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Recent Post

theWord Bible Software

Category

주의 날 이 시간에 복음을 증거할 수 있게 되어서 참으로 제 특권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잠깐 골로새서에 나온 두 개씩 쌍으로 나온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사실 오늘 이미 우리는 두 개의 쌍으로 나오는 것에 대해서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주의 만찬에 함께 참여하면서 예배를 드릴 때에 이미 우리는 두 개씩 쌍으로 되어 있는 것을 이미 경험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주님의 두 가지 성품에 대해서 생각하며 주님의 신성과 인성이 한 인격 안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두 개의 상징물을 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두 개의 상징은 서로 보완적인 것입니다. 그 떡은 우리 주님의 몸을 상징하는 것이고, 잔은 주님께서 흘리신 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걸 통해서 주님의 죽으심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리고 또한 흥미롭게 우리는 그것을 주의 날에 하였습니다.

왜 우리는 이 만찬을 주의 날에 하고 있습니까? 그 답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이 만찬에 참여하면서 주님의 죽으심을 증거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우리 주님의 부활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주께서는 죽으셨지만 그리고 다시 살아나시고 영원토록 살아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 골로새서에 나온 두 개씩 쌍으로 나온 것에 대해서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이제 네 개의 두 개씩 쌍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호칭에 대해서 두 개씩 쌍으로 나온 것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서신서에서는 아주 특징적인 주님의 호칭이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리스도의 충만에 대해서 또한 두 개씩 쌍으로 나온 것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서신서에서는 그 충만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두 번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서 또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골로새서에서 또한 십자가에 대해서 두 번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로 그리스도의 머리 되심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또한 두 번에 걸쳐서 이 서신서에서 그리스도께서 머리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신약 성경에서 많은 그리스도의 호칭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신약 성경이 사실상 그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에서 다윗의 아들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라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의 시작부터 그리스도의 두 개의 쌍으로 된 이름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실 이 신약 성경은 마지막에 우리 주님의 두 개의 호칭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광명한 새벽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한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라고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주님의 이름에 대한 온전한 말씀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시작에서는 다윗의 자손이라고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약 성경의 마지막에서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호칭은 우리 주님의 왕되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골로새서에 나온 주님의 호칭을 보겠습니다.

2장 6절과 7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그리고 3장 23-24절을 보겠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우선 2장 6절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라고 했습니다. 골로새서에서 이와 같은 호칭이 나온 것은 여기가 유일합니다. 때때로 주가 앞에 나와서 주 예수 그리스도 이렇게 되어 있기도 합니다. 또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라고 나와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직 여기에서만 그리스도 예수 주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 우리가 구원받을 때에 그리스도 예수 주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는 여기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그분의 모든 충만한 것을 받은 것을 강조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짓 교사들이 말한 것과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뭔가 다른 것을 추가로 받아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사도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이미 그들은 필요한 모든 것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라.”

하지만 거짓 교사들은 그리스도 예수로 시작하는 것은 좋지만 다른 것이 더 필요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그 외에 뭔가 다른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는 그것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받은 그 주님께서 우리로 계속해서 그 길을 갈 수 있게 하시는 분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이 그것을 강조하고 있는 표현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러므로 그 안에서 행하라.”

이 독특한 표현 안에 담긴 것에 대해서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아주 압축적으로 우리에게 그 의미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될 때에 이분은 구약 성경에서 우리에게 계시된 우리가 기대하고 있었던 분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 그리스도라는 것은 구약에서 메시아와 같은 단어입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그 장차 오실 분에 대해서 계속적인 약속을 주고 있었습니다. 수 세기 동안 경건한 선한 이들이 이제 오실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리스도라고 말하면서 ‘너희들이 주로 영접한 분이 바로 수세기 동안 사람들이 기다려 왔던 바로 그분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하나님의 약속이 이제 이분 안에서 다 성취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단어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 표현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모든 직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세 가지 특별한 직임을 받은 사람들에게 기름부음이 받아진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제사장이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선지자가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왕이 기름부음을 받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또 왕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선지자였습니다. 또 어떤 선지자들은 제사장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구약 성경에서 이 세 가지 직임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한 명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그리스도께서 바로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이요 기름부음을 받은 선지자요 기름부음을 받은 왕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 세 가지 직임을 모두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그리고 제사장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안내합니다. 그리고 왕은 하나님의 뜻을 실행합니다. 그래서 왕은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는 자이며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제사장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안내합니다. 우리는 이 세 가지 직임을 다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라는 것은 이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의지와 그리고 감정과 또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담으로부터 이 인격을 이루는 세 가지 구성이 모두 손상되었습니다. 그의 생각은 어두워졌습니다. 그의 의지는 이상하게 꺾여졌습니다. 그리고 그의 감정은 이제 계속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그는 죄를 짓고 나서 그 전에는 알 수 없었던 다른 두려움과 혼란을 겪게 된 것입니다.

