라갔던 것입니다.

이 초기에 성도들의 죽음은 분명히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큰 슬픔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도 역시 우리의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소천하게 될 때에 많은 슬픔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슬퍼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소망 없는 다른 이들과 같이 슬퍼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별로 말미암은 슬픔과 고통은 이제 다시 하늘에서 만날 그 영광스러운 날을 고대하게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이 먼저 죽은 성도들에게 어떤 일이 있을지 궁금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영광 가운데 오실 때에 그 성도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사도는 이제 그것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그 죽은 성도들은 우리 주님께서 영광 가운데 오시는 그 순간을 놓치는 것이 아니다. 그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는 자들이 그들이 제쳐지거나 그것을 놓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먼저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 당시에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그것을 알지 못해서 이제 혼란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또한 우리의 그리스도인 친구가 죽을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를 종종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그들은 어디 있는 것인가? 그리고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들은 의식이 있는 걸까?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알고 있을까? 어떤 질문에 대해서는 우리도 역시 정확하게 알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하게 알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영혼이 우리 주님 앞에서 지식을 가지고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그 앞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무덤 안에 있을지라도 우리의 영혼은 영광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이 죽음을 잔다라고 표현하는 비유 안에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 제가 먼저 이것은 비유다라고 말씀을 드렸고, 그리고 두 번째로 이것은 육체적인 것이다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이것은 임시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잔다고 할 때는 항상 깨어날 것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밤에 침대에 들어가지만 이제 아침에 일어날 것을 예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소천할 때 우리가 갖게 되는 마땅한 생각입니다. 그 부활에 그 구름이 없는 밝은 아침을 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슬픔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사도는 이것을 써서 위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 이 가운데 여러분의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소천하여 슬픔 가운데 있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차별은 이제 곧 영광스러운 재회로 바뀌어질 것을 우리는 확신 가운데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제 사도는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정확하게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설명은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줍니다. 사도는 이 사건이 일어나는 순서를 삼중적으로 이렇게 설명하게 됩니다.