선지자는 그러한 사람들의 생각에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줍니다. 제사장은 우리의 감정을 올바르게 하나님 앞으로 인도합니다. 이 제사장의 일이 우리의 마음에 있는 두려움을 잠잠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왕은 우리의 의지를 합당하게 작용하도록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우리에게 필요한 일이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그리스도라고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또한 예수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이제 역사 가운데서 한 사람으로 오신 그 인물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로서 그분은 속죄 사역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계속 사역을 하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께서 또한 예수께서 우리의 속제 사역을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또 여기 그리스도, 예수, 주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라는 것은 이제 높임을 받으신 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난 받으신 구주께서 이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지금 높임을 받으신 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주라는 이 온전한 호칭을 우리는 깊이 묵상하며 감사할 수 있습니다. 구원을 위해서 이 외에 다른 분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3장에 나와 있는 두 번째 호칭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 호칭은 오직 골로새서에서 여기에만 나와 있는 호칭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이 특별히 종에 대해서 말씀하면서 언급된 구절임을 생각하게 됩니다. 로마 제국에 많은 노예들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이 노예들은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그런 일들을 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주인들은 친절하지 않고 때로는 학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일들은 아주 하찮은 일들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노예들에게 사도는 “마음을 다하여 하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냥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섬기는 일에 그 존귀함과 가치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여러 직업과 직장들은 그냥 일상적인 것들입니다. 그리고 이 노예들이 하는 일은 더욱 형편없는 그러한 일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 직업과 이 직장 일이라는 것이 항상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이고 우리에게 별로 흥미를 가져다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가 격려하는 것은 그냥 일상적인 업무 가운데서 너희들은 주 그리스도를 섬긴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어떤 것은 세속적인 일이고 어떤 것은 하나님에 속한 것이라고 우리가 일상적으로 나누듯이 나누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지 이곳에 왔을 때만 주님을 섬긴다라고 잘못 생각합니다.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읽을 때만 그리스도를 섬긴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사무실에서 컴퓨터 앞에서도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매님들이 어머니로서 주부로서 집안 일을 할 때도 주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을 인식할 때에 가장 우리 생에 하찮은 일들이 가장 높은 일로 높여지는 것입니다.

구원과 관련되어서 그리스도 예수 주라는 호칭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섬김에 있어서 주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으로 호칭이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라는 이 호칭 가운데 골로새서에서 흥미롭게 두 개가 제시된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에 대해서 두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장에 있고 하나는 2장에 있습니다.

1장 19절에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해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그리고 2장 9-10절에서 거의 유사한 표현을 보겠습니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 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그래서 우리는 사실 여기서 골로새서에 나온 제일 중요한 표현 중에 하나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1장에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리고 2장에서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이 두 가지 표현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장에서는 “모든 충만”이라고 하며, 2장에서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1장에서는 “모든 충만으로 그 안에 거하게 하시고”, 2장에서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하나님께서 모든 우주를 회복하시는 그 큰 계획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위대한 계획을 위해서 누가 과연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지 질문을 드렸습니다. 거기에 유일한 한 분이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만이 그 능력을 충만하게 가지고 계심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1장에서 그 하나님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자원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분은 은혜가 충만하신 분입니다. 그분이 지혜가 충만하신 분입니다. 그분이 능력이 충만한 분입니다. 그 위대한 개혁이 성취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그리스도의 충만함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참으로 그 안에 어떠한 부족함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많은 결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는 결함 없는 그분 안에서만 충만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 1장에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분”이라고 주님을 언급하였습니다. 그런데 2장에서는 단지 능력의 충만이 아니라 신성의 충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신성의 충만이 몸을 가지신 분 안에 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그러한 신비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 신성이 한 사람 안에 그렇게 압축되어 들어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걸 우리가 비슷하게라도 말하자면 태평양의 모든 물이 어떻게 이 컵 안에 들어올 수 있는지 그러한 것과 같은 질문입니다. 그런데 그게 실제로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셨지만 그 신성이 그 안에 들어가는 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주님 안에 그 모든 신성의 충만이 들어갔는데 거기서 좀 제한이 되고 희석되어서 신성이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단지 50%만 사람이 되시고 50%만 하나님의 신성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온전히 사람이셨고 그리고 본질적으로 하나님이신 분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사람으로 오셨을 때에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어느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그 신성에 충만한 것은 참으로 우리 주님에게 있어서 본질적인 성격입니다. 그리고 그 신성의 충만은 우리 주님에게 있어서 영원한 것입니다. 그 신성의 충만이 한 사람의 몸 안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외에 다른 어떤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도는 이 서신을 통해서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여지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금방 확인을 한 것이 이제 9절에 충만이라는 단어가 나오고 10절에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 졌으니라고 되어 있는데 헬라어로는 이제 같은 단어입니다. 그런데 영어 성경에는 두 단어가 다르게 쓰여 있으며 한국어는 두 개가 이제 충만이라고 같이 나와 있습니다. 1장에서 모든 충만을 말하였고 2장에서 신성의 모든 충만을 말한 사도는 이제 그 바로 다음 구절에서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지고”라고 말하였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믿는 주님께서 신성의 모든 충만이 그 안에 거하심으로 우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지고라고 했을 때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 더 이상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구주를 모시고 있고 이 공급하시는 분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거하다라는 것과 관련해서 이 중요한 단어를 좀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장과 2장에서 이 충만함이 그 안에 거하다라는 같은 단어로 말하고 있습니다. 헬라어에서는 이 거하다라는 단어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paroikevw(파로이케오)라는 것이 있으며 그리고 다른 하나는 katoikevw(카토이케오)라는 것입니다.

다른 부분은 같은데 한 단어는 파라(para)로 시작되고 두 번째 거는 카타(katav)로 시작되는 앞부분이 다릅니다. 이 파라로 시작되는 이 단어는 방문자로서 거한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단어 카타는 그 집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거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번째 단어는 계속적으로 거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한국에 방문하여서 첫 번째 단어처럼 잠깐 거하다가 돌아가는 것이죠. 임시적으로 방문객으로서 여기에 거하는 것입니다. 다음 월요일에 저는 돌아갑니다. 제가 북 아일랜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제가 집으로 가는 것도 좋아하지만 또한 한국에서 이렇게 방문하는 것도 임시적으로 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여기에 임시적으로 여기 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께서는 여기 두 번째 단어처럼 계속적으로 여기 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하다라고 했을 때 이 두 번째 단어를 사용해가지고 계속적인 거주자로서 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냥 단지 이 거하는 것이 잠깐 동안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충만이라는 것이 언제는 충만했다가 점점 사용해가지고 줄어드는 충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 이 잔을 갖다 주었을 때 여기 물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자꾸 마셔가지고 물이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음 집회 때 이제 여기다가 물을 채워 넣으시겠죠. 하지만 우리 주 예수님께는 그 충만을 다시 채울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주님은 충만하신 분이고, 수백만 년이 흐른 뒤에도 지금처럼 계속 충만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수많은 신자들이 주님의 그 충만함 가운데서 우리가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그 충만하신 그 상태가 줄어들지 않는 것입니다. 소진할 수 없는 충만을 우리 구주께서 가지고 계십니다. 이와 같이 1장에서는 그 능력의 충만함을 말하였고, 2장에서는 신성의 충만을 말하였습니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서 이중적으로 나온 것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다시 한 번 그것은 1장에 한 번 나오고 2장에 한 번 나오는 것입니다.

1장의 19-20절을 보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그리고 2장 14-15절입니다.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이 두 부분이 골로새서에서 십자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유일한 부분입니다.

1장에서는 “십자가의 피”라고 말씀하며, 2장에서는 “십자가로 승리하셨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십자가의 전쟁이라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참으로 갈보리에서는 아주 심각한 전투가 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그 자리에서 그 지옥의 세력과 그 악한 세력들이 주님과 갈보리에서 싸운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고 갈보리에서 승리하셔서 영원한 승리자로 일어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오전에 그것을 기억한 것처럼 우리는 갈보리에서, 그 십자가에서 주님께서 이루신 사역을 기억하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사실 1장에서는 이 갈보리와 연관된 3가지 단어가 이렇게 나옵니다. 십자가가 나왔고, 그리고 죽음이 나왔으며, 그리고 또한 피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 개의 단어는 모두 그 하나의 영광스러운 사건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각각의 단어는 다른 측면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 말할 때, 그것은 주님께 내려진 그 선고를 생각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하기를 죄인은 죽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고난 받으셨을 뿐이 아니라 그분은 실제로 그 고난 가운데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우리가 놀라게 되는 신비입니다.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바로 그분 자신이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그것을 통해서 죄의 모든 대가를 선고받으시고 값을 치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대해서 말할 때는 이것은 단지 선고일 뿐만 아니라 부끄러움을 생각하게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실 때, 참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되는 부끄러움을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세 번째 단어를 보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그것은 우리를 위한 속죄의 제사였습니다. 참으로 이 희생제사에서 주님이 흘리신 보혈의 가치를 우리는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 피야말로 우리가 그 은혜의 보좌에서 영원토록 복을 받게 하는 우리를 위해서 흘리신 대가입니다.