그 일어나는 사건의 순서에 관한 삼중의 것은 16절과 17절에 나와 있습니다. 첫 번째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두 번째로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그리고 세 번째로 이 위대한 사건의 정점으로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을 통해서 이러한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주님의 다시 오심을 전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16절에 주께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신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 자신이 오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께서 직접 그리스도인들을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요한복음 14장에서 우리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다시 모으실 때는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십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신부를 부를 때에는 그분 자신이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이 놀라운 어떤 사건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것은 우리의 그 사랑이 담긴 그 애정으로 기다리고 있는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에 대해서 이 부분에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15절에서 주 강림하실 때, 그리고 14절에서는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 그리고 16절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주님, 예수, 또한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1장에서 그들이 우상을 버리고 우상을 버리고 이제 그들이 하고 있는 것이 그의 아들을 기다린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우리의 구주를 공중에서 만날 것은 참으로 놀라운 복스러운 소망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다시 오실 때에 이제 정해진 대로 그 순서대로 이 사건들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첫 번째 일어나는 것이 부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는 자들이 먼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휴거가 일어납니다. 살아 남아 있는 자들이 변화되고 부활한 죽은 자들이 함께 끌어올려 공중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이제 그 모두가 주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류의 역사상 가장 큰 그런 대피가 되는 것입니다. 순식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이 세상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이 세상을 대피하게 되었을 때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 죄악된 세상을 심판하기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관련해서도 참으로 사실인 그런 일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 사람들은 우리는 그리스도를 원치 않는다라고 분명하게 거절했었습니다. 그분을 거절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다시 살리시고 하늘로 올리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동일한 일이 이제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세상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교를 원치 않는다고 분명하게 거절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원치 않는다라고 했던 것과 동일하게 똑같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그리스도인을 위한 공간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을 원치 않는다고 했을 때 이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살아있는 자뿐만 아니라 죽은 자들이 다 갑자기 하늘로 들려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제 2천년 전에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대하셨던 것처럼 이제 지금 이 순간에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세상이 거절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늘로 데리고 가셨을 때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없는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또한 이 부분에서 우리를 공중으로 데려가실 때에 하나님께서 어떤 신호를 보내시는지를 또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삼중적으로 이렇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16절에 첫 번째로 호령과 두 번째로 천사장의 소리, 세 번째로 하나님의 나팔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 약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3개의 다른 신호가 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호령이 있고 천사장의 소리가 있고 하나님의 나팔이 있다.’ 어떤 성경학자는 ‘이것은 하나의 신호인데 이제 세 가지 관점에서 기록을 한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떤 형태로든지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분명하게 큰 호령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표현이 각각 다른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리 주님께서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너라” 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죽은 자들을 불러내실 수 있는 그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호령이라는 것은 그 헬라어 단어가 군사적인 용어로서 그 장군이 명령하는 그런 소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권위를 말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 사망의 권세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감사하는 것은 부활하신 우리 주님께서는 그 사망의 권세를 이기는 더 큰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큰 호령을 내실 때에 사망은 그 앞에서 복종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부분에 왜 천사장의 소리가 있는지를 궁금하게 됩니다. 제가 이것을 단정적으로 이렇게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마는 우리는 천사장 미가엘과 관련돼서 유다서에 기록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기록이 여기에 나와 있는 천사장의 소리와 관련돼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유다서에서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변론한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그 마귀가 사망의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부분에서 성도들도 그 죽음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의 몸이 이제 무덤 안에 장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마귀는 예전에 그런 것처럼 그 몸에 대해서 또한 변론하고자 합니다. 모세의 시체에 대해서 마귀가 변론한 것처럼 이제 그리스도인의 몸에 대해서 마귀가 변론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는 무덤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그 몸을 자신의 재산인 양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천사장의 소리가 그 변론의 결론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귀가 예전에 천사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타락한 천사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 모든 천사의 장인 천사장의 소리로 그의 변론을 마무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마귀는 더 이상 그 몸에 대해서 주장하지 못하게 됩니다. 천사장의 권위 앞에 엎드러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 주님께서 호령하실 때에 모든 몸이 무덤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세상이 보지 못했던 영광스러운 날이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영광 가운데 오십니다. 이제 무덤에서 죽은 자들이 일어나고 그리고 이 땅 가운데 있는 신자들이 변화됩니다. 그리고 그 부활한 자들과 변화된 자들이 모두 하늘로 들려 올려가는 것입니다. 수많은 죽은 자들이 그 무덤의 권세를 깨고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살아있는 자들이 그 중력의 힘을 깨고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위대한 모임이 되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모임입니다. 이 시대 가운데 가장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그 모임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궁극적인 승리를 말하는 모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점점 쇠퇴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점점 이 기독교계와 진실된 그리스도인들이 사라져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교회의 시대가 완전히 실패로 끝나고 말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모든 것이 점점 하강하고 있고 모든 것이 점점 쇠퇴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친애하는 여러분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이 교회의 시대는 실패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 교회의 시대는 놀라운 승리로 끝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향하고 있지만 결국에는 그 수많은 사람들이 올라가는 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때는 수많은 성도들이 모이는 집회이므로 어떠한 건축물도 그들을 다 담을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 주의 호령이 있었고 또한 천사장의 소리가 있었으며 또한 하나님의 나팔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호령에 대해서는 권위를 강조하는 표현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천사장의 소리는 그들을 다 모으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이라고 말씀을 드립니다. 그 위대한 모임이 공중에서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마귀가 공중의 권세 잡은 자라고 기록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참으로 그 마귀가 통치하고 있는 바로 그 영역에 그리고 마귀가 자신의 수많은 귀신들을 활동시키고 있는 그 영역에 이제 주님께서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바로 그 자리에 모이게 하시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가장 높은 권위를 말씀을 드렸고 그리고 놀라운 모임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여기 세 번째로 하나님의 나팔이 있습니다. 이것은 다시 한 번 군대 용어입니다. 그 군대 사령관이 이 나팔을 통해서 신호를 보내는 것입니다. 그 나팔 소리는 모든 군대가 움직이도록 하는 신호입니다. 단지 그 자리에서 일어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그들이 움직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고대 로마의 군대는 그

군대 사령관을 통해서 세 가지 종류의 신호를 보냈습니다. 첫 번째 나팔 소리는 자고 있는 군인들을 깨우는 소리였습니다. 이제 그들이 밤이 되어서 잠자리에 들고 밤 동안 자고 있는 군인들을 이제 그 나팔 소리로 깨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두 번째 나팔 소리는 그들이 이제 그 넓은 공간에 모이도록 하는 신호를 보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세 번째 나팔 신호에 맞춰 그 모인 군대가 전진하게 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신호는 깨우는 것이고 두 번째 신호는 그들을 모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마지막 신호는 그들이 전진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이 위대한 순간에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 부르실 때에 죽은 자들이 깨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죽은 자들과 살아 있던 자들이 모두 모이게 됩니다. 그리고 전진하는 신호에 맞춰서 그들은 이제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것은 놀라운 날이 될 것입니다. 모든 눈물이 마르게 됩니다. 모든 슬픔이 이제 끝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고통이 이제 마치게 됩니다. 여기에 더 이상 이별이나 그런 슬픈 순간을 경험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이 이제 우리를 영원토록 환영하게 됩니다. 하늘에서는 이제 작별 인사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이 위대한 순간이 오면 이제 더 이상 우리는 헤어질 필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위대한 순간에 빛에 비추어서 이 땅의 인생을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5장의 내용입니다.

 

5장에서 사도는 그 휴거의 사건 이후에 무엇이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2개의 표현이 나옵니다. 4장 15절에서는 주의 강림하심을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5장 2절에서는 주의 날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 강림하실 때 4장에 나온 이 표현은 그분이 신랑으로 오실 때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분께서는 그분의 신부를 영원한 기쁨 가운데로 데리고 가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5장 2절에 주의 날에서 여기서는 주님께서 도적으로 오신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쁨의 날이 아니라 심판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3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이 세상을 심판하는 날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위대한 사건에 비추어서 우리의 지금의 삶이 어떠해야 되는지를 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삼중의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근신의 삼중이라고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6절과 7절과 8절에 걸쳐서 근신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그리고 두 번째로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 그리고 8절에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승배를 붙이고”, 우리는 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그 사건을 염두에 두면서 근신하면서 사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성경은 단지 우리의 호기심을 만족하기 위해서 미래에 어떤 일이 있을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일을 통해서 우리의 행동이 어때 해야 되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빛에 비추어서 지금 이 시대를 근신하면서 그리고 진지하게 살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어떤 생각 없이 그냥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고 있는 시대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육체가 원하는 대로 그냥 그 정욕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공을 위해서 그들의 정신을 잃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좋아하는 스포츠를 아주 정신을 놓고 쫓아가고 있습니다. 이 사회는 참으로 근신하며 생각하는 것이 결여된 사회입니다. 이 영적으로 전혀 무감각한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우리는 근신하면서 살 것을 말씀이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우리는 주님께서 열 처녀 비유를 말씀하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깨어 있고, 다섯 처녀는 자게 되었습니다.

우리 자신들도 부주의하게 그냥 영적으로 무감각하게 지내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냥 자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깨어 있어야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냥 깨어 있는 정도가 아니라 경계하고 있어야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깨어 있긴 하지만 자고 있는지 깨어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주의하면서 감시 가운데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지금 적색 경보가 내려진 상태에 있는 것처럼 행동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지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사실상 모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만 알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죄를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그 심판자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전혀 무의미한 것들이 아닙니다. 이 죄가 오늘날 인기가 있고 그리스도가 오늘날 멸시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곧 이제 그 죄는 심판받고 그리스도께서 높임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결말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빛을 따라서 지금 이 순간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서도 우리는 죄를 정지하고 그리고 그리스도를 높이는 삶을 지금 살고 있어야 됩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인들과 같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아주 자주 그리스도인들은 그냥 세상의 흐름을 따라오지 못하는 그냥 옛날처럼 사는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뒤처진 사람들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근데 사실 정반대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시대에 뒤쳐져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사실 그 시대를 앞서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그 미래의 빛에 비추어서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시대에 뒤처진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는 참으로 시간을 앞서가는 미래에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도는 우리가 다른 이들처럼 자지 말고 그리고 깨어 있으라고 할 뿐만 아니라 갑옷을 입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우리가 마치 전쟁터에 나와 있는 사람들처럼 살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쟁이 일어나는 순간에 지금 처해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아주 치열한 전투가 일어나는 격전지에 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경계 가운데 있어야 되고 우리는 완전한 무장 가운데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시 한 번 삼중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 무장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8절에 이 세 가지의 장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믿음의 흉배고 두 번째로 사랑의 흉배입니다. 세 번째로 구원의 소망의 투구입니다. 그래서 이 흉배는 두 가지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앞 흉배가 있고 등을 가리는 흉배가 있습니다. 그리고 머리를 가리는 투구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인의 군인을 이렇게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뒤를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아주 간사한 대적이 그것을 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대적이 뒤로 돌아와 숨어서 그 뒤로 공격을 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흉배가 바로 믿음의 흉배입니다. 그리고 이 앞을 가리고 있는 흉배가 사랑의 흉배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심장을 우리의 마음을 보호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등을 보호해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그 감정 애정을 보호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을 보호하고 있는 투구가 필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시고 그리고 여러분의 머리를 차갑게 유지하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이와 같이 장비를 잘 갖춘다면 여러분은 그 전쟁에서 잘 싸울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마귀는 이 세 가지 부분을 계속해서 공격하기를 원합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에 대해서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공격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미혹합니다. 이 소망을 공격하면서 그런 미래가 어디 있겠느냐라고 공격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을 공격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차갑게 식게 만듭니다. 그는 우리의 믿음을 갉아먹고 우리의 뜨거운 열정을 갉아먹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미래를 바라보는 전망을 어둡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하나님을 위한 싸움에서 더 이상 버티고 있는 것이 의미가 없다라고 우리를 속이는 것입니다.