 

그리고 이제 2장에 나와 있는 이 놀라운 말씀을 또 하나 살펴보겠습니다. 이 표현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14절에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그래서 첫 번째가 “도말하시고” 두 번째가 “제하여 버리사” 세 번째로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그리고 15절에서는 “정세와 권세를 벗어버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흥미로운 여섯 개의 표현은 이렇게 간단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사실 그 갈보에서 일어난 사건을 볼 때에 이 여섯 가지 표현하고는 정반대가 일어난 것을 눈으로 보기에는 그렇게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십자가를 우리가 다시 한번 제대로 봐야 되는 것이라는 필요가 있는 표현이라고 저는 명칭을 붙였습니다.  이것이 십자가가 담고 있는 진정한 의미를 보여주고 있는 표현입니다.

첫 번째로 “우리를 거스리고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범죄에 무엇을 했는지 그 죄의 목록을 기록하는 증서, 즉 우리의 죄가 무엇 무엇이 있는지 기록한 그런 증서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거스리는 것입니다. 우리를 정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계속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멀어지게 만드는 증서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범죄 기록이 남겨 있는 그 증서를 세 가지를 하신 것입니다.

첫 번째로 “도말하시고” 그래서 어떠한 단 하나의 죄 목록도 보이지 않게 다 도말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하여 버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저는 거기서 보이지 않게만 한다고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도말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증서를 아예 치워버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다 지워버리시어 보이지 않게 첫 번째로 하셨고 지금 제가 보여드린 것처럼 글씨가 많이 쓰여져 있는 이 종이처럼 우리가 죄 목록이 적혀 있는 증서가 있었는데 도말하셔서 완전히 깨끗하게 하얀 종이처럼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지 깨끗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지워버렸습니다. 깨끗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치워버렸고 그리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죄는 완벽하게 다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사람들의 눈으로 보인 일과는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은 빌라도가 그 죄를 분명하게 기록한 것을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 행한 그 죄목을 적어가지고 그 머리에 단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빌라도가 쓴 그 글을 다른 걸로 바꾸길 원했습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내가 할 일을 했다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죄목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죄의 명패를 치워버리기를 원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의 죄목을 다 치워버리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죄의 명패를 치워버리기 원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빌라도는 사람들에게 그를 가져가 못 박으라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빌라도가 말한 것처럼 그를 가져가서 못 박으라, 그를 가지고 가버려라라고 말했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은 우리 주님께서 우리 사람들의 죄를 가지고 가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렸던 것을 사실적으로 말하고 있는 두 가지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주님을 십자가로 데려가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하지만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주님을 못 박은 것이 아니라 참으로 주님께서 우리의 죄목을 십자가에 못 박은 거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15절에 나와 있는 세 가지 표현을 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두 번째가 “밝히 드러내시고” 그리고 “승리하셨다”라고 했습니다.

이것도 역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일어났던 일과 반대일 것입니다. 주님을 끌고 와서 그분의 옷을 벗기고 그것을 가지고 제비 뽑았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제 그 의미에 대해서 다시 실제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옷 벗긴다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그 정사와 권세들, 그 악한 영의 세력들을 완전히 무력화시키고 벗긴 것입니다. 참으로 거기에 많은 군인들이 있었지만, 많은 악한 세력들이 무장하고 옷을 입고 있었지만 참으로 그들의 무장이 다 해제된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주님께서 실제적으로 그 악한 영의 세력들의 무장을 다 벗어버리고 그들을 무력화시키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주님을 다 벗겼을 때 주님을 이제 완전히 무력화시켰다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상 그 악한 세력들이 완전히 무력화된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볼 때 이것이 그들이 주님에게 한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사람들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서 높이 들려서 이제 공개적으로 그분께서 부끄러움을 당하도록 밝히 드러냈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사람들이 주님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것들을 밝히 드러낸 것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그 십자가에서 승리하셨습니다.

또한 이것은 거기서 보인 것과는 반대인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릴 때 가시 면류관이 그 이마에 쓰여져 있고, 못이 박혔고, 그 입술은 목이 말랐고, 사람들이 그 십자가로 승리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실제가 우리 주님께서 죄와 사탄을 이기신 것입니다. 참으로 오늘 우리 주님께서 이루신 그 놀라운 승리에 대해서 찬양을 드렸습니다. 여러분께서 여기서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들을 잘 이해하셨기를 바랍니다.

 

골로새서에서 십자가가 두 번 이렇게 나옵니다.

1장에 나온 십자가는 그 가치를 우리에게 말해주는 십자가입니다.

2장에 나온 십자가는 그 격렬한 전쟁터였던 갈보리 십자가에서 어떤 승리가 있었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표현입니다.

이제 다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다음 시간에 더 흥미로운 주제를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posted by 징검 다리