 

이제 12절에서 사도는 그에 대해서 다른 삼중의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2절과 13절에서 우리의 믿음의 여정 가운데 매우 중요한 것이 담겨 있습니다.

이 모임의 인도자들에 대해서 이 구절이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부분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목자들과 관련된 두 쌍의 삼중의 것을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삼중의 것이 여기에 담겨 있는 이유에 대해서도 또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영적인 어려움과 시험 가운데서 이제 그들을 보호하고 인도하는 영적인 목자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전서에서도 동일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서신서에서도 핍박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보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서신서의 5장에서 베드로는 장로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생긴 지 아직 1년 정도가 안 되었을 텐데 그 가운데 그들을 인도하고 있는 그 목자들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될 때에 놀라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영적인 인도자들을 알아주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 가운데 있는 젊은 성도님들에게 그와 같이 영적인 인도자들이 있다면 놀라운 복인 것입니다. 그 인도자들은 영적인 성숙함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다른 이들에 대해서 세심한 그 보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두 구절에서 사도는 먼저 인도자들의 책임에 대해서 언급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삼중의 것을 통해서 그 책임을 말하게 됩니다. 12절에 첫 번째로 수고하는 책임이 있고 두 번째로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는 책임이 있습니다. 세 번째로 권하는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런 일을 하면서 수고하게 됩니다. 그 진정한 인도자는 수고하기를 자원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고 있습니다. 다스리다라고 되어 있는 헬라어 원어 proi?sthmi(프로히스테미)의 뜻은 앞에서 서 있다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목자의 성격입니다. 그는 앞에 서 있습니다. 그가 가장 높은 자리에 차지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앞에 서 있는 것은 이제 신자들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를 제시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앞에 서서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목자는 뒤에 서 가지고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라고 지시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본으로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그 길을 본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로 그들은 수고하는 일이 있으며 두 번째로 그들이 제시하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권한다에서 그들이 경고하고 있는 그 경고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것은 또한 진정한 인도자의 성격입니다. 그 위험에 대해서 미리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 영적인 실체를 파악하고 미리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인도자들의 책임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 인도자들을 알아주는 책임이 있는 세 가지를 보게 됩니다.

12절에 “너희가 알고” 그리고 13절에 가장 귀히 여기며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라고 돼 있습니다.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들이 귀히 여기는 데는 카리스마스가 있어서 귀히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잘생겨서 그를 귀히 여기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가정적으로 이제 친인척 관계라서 그를 귀히 여기는 것도 아닙니다. 아주 좋은 인격을 가져가지고 그를 귀히 여기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들이 하고 있는 그 일로 말미암아 그들을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수고하는 가운데에 주의 백성을 사랑하고 그들을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로 우리가 그들을 알고 그리고 그들을 귀히 여기고 그리고 세 번째로 너희끼리 화목하라 인도자에 대해서 만족하는 것입니다. 아주 그들에 대해서 평가하고 폄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불평을 쌓고 반대하는 무리들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수고하고 인도하고 그리고 사랑하고 있는 그 인도자들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다섯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이 있지만 시간상 몇 가지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의 삶에 대해서 비결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참으로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인상을 쓰고 있습니다. 항상 불평을 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있습니다. 항상 부정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아주 그냥 찡그리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 놀라운 삼중의 것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6절에 첫 번째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18절에 범사에 감사하라. 참으로 이 슬픔으로 가득 찬 세상 가운데서 오직 그리스도인들만 그 기쁨이 무엇인지를 보여줄 수 있는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영어 성경의 예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영어 성경에서 영어로 가장 짧은 구절은 요한복음 11장 35절에 있는 “예수께서 우시더라”라는 구절입니다. 그러나 헬라어 원어 성경에서 가장 짧은 구절은 바로 이 16절 “항상 기뻐하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예수께서 우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슬픔을 가져가시고 이제 우리에게 기쁨을 주신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구절을 보겠습니다. 이제 공급에 대한 삼중의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참으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값없이 은혜가 주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그 은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 가지 주님의 호칭이 함께 나온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호칭이 이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에 바울이 기록한 다른 서신서보다 가장 많이 나온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20번에 걸쳐서 이 짧은 두 서신서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그분의 온전한 이름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세 호칭에서 예수라는 이름은 우리를 위해 고난받으신 주님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제 그 보좌에 앉으신 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필요를 충분히 채워지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 주님의 말씀으로 여러분에게 주님께서 복 주시기를 원하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